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재미있는 책이 아니다
얼굴에 바를 파운데이션을 주문하거나 산모들께 드리는 USB를 주문하는 것 등 종종 택배를 이용한다. 그럴 때 어떤 경우는 너무 늦게 물건이 배달되어 오기도 하고 또는 내가 자주 시켜 먹는 비타500같은 음료는 간혹 파손되어 오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쇼핑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고 하던데 물건을 주문해 놓고 택배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의 설렘은 흡사 연인의 편지를 기다리는 마음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안 오면 언제 오는지 궁금하고 오면 빨리 열어 보고 싶은 마음에 손마저 떨리는...
아침에 주문을 하면 저녁에 배송이 오는 로켓 배송이나 빠른 배송을 뜻하는 퀵 딜리버리가 인기를 끈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빨리 받아 보고 싶은 조급한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외국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황새가 물어온다고 한다. 그래서 출산을 뜻하는 영어 단어는 딜리버리 (Delivery)다. 딜리버리에는 당연히 배달이라는 의미도 있다.
임신 10개월 280일이 되어야 만날 수 있는 아기를 그렇게 빨리 배송을 받게 된다면 어떨까? 말할 것도 없이 다들 고개를 저을 것이다. 달수를 채우지 못하고 출산하는 조산을 바라는 산모는 없다.
빨리 만나고는 싶지만 빨리 만나는 대가가 크기 때문이다. 로켓 배송처럼 돈을 조금 더 지불하는 정도이고 다른 후유증 없이 빨리 만나는 것이라면 아마 출산 비용을 두배든 세배든 지불하고 한두 달 먼저 아기를 만나고 싶은 부모가 적지 않을 것이다. 과학이 많이 발달하면 돈이 좀 들더라도 발육을 촉진하는 주사를 맞아 만삭이 아닌 5개월쯤에도 완전히 성숙한 아기를 출산하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이미 폐성숙에 관한 한 그런 약물이 개발되어 있다. 물론 폐성숙 촉진제 주사는 조산통이 오거나 조기 파수가 되어 어쩔 수 없이 일찍 출산해야 하는 경우의 아기들의 폐성숙을 돕기 위한 것이기는 하다.
출산 진통도 빨리 당겨서 조금 아프더라도 한두 시간 만에 출산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한다면 그걸 선택할 분들이 많을 것이다. 특히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사는 우리나라 사람의 성향을 미루어 본다면 대박 성공할 아이템이 분명하다. 빨리 끓여서 먹을 수 있는 라면이 종주국 일본을 제치고 우리나라에서 더 인기가 있고 제품도 다양하게 개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금은 지원자도 많지 않아 TO가 적어졌다고 들었지만 내가 대학병원에서 산부인과 수련을 할 때는 나를 포함하여 총 10명의 동기들이 있었다. 동기들은 일반 회사의 입사 동기처럼 서로의 일도 나누기도 하고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공유하면서 친하게 지낸다. 수련을 마치고 나면 어떤 동기는 개업을 하고 어떤 동기는 종합병원에 봉직의사로 가면서 각자의 길을 간다. 우리 동기중 반은 나처럼 개업을 했고 반은 대학병원이나 종합병원으로 갔다. 그중에 경기도에서 개업한 동기는 나와는 의과대학 동기이기도 한데 그 동기가 어느 해 말해준 경험담은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편의상 그 동기는 그라고 하겠다.
어느 날 그에게 산전 진찰을 받던 경산모가 진통이 시작되어 그의 산부인과에 입원을 하였다. 문제는 간호사가 내진을 하여 보니 출산이 곧 임박한 상태에 있었다는 점이다. 보통 초산모는 진통이 시작되어도 출산까지 걸리는 시간이 평균 9시간 이상으로 길지만 경산모는 진통이 시작되어 평균 5시간 이내, 빠르면 1시간 내에 출산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진행이 빠르다. 진통이 시작되어 1시간 이내에 출산하는 것은 특별히 급속 분만이라고 한다. 급속 분만은 빨리 낳으니까 좋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회음부 파열도 많이 되는 편이고 심하면 경관 파열도 생길 수 있고 아기도 머리 손상이나 뇌출혈 위험도가 높아지는 등 정상 속도의 분만보다 후유증이 생길 위험이 높다. 그 산모가 그런 급속 분만이라 출산이 임박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진통이 시작된 지는 꽤 되었으나 병원에 늦게 오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당시 그는 병원 내에 상주하는 상태는 아니었고 집에서 출퇴근하면서 산모가 입원하면 집에 있다가 병원에 갔다고 하는데 집에서 병원까지는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위치였다. 산모는 결국 그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출산을 하고 말았다고 한다. 탯줄 처리나 태반 만출등 후산 처리는 간호사가 하고 있는 중이었고 그는 도착해서 파열된 회음부만 봉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급하게 분만이 진행되어 다급했던 경험들이 있어서 우리 모두는 손에 땀을 쥐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마칠 무렵 우리는 아기는 어땠는지 산모나 보호자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궁금해했다. 다행히 아기나 산모는 건강상 이상은 없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던 우리들이 예상할 수 있는 산모의 반응은 다음의 3가지 중 하나였다.
