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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울 Aug 22. 2023

조모

<1>빛바랜 장면 속에서 비녀로 단장한 여인이 웃고 있다. 찍은 지 오십 년도 더 된 사진을 보며 나의 뿌리를 더듬어본다. 한복 차림의 조모가 조부에게 시집올 때 나이는 열여섯 살. 조모는 ‘열 여섯에 너그 할배한테 시집와서......’를 말머리로 이야기를 시작하시는데 그때마다 나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할머니에게 열여섯 살이라는 나이가 있었다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할머니로 알고 지내던 나에겐 애초에 할머니의 처녀 시절은 없었다.

<2>내가 어린 시절, 할머니의 모습은 늘 바빴다. 언제나 팔을 둥둥 걷어붙인 채 부엌에서 이 방 저 방으로 논밭으로 경보하듯 다니셨다. 생각나는 옷차림은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는 한복이었고 머리 모양은 한결같이 쪽진 모습이었다. 다른 할머니들처럼 몸빼바지와 스웨터를 입으면 편할텐데. 양반은 그런 옷 입는 거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3>손바닥 크기의 밭에 배추와 고추를 심고 이쪽에는 상추와 쑥갓, 저쪽엔 콩과 고구마, 밭 언저리엔 호박과 옥수수 씨앗을 뿌려야지. 책만 읽는 조부를 대신하여 먹거리를 책임지랴. 누대에 걸쳐 독자 집안이었기에 가슴 졸이는 나날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열병으로 연거푸 아들 넷을 잃고 겨우 건진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날밤을 새웠을까. 생각만 해도 숨이 컥 막힌다.

<4>명절이 가까워지면 더 바빠지고 고단해지던 할머니. 두부도 만들고 조청도 고고 차례상에 올릴 음식도 장만하셨다. 전도 부쳤다. 몸 한번 누일 틈 없이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하시는 일은 백설기를 쪄내는 일이었다. 옹기 시루를 올리면 금방이라도 하얀 김을 내뿜으며 떡을 내놓을 듯했다. 옹기 시루는 시집올 때 머리에 이고 온 것이라고 했다. 재취자리인 할아버지에게 말이다.

<5>아궁이 앞에서 옹기 시루와 가마솥의 아귀를 맞췄다. 시루에 삼베 보자기를 깔고 찧어둔 쌀가루를 켜켜이 올렸다. 나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시룻번을 만들었다. 몰랑하게 반죽한 밀가루를 양 손바닥으로 비비면 길게 늘어나는 게 신기했다. 할머니는 뚜껑을 덮고 내가 만든 시루번을 붙인 뒤 불을 지피셨다. 덜 마른 청솔가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때문에 나는 콜록거렸고 할머니는 훌쩍거렸다. 영락없이 억척 아낙네의 모습이었다. 

<6>잠은 언제 주무시는 것일까.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할머니는 늘 깨어 있었다. 일어나보면 무쇠솥에 세수 물이 데워져 있고, 저만치 소외양간 구유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나고 있었다. 나른하게 누운 나를 세수시키실 때는 대충이 없으셨다. 수건을 턱받이하고 이마, 눈가, 귀까지 문지르시고 코 풀기를 시키시던 거친 손.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내 콧방울에 대고 ‘흥’ 소리를 내는 동작을 시킬 때는 꼭 할머니도 ‘흥’ 소리를 냈다. 콧바람의 세기와 방향에 따라 끈적한 액체의 양과 농도가 달랐다. 턱받이를 풀어서 내 얼굴을 닦이시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셨다. ‘우리 강아지’라며 엉덩이를 툭툭 쳐서 방으로 들여보내시던 그 투박한 손.

<7>머리수건을 두르고 고추밭에서 일하시던 할머니를 부르면 고춧대가 출렁이는 어디쯤에서 소리가 들렸다. 땅거미가 질 무렵, 땀에 젖은 수건으로 똬리를 틀고 그 무거운 것을 머리에 이고 흔들림 없이 걸었다. 새벽 시장에 그 고추를 내다 팔려면 도대체 몇 시에 집을 나서야 했을까. 십 리 길을 걸어서 오고 갔으니 얼마나 고달팠을까. 한번은 고추 판 돈으로 잠자리 날개처럼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사서 입히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그러셨다. 너는 절대 이런 촌에서 살지 마라.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8>나를 당신의 며느리에게 되돌려 보내기 전날, 할머니께서 하시는 일은 고무 목욕통에 나를 목욕시키는 일이었다. 신방에 들기 위해 준비하듯 턱밑, 겨드랑이, 무르팍을 야무지게도 밀어내셨다. 마지막으로 손등에 낀 때를 벗기고 나면, 머리에 비누질해 감기셨다. 아침에 깨어나 보면 머리맡에 새 옷이 혼례복처럼 개켜져 있고 할머니는 부엌에서 달그락거리고 계셨다. 

