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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울 Aug 22. 2023

파마

<1>우리 집 건너편에는 미용실이 있다. 이십 년 전부터 동네에서 사람들의 머리 모양을 쥐락펴락하는 원장님이 있는 곳이다. 시장 어귀의 두 세평 남짓한 미용실에서 바삐 움직이는 원장님의 눈빛은 살아있고 손길은 민첩했다. 내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어설프고도 미묘한 요구를 재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내가 의자에 앉으면 그는 수건을 내 목에 감고 그 위로 가운을 휙 두른 후, 머리카락의 상태를 살핀다. 산만한 정도에 따라 처방을 다르게 내리는 모습에 반하여 단골이 된 지 오래다. 거침없는 가위질이 순식간에 세련미가 철철 넘치도록 만들어주므로 주변 시세보다 비싼 가격에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2>동전 크기의 반짝이 조각을 수천수만 개 덧대어 장식한 간판이 일렁이는 모습은 남자를 유혹하는 인어 같다. 원장님은 왜 붉은색을 좋아하는 것일까. 빨간색 간판으로도 모자라서 ‘홍단’이라니. 열정과 사랑으로 살아가려는 마음의 표현일까. 아니면 화투와 관련된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마침 머리가 지저분해진 나는 이번에 가면 꼭 물어보아야지 생각했다. 상호를 홍단이라고 붙인 이유를.

<3>홍단 미용실의 문이 닫혀 있었다. 세미나 참석으로 삼 일간 문을 닫는다는 종이가 붙어있었다. 상큼한 변신을 하겠다고 다짐했던 나는 도저히 덥수룩한 모습으로 돌아설 수가 없었다. 이걸 어쩌나. 유리에 비친 모습을 보니 더욱더 오늘 안에 무슨 수를 쓰더라도 손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다른 미용실로 가려고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어디로 갈지 막막했다. 순간, 퍼뜩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뜬금없는 기억이었다.

<4> 오래전 지상철에서였다. 저만치 빈자리가 보였고 냉큼 가서 앉았는데 왼쪽에서 낯설지 않은 냄새가 풍겼다. 갓 구워낸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약 기운이었다. 후각을 곤두세우며 고개를 돌리자 할머니 한 분이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고 있었다. 사뭇 만족스러운 낯빛으로 요리조리 자신을 살폈다. 입꼬리를 서너 번 올렸다가 내리더니 고개를 숙여서 정수리 부분을 살피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며 일어서고 싶은 맘이 들었다. 자리를 뜨려는 데 할머니의 질문이 발목을 잡았다.

새댁, 내 머리 참 이쁘지요?

<5>아주 오래가는 뽀글이 파마였다. 할머니들은 엉성하게 빠진 머릿속이 훤하게 보이는 걸 감추려고 이와 같은 머리를 한다고 했다. 물기가 남은 곱슬머리는 꼬불꼬불 두피에 꼬여 있었다. 석가라는 과일이 떠올라서 웃음이 나려고 했다. 

어르신, 참 고우시네요. 

백 살이 넘어도 여자는 예쁘다는 말에 춤을 춘다더니 할머니는 신이 나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뒤로 나자빠질 정보였다. 파마 가격이 충격적이었다. 단돈 만 원이라는 것이다. 못 미더워하는 나를 답답하다는 듯 옆구리를 쿡 찌르며 꼭 가 보라고 했다. 밑져 봤자 본전이지. 핸드폰에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6>변두리 주택가 골목 깊숙한 곳이었다. 들어가자 미용사도 손님들도 모두 할머니들이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뽀글이 파마로 무장한 채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순간 내가 올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몸을 반쯤 돌리려는데 이미 늦었다. 머리를 감고 대기하던 할머니가 가운을 입으라고 명령했다. 다른 할머니는 혹한의 날씨라며 석유 난로 앞자리를 내어주셨다. 그렇게 무엇에 홀린 듯 미용 의자에 앉았다. 

<7>몸빼바지를 입고 썬캡을 쓴 늙은 미용사는 자잘한 롤을 대기시켰다. 굵은 롤을 사용해달라고 하자 그런 건 없다며 자신의 기술을 믿으라고 했다. 그녀는 내 머리통에 숱한 뼈대와 고무줄을 매달면서 자신의 경력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십 년이 넘도록 얼마나 많은 머리를 만졌는지 털어놓으며 은근히 역량을 자랑했다. 그녀의 끊임없는 자화자찬을 들으며 나는 살짝 졸았다. 

<8>한 시간 반 뒤 세면대로 향했다. 돛대에 꽁꽁 묶였다가 풀려난 *오디세우스의 그 시원함도 잠시. 샴푸 의자가 없었다. 선 채로 머리만 숙이라는 말에 아연실색이 되었다. 이것은 어느 시대의 유물이란 말인가. 그러나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지 어쩌겠는가, 다시 의자에 앉았을 때 거울 뒤에서는 할머니들이 감탄하며 칭찬하는 모습을 거울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거울 속 내 머리는 영락없이 음악 교과서에 나오는 헨델이 되고 말았다. 

<9>자고 일어나면 푸스스 날아가는 머리를 보고 가족들은 왜 이 모양이 되었냐고 했다. 나는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누군가 슬며시 한 마디 덧붙였다, 우리 집도 애완견 생겼다고 생각하자. 보슬보슬한 푸들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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