개성이 뭔데?
1983년 당시 문교부(현 교육부)는 교복자율화를 선언했다.
학생들의 개성과 자율성을 위해서란 이유와, 교복이라는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다는 목적이었다. 나는 교복자율화가 시행되던 1983년 중학교에 입학했고 1989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9년 다시 전면적으로 교복을 입었기 때문에 한 번도 교복을 입지 않고 중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이른바 교복자율화 1세대인 셈이다. 언니의 세일러 교복이 예쁘게 보이지 않았던 나는 교복 자율화가 마냥 좋았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교복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입어야 하고 개인의 체형이나 특성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누구나 같은 옷을 입는다는 것은 단점이면서도 장점이었다. 교복이 있으면 매일 아침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집이 부자이거나 아니거나 교복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하지만 교복이 없으면 매일 무슨 옷이건 입고 나가야 한다. 개성을 표현하려면 한 두벌의 옷과 신발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부모님의 경제적 능력은 곧바로 학생들의 옷과 신발, 가방 모든 곳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등장한 것이 일명 메이커로 불리는 브랜드 제품이었다. 특히 학생들에게 옷, 신발 그리고 가방에 붙은 제품의 로고가 중요한 시대가 온 것이다. 당시 신발은 나이키, 아디다스, 프로스펙스 등이 가장 유명했고 옷은 명동에 있는 의류샵 옷이 유행이었다. 물론 이것은 개인의 경험치지만 부촌도, 그렇다고 빈촌도 아닌 지역에서 학교를 다녔으니 보통의 학생들이 그러했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교복을 입던 학생들이 대거 옷이나 신발, 가방을 사야 했으니 의류시장, 신발시장 모두 그야말로 폭풍 성장의 시기였을 것이다. 깻잎머리가 유행을 하고 노스페이스점퍼가 교복 수준이 되거나 롱패딩의 물결이 학교 교문을 장악하는 대유행의 시조가 그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메이커 신발이 유행을 하다 보니 '짝퉁'도 덩달아 전성시대를 맞고 있었다.
'나이스'가 등장했고 '아디도스'도 등장했다. 얼핏 보면 나이키처럼 보이는 이 제품은 의외로 많은 학생들이 신고 다녔다. 국내 브랜드인 프로스펙스가 등장하자 나이키를 신지 못하는 학생들은 이 브랜드를 많이 찾았다. 프로스펙스보다 가격이 더 저렴한 스펙스도 등장했는데 나는 이 스펙스를 신었다. 짝퉁과 스펙스의 등장은 주류에서 벗어난 나와 같은 비주류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했고 대리만족을 선사했다.
비록 스펙스였지만 새로 산 신발은 내 보물 1호가 됐다. 혹시나 운동장 흙이 묻을까 봐 운동장을 에둘러 다녔다. 친구들 발에 부딪쳐 흉터가 생길까 봐 신경은 온통 발에 가있었다. 남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얼룩이라도 생기면 하루종일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나이키를 신은 친구 앞에서는 고개보다 신발이 먼저 뒷걸음질 치고 말지만 혼자 가만히 새하얀 운동화를 보고 있으면 쭈그러들었던 마음도 금세 위로받을 수 있었다.
인생은 늘 산 넘어 산이다. 신발이 해결되고 나니 가방과 옷이 문제였다. 신발은 한번 사면 1년을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옷은 매일 입고 나가야 하니 한벌만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한창 다른 아이들의 옷이 눈에 들어오던 시기였으니 엄마가 사주는 옷이 눈에 찰 리가 없었다. 내 눈에 들어오는 옷은 명동에 있었다. 당시 명동에는 지금의 편집샵과 비슷한 옷가게가 있었다. '빌리지'란 이름으로 기억되는 옷가게는 몇 개의 층으로 되어 있을 정도로 컸고 당시 젊은 사람들에게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나에게 옷은 없었지만 언니는 있었다.
내가 고2가 되자 언니는 대학에 들어갔다. 차비와 밥값을 겨우 챙겨 다니는 가난한 대학생 언니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학비를 마련하고 옷을 사 입었다. 그래봐야 저렴한 옷들이 대부분이었겠지만 고등학생 눈에 언니의 옷은 명동 옷가게에나 구경했던 그 옷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언니가 학교를 가고 나면 옷장 속 언니 옷은 내 차지였다. 언니가 오기 전까지 입고 제자리에 놓아두기만 하면 됐다. 나중에는 잠깐씩 꺼내 입었던 옷이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친구와 만나기로 한 어느 날, 언니의 옷을 입고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옷은 언니가 애지중지하던 옷이었고, 언니는 한번 더 자기 옷을 입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즈음이었다.
그렇다고 못 입을 내가 아니었다. 그때는 말이다. 언니의 옷장에서 옷을 가져와 가방 안에 접어 넣고 집 문을 나섰다. 나는 아파트 계단을 한 층 정도 내려가서는 가방 속에 넣어 둔 옷을 꺼내 입고 아파트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언니는 그날 밤늦게 집에 온다고 했으니 언니는 절대 알 수 없었다. 완벽하고 완전하다 여겼던 나의 계획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야 했다. 계단 중간쯤에서 옷을 벗으려는 순간, 집 현관문이 열렸다. 엄마였다. 집 앞 가게에 가시려던 엄마는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 가운데 가방을 바닥에 던져놓고 엉거주춤 옷을 벗고 있는 나와 마주치고 만 것이다. 아파트 계단 가운데에서 엄마와 마주치는 일은 그 후로도 몇 차례 더 발생했다. 365일 거의 매일같이 학교를 가야 했던 그 시간들을 도저히 몇 벌의 옷으로 채우기는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교복 자율화는 나에게도 모두에게도 씁쓸한 문제들을 남긴 채 1989년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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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개성은 교복 자율화로 표현되지 못했다. 교복 자율화는 나이키냐, 나이스냐를 구분하는 세상의 잣대를 가르쳐 준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후로도 교복에 대한 논쟁은 뜨거웠다. 교복을 입히지 않으면 계층 간 위화감이 조성되고 학생들의 무분별한 탈선이 확대된다는 거였다.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획일화된 교복은 학생들의 개성을 막고 21세기 창조적 인간을 기르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른들의 논쟁을 비웃기라도 하듯 학생들은 교복을 개조해 자신들의 개성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치마를 줄이고 교복 상의를 잘랐다. 치마 아래 생활복 바지를 겹쳐 입고 하얀 반팔 교복 안에 긴팔 옷을 입었다. 치마의 길이는 짧은 미니스커트가 되었다가 긴 플레어스커트가 되기도 했다. 이번엔 교복 제작사들이 아예 교복을 학생들의 취향에 맞게 '스마트'하게 변형시켰다.
40년 전 '나이키와 나이스'는 새로운 얼굴을 하고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노스페이스 점퍼를 입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롱패딩을 입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등 여전히 교복은 획일성을 비웃고 개성 아닌 계층을 덧입고 있는 중이다. 교복을 놓고 벌이는 개성과 자율성의 논의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 보인다. 우리는 교복자율화도, 교복도, 교복의 개성화도 모두 시도해 보았다. 개성과 자율성은 삶의 방식에서 나오는 태도다. 개성과 자율성을 키우고 싶다면 삶의 방식을 바꾸면 된다. 아이들의 삶에 자유를 주면 될 일이다. 옷은 그저 거들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