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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정 Jun 26. 2023

열 번의 불합격과 한 번의 재수

다시 시작하는 힘






큰 아이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예술고등학교에 갔다. 예고 진학은 아이가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유일하게 그리는 일에만 능동적이었던 딸을 미술학원에 보낸 것도 나였고, 학원 원장님과 아이의 진로를 의논하다 원장님의 권유로 예고를 결정한 것도 나였다. 아이는 유일하게 재미있어하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 때문에 나의 결정에 별 저항 없이 따랐다. 나는 아이가 예고를 가서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면 살벌한 고등학교 시절을 덜 불행하게 보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 또한 순전히 나의 생각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그렇게 반복된 노동이라는 것을 몰랐다. 여전히 잘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입시에 필요한 그림 그리기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게다가 그렇게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몰랐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시작한 미술학원 생활과 입학 성적을 맞추기 위한 노력은 꼬박 7년이 걸렸다. 하지만 어려운 예고 합격의 기쁨은 잠시였다. 아이는 60명의 경쟁자에 둘러싸여 매일 울며 학교를 다녔다. 아무리 해도 자신만큼, 아니 그 이상 잘하는 아이들 틈에서 더 잘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자퇴를 하고 싶다고 우는 날이 절반이었다. 



"우리 1학년까지만 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자퇴를 하던가 전학을 생각해 보자."

시험을 보고 오는 날이면 아이의 좌절은 내 온몸으로 전해질 정도였다. 설상가상 집의 경제 상황도 말이 아니었다. 전 남편의 알 수 없는 빚 때문에 집을 팔고 쫓기듯 이사를 한 상황이었다. 학교는 어찌어찌 보내겠는데 학원을 보내거나 과외를 시킬 여유가 없었다. 아이가 이 상황을 잘 이겨내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여기서 멈추면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며 아이에게 채찍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어찌어찌 2년의 시간이 지났고 대학입시를 치르게 됐다.





수시 원서를 5군데에 넣었다. 높은 곳 1군데, 적정한 곳 2군데, 합격 가능하다 여겨지는 곳 2군데를 넣었다.

결과는 예비번호를 받은 한 곳을 제외하고 모두 불합격이었다. 그 예비번호라는 것도 앞에 학생들이 모두 입학을 포기해야 순번이 오는 복불복과 같았다. 결국 아이는 단 두 달 만에 5번의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나는 아이에게 5번의 결과를 물어봤고 아이는 5번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수시가 끝나고 정시 원서도 넣었다. 그간의 노력과 들인 시간이 있으니 한 군데는 붙지 않을까 기대를 한 것도 사실이다. 아이도 나도 태연한 척했지만 '이번에는 어디라도 되겠지'라는 기대를 버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이는 수시 5번의 실패 후에 다시 정시에서도 모두 떨어졌다. 실패 횟수가 늘어날수록 결과를 물어보는 것이 조심스러워졌다. 엄마는 손주의 기가 죽을까 염려하셨다. 전화를 할 때마다 울먹울먹 하며 울음을 참는 가쁜 숨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온전히 전해졌다. 



 "시험 보느라 고생했어. 이제 좀 쉬고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 보자. 대학 떨어졌다고 어떻게 되지 않아." 

내 머릿속을 뒤져 감정을 빼고 가장 담담한 말들을 꺼내어 아이에게 말했다. 솔직히 나는 무덤덤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거나 하지 않았고 머리를 꽁꽁 싸매고 드러눕거나 하지도 않았다. 대신, 학원도 보내고 과외도 시키고 해야 하는데 제대로 지원을 해주지 못했다는 미안한 마음이 몰려왔다. 아이는 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 그림을 그렸다. 그러니 내신과 수능은 따로 공부를 시켜야 하는데 그것에 신경 쓸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럴 정신이 있었다 해도 경제적 형편이 되지 못했다. 아이가 노력을 했느냐 아니냐는 아이의 문제였다. 나는 내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담담한 말들 뒤에 숨어 아이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열 번에 가까운 불합격 통보를 아이는 어떻게 견뎠을까? 나는 한 번의 실패에도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좌절의 땅굴을 파고 들어가 나오지 못하는데 말이다. 아이는 울거나 하지 않았지만 말수가 적어졌다. 방에서 나오는 일이 뜸해졌고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지도 않았다. 차라리 울기라도 하면 위로도 해주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나가자고 손을 잡았을 텐데. 우리는 서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간을 보냈다. 태풍이 몰려오기 전 하늘처럼 묵직한 고요함이 집안 곳곳에 내려앉았다.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아이는 재수를 하겠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미대가 아니라 예대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사람의 시야는 좁아서 내가 경험한 것이 아닌 일에는 의심과 부정의 감정이 앞선다. 말로는 직업의 귀천이 없고, 글로는 대학 서열화가 무자비한 불공정이라고 쓰지만 머릿속은 그렇지 못했다. 

"엄마가 4년제를 보내려고 지금까지 견디며 공부시켰는데 예대를 간다고? 너 나중에 후회해."

대학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예대를 가겠다는 아이의 말이 나를 더 흥분시켰다. 



큰 아이는 고집이 셌다. 이미 내 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고 싶은 학교를 이미 정했고 그 학교를 가기 위해 어떤 학원을 다녀야 하는지도 정해 놓았다. 생활비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테니 학원비만 내달라고 했다. 아르바이트는 알아보고 있는 중이니 곧 일을 할 거라고. 아이는 모든 계획을 짜놓은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신은 계획을 다 세웠으니 엄마는 그렇게 알면 된다는 아이의 표정에 나는 다음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이의 재수는 그렇게 본인 뜻대로 시작됐다. 큰 아이는 재수를 하고 자신이 원하는 학교에 입학했다. 만족하며 학교를 다녔고 코로나 시국에 취업을 하는 이변(?)을 만들기도 했다. 이제 그동안의 시련은 끝나고 성공으로 마무리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이후에도 아이는 퇴사와 입사를 두어 번 반복했다. 퇴사를 할 때마다 힘들어했고 '실업급여'가 끝나기 전에 취업해야 하는 불안감에 늘 긴장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그때마다 취업을 했다는 거다. 이제 '연봉을 더 많이 받는 것'이 목표라고 말하지만 난 아이의 도전과 실패가 여기에서 멈출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53년 내 인생만 돌아봐도 수없는 실패와 좌절이 먼저 떠오른다. 그것은 53년어치의 실패와 좌절이다. 28년을 산 아이는 어떨까? 아이도 마찬가지일 거다. 아이에게는 28년이 자신이 살아온 인생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수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다. 아이는 내가 아니기에 내 실패와 아픔을 모두 알 수 없듯 나 역시 아이가 아니기에 아이의 실패와 아픔을 모두 알 수 없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이를 실패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는 것, 실패한 입시보다 실패해서 속상한 마음을 먼저 알아봐 주는 것, 넘어졌다고 바로 부축해 주기보다 일어난 이후 안아주는 것, '왜'냐고 묻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했을 너의 손을 잡아주는 일이다. 그것은 내가 받아보고 싶었던 위로이자 응원이었다. 그 위로와 응원을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힘이 내게 있다는 것에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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