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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울 Aug 22. 2023

여동생

<1>먼 과거 속에 여자애 하나가 생글거리며 서 있다. 꽃봉오리처럼 탐스러운 입술, 갈매기 날갯짓 같은 눈썹, 복숭아를 닮은 발그스레한 뺨. 나보다 세 살 어린 동생이다. 엄마는 그 애를 예뻐했다. 목소리도 또랑또랑하고 눈동자도 초롱초롱했다. 그 아이의 별명은 '쁘니'였다. '예쁜이'에서 끝의 두 글자를 발음대로 부르는 것이다. 엄마 말고도 그 애를 한 번 본 사람들은 누구나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하고 나란히 서 있으면 어김없이 여동생에게 먼저 다가가서는 미소를 지었다. 그 옆에서 쭈뼛대며 서 있는 나를 뒤늦게 발견하고서는 자매가 서로 다르다며 번갈아 쳐다보다가 눈길을 거두었다.

<2>이른 아침, 엄마는 잠이 덜 깬 그 애의 머리맡에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바나나 줄께, 일어나라." 

 참빗에 물을 묻혀가며 그 애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기고 양 갈래로 묶었다. 나는 괜스레 화가 나서 책가방을 챙겨들고 집을 나섰다. 아침밥을 짓고 있던 엄마의 목소리가 황급히 따라왔다.

 "얘야, 아침 먹고 가야지."

 ".........."

<3>집 앞 골목길에서 쁘니와 마주쳤다. 쁘니가 쪼르르 달려와 한 입 베어 문 자국이 선명한 바나나를 내밀었다.

 "언니 이거 먹어."

 좀 더 자라 걸레를 쥐어주며 방을 닦으라는 젊은 엄마에게 센 소리로 외쳤다.

 "쁘니는 왜 안 시키고 나만 시켜."

 좀 더 커서 옆 집 언니가 입던 쟈켓을 입으라고 내미는 엄마에게 또 팽개치며 소리쳤다.

 "난 그딴 옷 안 입으니까 쁘니보고나 입으라고 해."

<4>울먹이는 그 애의 목소리가 추억 속에서 달려 나온다. 머리카락은 바다에서 갓 건져 올린 물미역이 되었고 바짓가랑이도 축축했다.

 "석봉이가 나한테 물 뿌렸어."

 "왜?"

 "몰라. 자기 집 앞으로 다니지 말래."

<5>막다른 골목에 위치한 우리 집은 석봉이 집 앞 골목을 거쳐야만 통행이 가능했다. 그 집 형제는 또 옥상에 매복하고 있다가 골목 어귀로 들어서는 동생에게 물을 뿌린 게 분명했다. 벌써 세 번째였다. 나는 씩씩대며 석봉에게 갔다. 그 애와 동갑인 석봉은 나를 보더니 석천을 앞세웠다. 석천은 석봉의 형으로 나와 동갑이었다. 이 골목이 너희들 것이냐, 증거 있으면 가지고 나오라며 둘에게 대고 윽박질렀다. 그러자 형제는 슬금슬금 도망쳤다. 그 뒤꽁무니에 대고 나는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너희들 한 번만 더 내 동생한테 물 뿌리면 둘 다 죽을 줄 알아라."

<6>좀 더 시간이 흐른 뒤, 그 동생이 대학공부를 위해 서쪽 지방으로 떠나겠다고 했다. 지역감정의 골이 깊었던 시절이라 반대가 심했다. 아버지는 몰매 맞아 죽고 싶으냐며 절대로 보낼 수 없다고 하셨다. 꼬박 일 주일을 석고 대죄하듯 빌기도 하고 버티기도 해서 승낙을 얻어냈다. 막상 허락이 떨어지자 이번엔 내 마음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 애가 내 곁을 떠나서가 아니라 함께 사는 동안 동생에게 부렸던 억지들 때문이었다. 이제 그 애와 일 주일 이상을 한 집에서 자는 일이 있을까. 아득히 밀려가는 시간들. 어쩌면 동생은 내가 지겨웠을 것이다.

<7>우리는 줄곧 한 방을 썼다. 나는 시험을 앞두면 그야말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씻지도 않았다. 화장실 가는 시간 말고는 책상 앞을 떠나지 않았다. 신경이 오만상 곤두서 있었으므로 방문 여닫는 소리에도 윽박을 질렀다. 공부를 한답시고 동생의 잠꼬대 소리, 동생이 숙제를 할 때 연필이 공책을 스치는 소리, 동생이 옷 갈아입을 때 버스럭거리는 소리를 향해 버럭질했다. 시험을 망친 날엔 그 증세는 더 심했다.

