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재미있는 책이 아니다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첫 번째: 어느 할아버지의 급사 사고-
10여 년 전 서대문구에 개원하고 있을 때 일이다.
내가 알고 지내는 선생님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한 할아버지가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그분은 검사를 위해 병원에 잠시 입원하였고 포도당 수액 주사를 맞은 후 화장실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119를 불러 급히 근처 대학 병원으로 이송하였지만 할아버지는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돌아가셨다. 가족들은 주사를 맞고 사망하였으니 의료 과실이라고 주장하면서 문제를 삼았다. 부검 결과 사인은 급성 심근 경색증에 의한 심장 마비에 의한 사망으로 나왔다. 평소 심장이 좋지 않아 지병이 있었던 분인데 아마 본인이나 가족들이 미처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러므로 병원에서 맞은 포도당과 사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담당 의사는 부검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가족들에게 조금 시달려야 했지만 부검 결과 무혐의로 판명되어 다행히 분쟁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두 번째: 진통 산모의 사망 사고-
내가 산부인과 전공의 2년 차 때 일이다.
어느 개인 산부인과 병원에서 출산 진통 중에 자궁이 파열되어 과다 출혈로 산모와 아기가 모두 사망한 사례가 있었다. 의료 분쟁으로 연결되었고 마침 내가 수련 중이던 대학병원의 교수님께 그 사건에 대하여 의사의 과실 여부를 판단하는데 참고하기 위하여 법원에서 참고인 진술서를 요청하였다. 오래되어 법원에서 온 참고인 진술서의 내용이 잘 기억나진 않는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진술서의 질문과 내가 교수님을 대신하여 적은 답변 초안을 적어 본다.
질문 1: 진통 중의 자궁 파열은 흔한 일인가요? 생긴다면 어떤 경우에 주로 생기나요?
답변 1:
진통 중 자궁 파열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예 없는 것은 아니며 간혹 생기기도 합니다.
과거에 제왕절개나 자궁 근종 절제술 등 자궁을 수술한 병력이 있는 경우, 쌍태아 등 다태 임신인 경우, 거대아이거나 노산 산모인 경우 등에서 좀 더 자주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질문 2: 사례의 산모는 과거 제왕절개 수술로 출산하였습니다. 통상적으로 이런 경우 자궁 파열을 미리 예측할 방법은 없나요?
답변 2:
제왕절개 후 자연분만을 위한 진통 중에 자궁 파열이 발생했다고 해도 증상으로 미루어 파열을 빨리 알아낼 수는 있지만 파열이 되기 전에 그것을 미리 예측하기는 어렵습니다.
질문 3: 과거에 제왕절개 수술을 한 임신부에게 자연분만을 시도하는 것이 일반적인 의료 행위인가요?
답변 3:
제왕절개 후 자연분만 (브이백 , VBAC, Vaginal Birth After CS)은 파열에 대한 조속한 진단, 마취과 의사의 대기, 혈액은행에 대한 빠른 접근 등 몇 가지 조건이 갖추어지면 할 수 있으나 일선 현장에서 흔히 시도하지는 않습니다.
질문 4: 보호자는 자연 분만 시도 중 자궁 파열 가능성에 대하여 전혀 설명을 듣지 못하였고 동의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설명 의무 위반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답변 4:
제왕절개 병력이 있는 경우라면 그런 후유증 발생 위험을 설명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의무이기도 합니다. 의사의 설명 의무 소홀로 볼 수 있습니다.
질문 5: 담당 의사는 산모의 제왕절개 병력을 사전에 몰랐다고 하는데 통상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답변 5:
그렇지 않습니다. 사전에 문진을 통해 제왕절개 병력을 알 수 있고 또한 출산 전에 한번 이상 하게 되어 있는 복부 진찰을 통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교수님께 드린 답변 초안은 대략 위와 크게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교수님께서 최종 답변을 어떻게 적어서 보냈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그 사건이 어떻게 판결이 났는지도 모른다. 다만 산모의 이전 제왕절개 병력을 미처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담당 의사의 진료가 상당히 납득이 가지는 않았다.
