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에서 악역을 맡는다는 것
우연히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다, 자신이 맡은 일을 칼같이 해내고 6시가 되면 칼퇴근을 하는, 상대방이 어떤 상황이 되든 본인이 할 일만 하는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봤다. 처음에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봤다. 왜 지켜야 하는 선을 지키지 않고 본인만을 생각할까 싶었다. 하지만 작품의 막바지에 가다 보면, 그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나오지만, 결국 그는 조직에서 악역을 맡고 있는 것이었고, 그 덕에 다른 사람들은 조금 더 넓은 생각과 판단으로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들었던 생각은 '과연 나쁜 직장인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였다. 그 캐릭터가 본인이 악역을 맡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런 행동을 하진 않았으리라. 내가 악역을 맡으면 나머지들이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수 있기에 담담히 내가 그 역할을 하겠다고는 더더욱이나. 그래서 착하다고는 못하겠다. 그렇다고 그에게 나쁜 직장인이라고 낙인찍을 수 있을까.
뒤 돌아보니 내가 일하는 연구소도 비슷하다. 난 개량신약이나 신약 쪽 연구를 주로 해왔고, 복제약 연구에 참여한 적은 거의 없다. 빠른 시간 내에 본래 있던 약과 동일한 제품을 만들어내야 하는 복제약 연구에는 사실 별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꺼려했다.
한때 조직 자체가 각각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때 두 조직은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개량이나 신약 쪽 연구는 연구 기간의 여유는 있지만 실패할 확률이 크다. 반면 복제약은 실패할 확률이 낮지만 연구 기간이 타이트하다. 서로 힘듦의 차이가 다름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서로 으르렁 거리기 바빴다. 이때 드라마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복제약은 회사에 이익을 빠르게 확보해주고, 이를 바탕으로 개량신약이나 신약을 연구할 시간과 비용을 충당해준다. 결국 복제약을 연구하던 연구원들도 본인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그런 역할을 했던 것이고, 조직은 구성원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떠한 역할을 던져주기 마련인데 말이다.
그렇다고 드라마처럼 회사는 자아실현을 하는 곳이 아니라고 못 박고 싶지는 않다. 지금까지도 나와 회사의 발전 방향이 같지 않다면 미련 없이 떠날 거라고 마음먹고 있고, 구성원의 발전 없이는 회사도 절대 발전할 수 없다는 믿음이 확고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자기 발전이 없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서 너무 침울해 하진 말았으면 좋겠다. 결국 조직이 그 역할을 해낼 사람이 필요했고, 그것을 여러분이 하고 있을 수 있고, 그 보상은 대부분 돌려 받는다. 그 보상이 없을 때 보통 이직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아픔이 있긴 하지만.
회사 일로 인생의 행복을 찾는 것과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인생의 행복을 찾는 것. 어느 것이 더 숭고하고 어느 것이 더 의미 있다 단정하기 힘들 듯, 나쁜 직장인..... 분명 있긴 있지만, 단면만 보고 낙인해 버린 건 조금 위험하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마냥 나쁜 직장인이 있을까.
p.s) 우리 회사엔 분명 있다. 이 나쁜 직장인......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