 "야, 조용히 못 해."

 아마 동생이 없었다면 책상에게라도 호통 쳤을 것이다. 제 잘못을 남에게 돌리고 싶은, 말도 안 되는 억지라고나 할까.

<8>같이 사는 동안 내가 부렸던 숱한 행패들. 내가 밤새도록 불을 켜 놓고 있어도, 만화책을 보며 밤늦도록 낄낄대다가 훌쩍거리기를 반복해도 그 애는 참아 주었다. 같이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서로의 옹색함을 참아주고 불편함을 견뎌내는 것이 아닐까. 그랬다. 그 애는 내가 이유 없이 짜증을 부리거나 화를 내도 묵묵히 버텨냈다.

<9>그러나 나는 어떠했던가. 같은 방에 산다는 이유로 그 애가 나로 인해 당했던 고초들. 외풍이 심한 방에서 따끈한 아랫목은 늘 내 차지였다. 그 좁은 방에서 이불 한 채로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는데 나에겐 얄궂은 잠버릇이 있었다. 잠만 들면 이불을 야금야금 당겨 와서는 내 다리 사이에 끼우고 내놓지 않는 고질병이었다. 밤새 모든 걸 빼앗긴 동생은 한구석에서 웅크린 채 자다가 감기 들기가 일쑤였다. 어디 그뿐인가. 연탄불을 꺼트리지 않기 위해 새벽녘에 일어나는 일은 정말 고달팠다. 우리는 연탄 갈기 당번을 정했지만 잠 많은 나로 인해, 냉골에 자거나 꺼진 불을 살리기 위해 번개탄을 피우기가 다반사였다.

<10>나는 꼬깃꼬깃 모아두었던 오 만원을 꺼내 떠나는 동생에게 주었다. 돈을 벌면 더 많이 주겠다는 속다짐을 했다. 그 애를 자치 방에 내려놓고 돌아올 땐 말을 잃었다. 버스 간에는 침묵이 흘렀다. 한참 뒤 엄마가 먼저 눈물을 비치셨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는데 눈앞의 풍경이 자꾸만 흐려졌다. 집으로 돌아와서 혼자 방을 쓰노라니 불쑥불쑥 동생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11>수시로 동생의 부재를 깜빡했다. 어둠이 깔릴 무렵이면 뭘 하느라 아직 안 오지 싶다가 순간, 우리들의 방이 아니라 내 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큰 대자로 드러누워 팔다리를 휘저어보기도 하고 소리도 맘껏 질러보았지만 재미가 없었다. 동생이 남기고 간 책상과 볼펜, 베개와 운동화는 불쑥불쑥 눈물을 불렀다. 드디어 내 방이 생겼으니 아방궁이 부럽지 않아야 할 텐데, 동생이 떠난 빈 방에 우두커니 앉아서 청승을 떨었다.

<12>팔베개를 하고 누우니 동생에게 눈 흘겼던 일이 또 생각났다. 그 애는 고구마를 참 좋아했다. 고봉밥을 먹고 수저를 놓은 자리에서 그 애는 주먹만한 고구마 한두 개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곤 했다. 껍질 채로 빨리, 그리고 나보다 더 많이 먹는 모습이 얄미워서 말했다.

 "야, 너 그렇게 먹으면 무서운 병에 걸린다."

동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볼이 터지도록 가득 찬 고구마로 인해 발음이 이상했지만 분명 무슨 병이냐고 물었다.

 "고구마 껍질을 안 벗기고 먹으면 암에 걸린다더라."

 "어떡해?"

<13>그 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고구마에 대한 상실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내 무릎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그래도 입안의 고구마는 한 조각도 뱉지 않았다. 나는 동생의 등을 두드리며 지금부터라도 껍질을 벗겨서 천천히 먹으면 괜찮다고 했다. 이제 내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던 동생이 떠났구나. 그래서 어디서나 고구마를 보면, 괜스레 눈길이 가고 반가웠다.

<14>그러나 정작 암이라는 녀석은 나에게 찾아왔다. 중년이 된 나는 억울한 사형수처럼 울고 불며, 난리를 쳤다. 허둥대는 맘을 주체할 수 없어서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만으로도 내 감정이 어떤지를 단박에 알아맞히는 동생이 말했다.

"언니야, 걱정하지 마."

 약사가 된 동생은 그 날부터 나에게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떤 음식을 먹었느냐, 운동은 하루에 얼마나 하느냐, 보내준 영양식품은 잘 먹고 있느냐. 내 방으로 다시 돌아온 그 애, 우리의 동거는 다시 시작되었다.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물리적 동거가 아닌 마음을 나누는 정신적인 동거를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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