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만 의사의 선택
”죽기에 좋은 때라는 것은 없다. 그러나 정말 죽으면 안 되는 나쁜 때는 있다. “
흡입 분만으로 인한 분쟁을 겪고 나서 분만을 돕는 분만 의사 생활은 더 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5 층의 단독 건물은 부인과 진료로만 운영하기에는 너무 컸다. 나를 포함해 산부인과 전문의 2명과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1명이 근무했는데 한 달의 분만 건수는 30에서 40 여건 정도였다. 전체 직원이 20에서 30명 정도로 제법 규모가 있는 만큼 운영 자금도 많이 들어갔다. 그러나 병원을 운영하는데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것보다 의료 분쟁을 겪으면서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커서 도저히 다시 분만 진료는 하기 어려웠다.
분만 병원으로 경영하길 원하는 다른 의사에게 병원을 통째 넘기는 것이 그나마 경제적 손해를 가장 덜 보는 방법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원상 복구를 해야 하는데 그때 드는 비용은 인테리어 비용보다는 적지만 그래도 상당히 큰 편이다. 의료기 중개상 사장님에게 병원을 인수할만한 사람을 알아보아 달라고 부탁했다. 의료기 중개상들은 여러 병원을 다니면서 장비를 판매하거나 수리하기 때문에 병원의 양도를 위한 중개인 업무도 겸해서 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탁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인수받고자 하는 산부인과 의사가 연결되었다. 개원할 때 들어간 인테리어 비용에 해당하는 만큼의 권리금만을 받고 병원을 넘겼다.
전세로 얻은 아파트는 병원에서 불과 2 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거의 매일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하루 종일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렇게 5 년 간 땀과 눈물로 꾸렸던 병원을 넘기는 처지가 되고 보니 마음이 많이 허전했다. 인테리어 할 때는 돈이 모자라서 대기실에 놓을 TV를 따로 사지 않고 집에서 보던 것을 가져다 놓았다. 그때 한참 어려서 TV의 어린이 프로에 푹 빠져 지냈던 막내딸이 TV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울면서 매달렸던 기억도 났다. 나중에 돈 벌면 다시 더 좋은 것으로 사주겠다고 약속하고 가져간 TV는 결국 다시 사지는 못했다. 지나고 보니 아이들과 아내에게 한 지키지 못한 약속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다시 사주겠다던 TV도 못 사주었을 뿐 아니라 병원을 넘겼으니 병원 옆에 있던 집도 옮겨야 했다. 넘긴 병원 옆에서 살 필요도 없었지만 이제 다른 사람의 병원이 된 건물 계속 보아야 한다는 사실도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가정을 든든하게 받쳐 줄 가장으로서 자격 미달이 되는 조건들은 이렇게 하나씩 쌓여 나갔다.
병원을 넘기고 나니 당장 할 일이 없었다. 아예 의사 말고 다른 직업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서, 의사를 하되 부인과 진료로만 개업하는 길이나 봉직 의사로 다른 병원에 취직하는 선택 등 다양한 진로에 대해 고민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6 개월쯤 흘렀다. 그러나 의사 말고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병원을 운영한다면 그동안 지내온 서대문구에서 멀리 가는 것은 부담이 많았다. 결국 다시 개원하기로 결정한 곳은 양도한 병원이 있던 홍제동에서 멀지 않은 마포구 동교동이었다. 그때가 2005 년 8 월이니 벌써 20 년 전 일이다.
동교동에 개원하고 어찌어찌 버티고서 4 년쯤 지났다. 병원을 개원하고 계속 운영을 할 수 있을지는 빠르면 6 개월, 늦어도 1 년이면 대부분 결론이 난다. 그러니까 개원 4 년이 되었다면 병원의 경영이 안정된 수준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이쁜이 수술이라고 부르는 회음 성형 수술 등 수입에 보탬이 되는 여성 성형 수술은 하지 않았지만 낙태 시술도 한 달에 몇 건 정도 할 때여서 경영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이대로만 그럭저럭 유지해 나가면 그동안 쌓인 빚도 조금씩 갚아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신은 내가 그렇게 쉽게 세상을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20여 년의 분만 의사 인생을 통틀어 최대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산과 영역에서 생명과 관련된 큰 사고는 3 가지가 있다. 첫째 산모의 사망, 둘째 아기의 사망, 셋째 산모와 아기 모두의 사망이다.
세 번째 경우가 가장 끔찍하고 후유증도 크다. 이런 인명 사고는 흔한 것은 아니지만 분만 의사로서의 경험이 오래된 의사에게는 한두 번쯤은 있게 마련이다.
병원 이름은 아이온 산부인과였다. 아이가 온다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다. 그때는 여자 선생님과 동업하고 있었다. 나는 산전 진료와 출산을 맡았고 나보다 6 살 젊은 여자 선생님은 일반 부인과 진료와 난임 진단과 치료를 맡았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계절은 아마 막 더위가 시작되던 초여름이었을 것이다. 예정일이 다 된 경산모가 진통이 시작되어 둘째 출산을 위해 입원했다. 나이가 40세를 넘었다는 것 외에는 이름이나 얼굴 등 다른 것은 생각나는 것이 없다.