<9> 아침을 다 먹으면, 목욕물을 길어온 그 우물로 나를 데려가 세웠다. 메주콩 세 알을 손에 쥐어주며 엄숙한 의식을 거행했다. 리허설까지 시켰으니까. 콩을 눈앞에 난 볼록한 고름 주머니로 생각하라고 했다. 퐁당퐁당, 콩을 우물에 던지며 ‘내 다래끼 빠졌네’라고 세 번 외쳤다. 눈에서 다래끼가 떠날 날이 없었던 나. 아침에 일어나면 고름으로 찰범벅이 된 눈을 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다래끼 난 눈의 속눈썹을 뽑아 길에 두고 돌을 덮어 두었지만, 효험이 없었다. 다급해진 할머니. 우물가에서 양 손바닥을 싹싹 빌며 이래도 안되면 내가 죽을 때 눈 하나 주고 가꾸마, 죽음을 담보한 기도 덕분인지 다래끼는 서서히 내 곁을 떠났다. 

<10> 할머니의 칠순 잔치 날이었다. 머리가 하얀 낯선 할머니가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마당에 서 계시던 할머니가 언니-하고 와락 안기셨다. 나는 움찔했다. 할머니 입에서 흘러나오는 언니라는 단어가 주는 어색함. 여동생이 둘이나 있는 덕에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 중의 하나가 언니다. 세상에 가장 흔한 호칭은 이모 내지는 언니. 그중 하나가 언니인데 할머니가 쓰는 순간 나는 온몸이 간지러웠다. 할머니도 누군가의 딸이었고 낯선 할머니의 언니였던 시절이 있었구나. 흰머리의 두 할머니가 서로에게 매달려 자매 티를 내실 때, 비로소 할머니도 어린 시절이 있었겠구나. 나는 할머니를 다른 모습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증조모의 귀여운 딸이었다는 사실조차도. 

<11>열여섯에 고개 너머 마을에서 작은 동네로 시집와서 사신지 칠십 년. 그곳에서만 살았던 할머니는 도시에 나와서 반나절만 지나면 어지름증을 앓으셨다. 공기가 답답하다. 방바닥이 미끄럽다. 물에서 냄새가 난다. 아들네를 트집 잡으려고 작심한 듯 우리에 갇힌 사자처럼 집 안을 빙빙 돌며 안절부절. 하루만 주무시고 가라고 붙들어도 황급히 가셨다. 일급수 물고기가 잠시 삼급수를 만나 헐떡이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듯 그렇게 떠나셨다. 

<12>대문을 나서면서 할머니는 허리춤에 손을 넣고 주섬주섬 뒤졌다. 고쟁이에 끈으로 매단 *줌치를 꺼냈다. 일 원짜리 동전은 가제수건에 돌돌 말아서 보관하던 창고였다. 백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더니, 사자마자 안쪽에 천을 덧댄 바지 속주머니에 넣어 주셨다. 덤으로 주는 말씀은 애껴 써라. 돈을 멀리하는 조부 덕분에 전 재산을 늘 몸 한가운데 품고 다니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이생의 고생을 다 놓아버리고 밤하늘의 별이 되던 날. 할머니의 전 재산은 십만 원 남짓이었다. 

<13>할머니는 국권을 상실한 1910년, 경술년에 태어났다. 그래서 박물관의 화석처럼 주민자치센터에 존재하는 할머니의 이름은 ‘경술’이다. 그래서일까. 치욕스러운 일 앞에서는 불같이 화를 내며 당당하게 사셨던 조모. 조부 양반을 만나 마르고 거칠게 살다가, 밀레니엄의 시작을 코앞에서 두고 새처럼 훨훨 날아가셨다. 십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 손에 꼭 쥐여주며 눈깔사탕 까먹어라. 속삭이던 할머니를 까먹지 않을게요.

*시룻번 : 시루떡을 찔 때 김이 새지 않도록 시루와 솥 사이에 붙였던 밀가루 반죽

*줌치 : 과거  할머니들의  속바지  속의  복주머니를  뜻하는  말로  호주머니를  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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