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골목 문화였던 오징어 게임에 세계가 열광하고 있다. 나도 하이틴 제자들이나 친구와의 대화에 동참하기 위해 맘 먹고 드라마를 시청했다. 볼수록 동무들과 함께 놀았던 순간들이 두레박질 되었다. 딱지치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구슬치기, 줄다리기, 학교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설탕의 달콤함에 빠졌던 달고나. 초등학교 때 즐기며 놀았던 게임을 통해 자본의 그물에 갇힌 우리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었다.
<2>어린 시절, 골목에서 남자아이들은 구슬치기와 딱지치기, 여자들은 주로 공기놀이와 고무줄놀이를 즐겼다. 우리는 놀면서 ‘넌 죽었어’를 흔히 말하고 들었다. 그런데 스크린에서 죽음을 현실적으로 보여주자 온몸이 긴장되며 진땀이 났다. 게임은 마음에 비집고 들어와 내가 만약 저런 상황이면 어땠을까를 상상하게 했다.
<3>주인공이 자신의 구슬 19개와 할아버지의 구슬 1개로 올인 승부를 거는 장면에서 오빠가 생각났다. 우리는 그 놀이를 짤짤이라고 했다. 상대방이 구슬을 주먹에 감추면, 그 홀과 짝을 맞추어 건 만큼의 구슬을 가져가는 놀이였다. 오빠와의 경기에서 나는 번번이 졌고, 등굣길에 도시락 가방 들어주기로 대가를 치렀다.
<4>오빠는 동네에서 구슬치기의 귀재였다. 구슬계의 타짜라고나 할까. 골목길에서 오빠가 왕 구슬로 저만치 떨어진 삼각형 안의 구슬들을 겨누면, 저편에서 공기 놀이를 하던 나는 숨이 멎었다. 활시위를 당기고 선 양궁선수처럼 긴장했고 유리구슬끼리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퍼지면 나의 숨통도 터졌다. 골프로 치자면 홀인원이었다. 나는 쪼르르 뛰어가서 오빠를 도와 삼각형 밖으로 나간 구슬을 신발 주머니에 주워 담았다.
<5>구슬은 우리에게 재산 1호였다. 창고에 구슬을 수북이 쌓아 두고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내 실력은 웬만한 사내아이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 벽치기라는 놀이만은 어찌 된 셈인지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었다. 놀이 방법은 집 담벼락에서 구슬을 굴린 후 가장 멀리 나간 사람이 다른 아이의 구슬을 때려서 날려 보내는 것이다.
<6>죽자고 벽치기에 매달렸지만, 나로 인해 구슬 곳간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에게 구슬 관리를 맡겼던 오빠가 안절부절하며 말했다
“이제 너는 구슬치기 하지 마.”
마치 내가 집안 살림을 말아먹기라도 한 듯 오빠의 낯빛은 붉으락푸르락했다. 나는 패잔병처럼 주눅이 잔뜩 들었다. 그런 모습에 오빠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
“지금부터 세상 어디에도 없는 비법을 전수하겠다.”
말투가 사뭇 진지했다. 그것은 내 구슬이 상대의 구슬을 정확히 맞추었을 때보다 살짝 빗맞혔을 때 더 많은 점수를 딸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의 구슬은 살짝 움직이고 내 구슬은 저 멀리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8>그릇의 크기와 용도가 제각각이듯 사람도 저마다의 타고난 능력치가 다른 것일까. 오빠는 온 마음을 다해 가르쳤지만, 내 실력은 제자리 곰배치기였다.