분만 과정은 시간 경과에 따라 자궁 입구가 벌어지는 정도, 태아 머리가 내려오는 정도를 가지고 판단한다. 그런 기준에서 봤을 때 분만 진행 과정은 정상이었다. 둘째 출산은 초산보다 대체로 두 배 정도 빨리 진행된다. 초산모의 분만 과정이 총 10 시간에서 12 시간쯤 걸리는데 반해 경산모는 5 시간 내지 6 시간 정도로 두 배 정도 진행이 빠르다. 입원한 지 서너 시간쯤 지났을 때다. 거의 출산의 마지막 과정에 도달했겠구나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분만실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산모의 상태도 보고 내진을 하기 위해 나는 굉장히 자주 내려가 보는 편이라 분만실 직원이 전화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직원은 다급한 목소리로 산모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고 말했다. 급히 아래층 분만실로 내려갔다. 산모가 많이 어지러워했고 숨쉬기가 조금 불편하다고 말했다. 혈압은 정상이었다. 진통 중에는 대체로 얕고 짧은 호흡으로 일시적으로 산소 부족이 생겨 약간 갑갑하거나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그러나 산모의 상태는 그런 것 치고는 조금 심해 보였다. 코에 연결하는 튜브를 통해 우선 산소를 투여했다. 그러나 산모는 여전히 어지러워했고 묻는 말에 대답이 느려졌다. 대답에 반응이 느리다는 것은 좋지 않은 소견이었다. 질 출혈도 없었고 혈압 등 바이탈 사인도 여전히 정상이었다. 심장 질환등 다른 의심 갈 만한 질병을 가진 병력도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정상 상태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문제는 아직 출산 전 진통 과정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발 호흡은 있었지만 호흡이 약했다. 내진을 하여 보니 태아는 골반 내로 진입은 하였으나 충분히 내려오지 않았다. 출산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했는데 산모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어 보였다. 분만 의사는 산모와 아기 모두를 구해야 하는 힘든 업무를 부여받은 사람이다. 아기는 어떻게 되던 산모만 구하거나 산모를 포기하고 아기를 구해야 하는 경우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하면 둘 다 구해야 한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호흡이 멈추어 기관 삽관이 필요해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기관 삽관을 하고 나서 분만을 시도하는 순차적 진행을 여유 있게 할 시간이 없었다. 의식을 잃지 않도록 산모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OO님 눈 뜨시고 호흡하세요.”
그때처럼 누군가의 이름을 간절히 불렀던 적이 없다. 빨리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이제 선택은 두 가지다. 이 상태로 대학병원으로 전원을 하던지 아니면 제왕절개 수술이던 흡입분만이던 빨리 분만을 마무리하고 대학병원으로 전원 하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불이 난 곳을 끄기 위해 달려가는 소방관의 선택도 그렇겠지만 의료 현장에서는 올바른 결정을 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결정을 내리는 시간도 중요하다. 결정이 너무 늦어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의식이 혼미해지는 산모를 우리 병원에서 제왕절개 수술을 감행하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아기가 골반에 끼인 채 전원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상태로 전원 하면 가는 동안 산모와 아기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머릿속에서 가능한 상황들을 생각했다. 어느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까? 빨리 흡입분만으로 태아를 출산시키고 산모를 전원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19에 연락을 취하면서 흡입분만을 시도했다. 경산모여서 흡입분만은 다행히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산도 밖으로 나온 아기는 울음이 아주 약했고 아프가 점수도 좋지 않았다. 결국 때마침 도착한 119에 산모와 아기를 함께 싣고 이송할 수밖에 없었다. 간절한 부름에도 불구하고 분만을 마친 산모는 거의 의식이 없었고 호흡도 정지되었다. 119에 함께 동승하여 가면서 심폐 소생술을 실시했다. 십여분 정도 걸려 세브란스 병원 응급 센터에 도착했다. 응급실 커튼 사이로 여러 의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도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믿기지 않았다. 불과 이십여 분 만에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다. 아기는 신생아 중환자실로 이동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누구로부터 들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응급실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마음속으로 모든 신께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결국 산모는 몇 시간이 안되어 사망 판정을 받았다.
산모가 죽었다.
건강하게 들어와 멀쩡히 진통하던 산모가 갑자기 죽다니... 믿기지 않았다. 의사인 나도 이런데 남편은 아마 제정신이 아닐 듯싶었다. 그동안 내가 출산을 도왔던 산모가 사망한 사례는 30 년 간 두 번 있었다. 한 명은 지병이 있던 산모로 출산을 하고 나서 퇴원하였다가 한 달 후쯤 사망하였던 사례니까 이렇게 출산 후 수시간 내 사망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신생아 중환자실로 올라갔던 아기도 며칠간 가느다랗게 생명줄을 유지하였으나 결국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저 세상이 있다면 아무 잘못도 없는 산모와 아기는 좋은 곳으로 갔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내 앞에는 지옥문이 열린 것은 확실했다. 로댕의 작품 “지옥의 문” 위에는 턱에 손을 괸 남자의 조각상이 있다. 유명한 조각상인 “생각하는 사람”이 그것인데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지 알 길은 없다. 혹시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지옥의 문 앞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이 저질렀을 죄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것일까? 나는 무슨 죄를 저질러서 이 문 앞에 서게 된 것일까?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살면서 이토록 중요한 일이 이처럼 짧은 순간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다. 그 문의 뒤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나를 괴롭게 만들지 아직은 알지 못했다.
“아프가 점수란”
출생 직후 신생아의 건강상태를 평가하는 지표다. 보통 1 분 아프가 점수와 5 분 아프가 점수를 사용한다.
검사는 아기의 피부색, 맥박수, 자극에 대한 반응 정도, 근육의 힘, 호흡 등 5 가지 항목을 0 점부터 2 점까지 매기며 총점은 10 점이 만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