위의 두 사례는 누가 봐도 한쪽은 의사의 과실을 지적하기 어려운 경우고 다른 한쪽은 의사의 과실이 분명해 보이는 사례라는 점에 대하여 별로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의료 분쟁은 위 사례들처럼 인과관계가 분명하게 밝혀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만일 첫 번째 사례에서 부검으로 할아버지가 심장 이상이든 뭐든 직접 사인을 밝힐 수 없었다면 그리고 두 번째 사례에서 의사가 사전에 파열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하였고 파열에 대한 대비를 하였음에도 사고가 발생하였다면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가. 그런 경우에도 첫 번째 의사가 사망 사고의 책임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두 번째 의사는 여전히 사망 사고에 대한 책임을 엄하게 치루어야 하는 것일까?
두 사례는 양극단의 사례로 현실에서의 의료 분쟁은 그 중간 어디쯤인가 위치하고 있다. 내과 의사이자 종양학을 다루는 전문의인 싯다르타 무케르지라는 의사가 "의학의 법칙들"이라는 책에서 그런 말을 했다.
"의학이란 분야가 이렇게 원칙도 없이 불확실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설소대, 중이염, 해당 반응 등 신체 부위와 질병과 화학반응의 명칭을 달달 외우는 것도 알고 보면 의사들이 광대한 지식 영역을 대부분 알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개발한 장치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가 책에서 말한 '의학의 법칙'이란 불확실성, 부정확성, 불완전성의 법칙들이다. 의사가 아닌 일반 사람들은 의학이 그렇게 불확실하고 불완전하고 오류 투성이라고 하면 의아해하고 불안해하겠지만 의학 분야에 오래 몸담은 사람이면 사람일수록 그런 점을 절실하게 느낀다. 의학을 수행하는 의사가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토록 오랜 기간의 학습과 수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최선을 다함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수많은 오진과 바라지 않던 나쁜 결과로 인하여 의료 분쟁이 발생한다. 어떤 분야에서 10년을 열심히 노력하면 혹은 만 시간을 투자하면 달인의 경지에 다다른다고 한다. 그러나 의학에서는 10년이 아니라 20년 혹은 30년 이상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했다고 해도 달인은 될 수가 없다. 명의니 뭐니 하는 것도 그저 경험이 조금 많은 의사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 이유는 의학이 과학이나 수학과 같은 종류의 학문 영역이 아니라 경험의 기록인 역사나 혹은 영감과 감성의 영역인 예술에 가까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중에 달인은 없다. 모차르트도 피아노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계처럼 완벽하게 연주해서 유명해진 것이 아니다.
의학은 불확실한 학문이고 의사는 그런 학문을 대단한 종교처럼 떠받드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러나 그런 점 때문에 의학이 대단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위험이 중간에 놓여 있는지 그 끝은 과연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함께 길을 나서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픈 이들에게는 큰 힘이 된다. 환자 옆의 가이드인 의사가 들고 있는 등불이 밝아서 위험을 좀 더 일찍 알려주고 효과적으로 대비할 수 있게 해 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앞으로 의학이 더 발달하면 등불의 빛은 더 밝아지고 더 멀리 비추기는 하겠지만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듯이 그 빛이 세상의 모든 아픈 이들이 바라는 것만큼, 더 건강해지고자 하는 이들이 기대하는 것만큼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함께 두려운 여행을 떠나 준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의학은 그런 학문이고 의사는 그런 사람들이다. 물론 그 대가는 돈일 수도 있고 명성일 수도 있고 존경일 수도 있다. 모두를 가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중 한 가지라도 가질 수 있는 의사는 행복한 사람이다.
루크 필즈 경은 영국의 사실주의 화가로 렘브란트와 비슷하게 빛과 어둠을 잘 활용한 화가다. 그가 그린 “의사”는 그가 첫째 아이를 잃고 나서 영감을 얻어 그린 것이라고 한다. 화면의 좌측에 있는 석유등이 비추는 의사의 밝은 얼굴은 의학 혹은 의사의 존재로 인한 희망을 말하고자 한 것이라면 주변을 둘러싼 어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안고 있는 불확실함, 위험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밤새 환아의 옆을 지키는 의사의 모습 때문에 이 그림에 상당히 열광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당시 의사들은 학생들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항상 네 앞에 루크 필즈의 그림에 나오는 이상적인 의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친절한 사람인 동시에 친절한 의사가 돼라."
나는 친절한 사람도 친절한 의사도 아니다. 그리고 오늘도 등불의 빛이 너무 어두워서 내일은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길을 간다.
-여기 실은 그림-
루크 필즈경의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