1. 용인
원장님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저나 아기나 괜찮으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2. 원망
아기 낳으러 병원에 왔는데 원장님이 안 계시면 어떻게 해요. 10달 동안 믿고 다닌 것은 출산할 때 잘 보아 달라는 의미인데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3. 소송
회음부도 많이 파열된 것 같은데 아기는 괜찮은 거예요? 가만 안 있을 거예요. 소송할 거예요.
산모의 반응과 관련해서는 당시의 긴장감을 살리기 위해 기억을 더듬어 대화체로 이어 나가 본다. 편의를 위해 반말체로 통일해서 적었으며 내용의 손상은 주지 않는 선에서 약간의 가미도 했으며 질문자는 나로 통일했다.
나: "그래 산모는 뭐래? 항의하지 않았어?"
그: "도착하니까 아기는 이미 나와서 울고 있고 그렇더라고."
나: "그러니까 산모가 아무 말 안 해?"
그: "나야 아무 말도 할 염치가 없어서 가만히 있었지."
나: "아 답답하네. 너 말고 산모가 뭐라 말했었냐고?"
그: "그러니까 나도 산모가 뭐라 그럴까 해서 바짝 긴장하고 있었지."
나: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좀 말해봐."
그: "산모가."
나: "그래 산모가."
그: "원장님."
나: "원장님. 그다음에."
그: "제가 좀 더 참았어야 하는 데."
나: "좀 더 참았어야 하는데? 나오는 아기를 어떻게 참아?"
그: "미처 참지를 못하고 원장님이 오시기 전에 아이를 그냥 낳아 버렸으니 죄송해서 어쩌지요?"
나: "......"
우리 모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그런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들은 것인가 싶어 다들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 "산모가 항의라도 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렇게 말하더라고."
그: "일찍 와서 분만을 돕지도 못해 미안한 판인데 말마저 그렇게 하니까 내가 정말 미안해지더라고."
나: "정말 산모가 그렇게 말했어?"
그: "글쎄 말이야. 정말 미안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어."
나: "요즘도 그런 산모가 있냐? 정말 순수하다. 순수해. 나도 그 동네 가서 개업하고 싶다."
산모가 미처 분만실로 가지 못하고 병실의 침상에서 출산하는 것이나 분만대에서 출산하더라도 의사의 관찰 없이 혼자 출산하는 것을 베드 딜리버리 (Bed Delivery)라고 한다. 이런 베드 딜리버리는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된다. 첫 번째 문제는 산모의 상태를 면밀히 판단하여 진행 과정을 파악하고 필요한 개입이 없을지 결정해야 하는데 그런 관찰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두 번째 문제는 출산 시 예방적 회음부 절개를 포함하여 회음부 파열을 최소화하는 조치나 출산 직후 아기의 기도 확보 등의 조치를 못 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산모가 집에서 혼자 출산한 것과 다름없이 아기와 산모 둘 다에게 위험한 상황으로 방치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병원에서 베드 딜러버리를 하게 되면 담당 주치의는 문책을 받는다. 병원마다 문책의 방식은 다르겠지만 내가 근무하던 병원은 한 달간의 벌 당직이 주어졌다. 보통 이틀이나 삼일에 한번 당직에서 벗어나 퇴근하여 집에 갈 수 있는데 30일 벌 당직을 받으면 30일 내내 병원에서 당직 근무를 해야 한다. 가정이 있는 기혼 의사라면 말할 것도 없고 그렇지 않은 의사에게도 괴로운 일이다.