<9>나뭇잎이 무성해지는 계절, 우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구슬치기를 빨리 끝내야 했다.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숙제 때문이었다. 파리 백 마리를 잡기 위해 파리채를 휘둘러야 했고 송충이를 잡으러 산으로 가야 했다. 파리는 나쁜 균을 옮기므로 없애야 하고, 나무를 갉아 먹는 송충이를 잡아야 나무가 잘 자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나마 파리는 때려잡아 성냥 통에 넣으면 되지만 송충이 앞에만 서면 나는 온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었다. 얼마나 송충이를 무서워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오빠는 나무젓가락으로 나무에 붙은 송충이를 떼어서 내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개구쟁이 오빠 앞에서 절대 울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깨물었지만, 이미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10> 풍성하고 두꺼운 송충이 눈썹을 지닌 오빠는 곤충에 대한 무섬증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두 손가락으로 집어 올리고 입맞춤하는 시늉까지 하는 게 아닌가. 징그럽다며 소리치는 나에게 송충이 잡는 일이 그렇게 힘드냐고 물었다. 숙제 안 하면 하늘이 두 쪽 나는 줄 알았던 나는 참았던 걱정을 쏟으며 엉엉 울었다. 한 사람당 몇 마리를 잡아야 한다는 목표치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오빠는 송충이를 내 깡통에 나누어 주며 제법 무게를 잡고 말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
<11>피아노 학원에 계속 다니겠다고 보채다가 엄마에게 들었던 말이기도 했다. 오빠의 과외비 때문에 피아노를 포기해야 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꿈틀대는 꿈에 살충제를 뿌리는 냉정한 말로 나를 돌려세우는 현실이 야속했다. 양말 뒤꿈치에 구멍이 나도록 두 다리를 마당 바닥에 부볐지만 소용없었다. 너는 피아니스트가 될 그릇이 아니라는 강력한 펀치형 말로 나를 때려눕혔던 엄마를 생각하자 심장이 저렸다.
<12>"왜 솔잎만 먹어야 해? 뽕잎은 왜 안 되는 거냐고."
갑자기 세상의 화살을 온몸에 맞은 듯 씩씩대자 오빠의 목소리는 주파수를 잃었다.
"몰라, 학교 선생님이 그러셨어."
갑자기 분위기는 어색해졌고 그런 오빠가 무척 슬퍼 보였다. 겨우 열세 살이었던 오빠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 속담은 오래도록 내 가슴에 맴돌았다. 그러나 뽕잎을 먹다가 탈이 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삶의 서리를 맞고서야 옳은 말을 해주었던 주변의 진심을 깨달았다. 도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본성을 제대로 파악해야 행복한 삶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13>중학생이 된 오빠는 더이상 구슬치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뒤에 태우고 자전거 타기를 무척 즐겼다. 동네의 울퉁불퉁한 골목길을 거침없이 달리면 나는 무섬증에 오빠의 허리춤을 부여잡고 그만 내려달라고 고함쳤다. 그럴수록 오빠는 엉덩이를 치켜들고 페달을 더 세게 밟았고 턱이 진 길목을 골라서 철인경기 치르듯 내달렸다. 쩔쩔매는 내 모습에 오빠는 무엇이 그리도 신이 났던지 모르겠다. 나의 괴성이 커질수록 오빠의 웃음소리는 높아졌다. 다시는 오빠랑 자전거를 타지 않겠다며 대드는 나를 초등학교 넓은 운동장으로 데려갔다.
<14>자전거를 처음 배우던 날, 오빠는 자전거 뒤에서 꼭 붙잡아 주었다. 나는 넘어질까 두려워 쉽게 페달을 밟지 못했다. 오빠는 뒤에서 걱정하지 말고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라고 용기를 주었다. 조금씩 중심을 잡고 앞으로 조금씩 나아갈 때의 그 기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희열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자전거를 배웠고 오빠도 환하게 웃어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자전거는 언제나 중심을 잘 잡고 타면 넘어지지 않는다.”
중심을 잡는다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게 또 어디 있을까? 살면서 삶의 무게에 짓눌려 병든 나무처럼 비틀거리며 쓰러지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16>어느새, 드라마에서 '지영'은 '새벽'에게 말하고 있었다.
“고마워, 나랑 함께 얘기하고 놀아줘서”
짝을 이루었던 한 명은 눈물을 떨구고, 또 다른 한 명은 목숨을 떨구었다.
나도 오빠 없는 세상을 향해 말한다.
“참 고마웠어요. 나랑 많이 놀아주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