그 친구는 개업하고 벌어진 일이니 윗년차나 교수님으로부터 벌 당직을 받을 일은 없다. 다만 이런 경우 산모나 보호자의 반응은 여러 가지다. 아기나 산모가 다행히 별 후유증 없이 회복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너그럽게 넘어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회음부 파열로 인한 항문 누공과 같은 후유증이 생기거나 딱히 후유증이 생기지 않더라도 의사가 직접 분만을 받아 주지 않았다는 사실로 하여 의료 분쟁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그 친구는 참 좋은 산모를 만난 셈이었다.
몇 년 전에 어느 병원에서는 의사가 없어서 급한 데로 조산사가 아기의 출산을 도왔는 데 아기 상태가 매우 나빠 수억 원의 배상금을 물어낸 사례도 있었다. 조산사야 당연히 출산을 도울 자격이 있는 사람임에도 더 상위의 전문 인력인 의사가 없었다는 것이 병원의 귀책사유로 인정되었다. 위와 같이 그렇게 무지하다 싶을 정도로 순박한 사람이 요즘 흔히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월터 랭글리는 영국의 화가다. 11남매 중 한 명으로 빈민가 어촌에서 태어나 궁핍한 생활을 했던 화가라고 한다. 그가 그린 이 작품의 제목은 New Arrival이다. 옷이나 신발 가게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문구다. 방금 도착했다는 것이니 신상품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 말은 신생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림에는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 있고 아이의 형인지 오빠인지 소년이 아기가 궁금한 듯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 엄마는 방금 부엌일을 하다 온 것인지 앞치마는 풀지도 못한 채고 아기를 어르고 있다. 아기의 할머니는 잔을 들고 마침 차를 마시던 참이다. 그러나 아이의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다. 고기를 잡으러 가서 없는 것인지 아니면 고기잡이를 갔다가 풍랑을 만나 그만 유명을 달리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랭글리의 다른 작품 "저녁이 가면 아침이 오지만"이라는 그림에는 바다로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 슬픔에 빠진 젊은 여인과 그녀를 위로하는 노파의 모습이 담겨있다. 노파의 남편도, 아기 엄마의 남편도 어쩌면 바다에 나갔다 돌아오지 못한 것 아닐까 싶다.
사랑을 잃은 사람에게 가장 좋은 치료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한다. 슬픔을 이겨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비슷한 고통을 겪은 다른 사람의 따스한 위로다. 인간이 지구 상의 모든 생물 중 가장 번성하게 된 이유를 꼽으라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중에서 나는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꼽으라면 여럿이 함께 살게 된 것, 그리고 서로서로 도우면서 사는 것, 즉 인간의 사회성을 꼽고 싶다. 함께 살게 되면서 서로 모자란 것은 돕고 슬픔은 위로하며 고통은 나눈다. 그것이 현재의 인류가 번성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랭글리의 작품 "방금 도착"에 등장하는 아기에게는 어머니의 따스한 품이 있고 형제자매의 사랑스러운 눈길이 있고 할머니의 든든한 지원도 있다. 비록 실내는 그리 부유한 집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따스한 햇살은 창으로 들어와 벽을 비춘다. 아기는 자신이 방금 도착한 이곳이 살아 볼만한 아름다운 곳이고 함께 할만한 따스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이라는 사실을 느낄 것이다.
베드 딜리버리 (Bed Delivery)는 배드 딜러버리 (Bad Delivery)다.
나쁘다는 의미의 Bad 말이다. 산과 의사의 존재 이유를 없애는 일이다. 출산을 돕는 의사든 조산사든 아니면 하다못해 산파도 없이 혼자 출산하는 것처럼 위험하고 쓸쓸한 분만은 없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돕는 관계"라는 인류가 번성한 가장 큰 이유를 훼손하는 일이다. 출산할 때 누군가 함께함으로써 기쁨은 배가 되고 두려움은 반이 된다.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이 전문 지식과 경험으로 철저히 무장된 사람이라면 제일 좋을 것이다. 두려움과 위험에 맞서 자신과 싸워줄 사람의 힘과 경험은 크면 클수록 좋다.
-여기 실은 그림-
월터 랭글리의 "방금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