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진오비의 시작은 병원이 아니다

by 팔랑심

진오비라는 병원 이름에 대하여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다. 진오비는 영문으로 부인과인 gynecology의 약자인 gyn과 산과인 obstetrics의 약자인 ob의 합성어다. 진오비라는 단어는 "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의사들 모임"이라는 단체의 이름이 길어서 그 단체를 간단하게 부르기 위한 별칭으로 만들어진 말이었다.

2005년도 즈음 마포구 동교동으로 터를 옮길 무렵부터 나는 대한 산부인과 의사회의 학술 이사로 활동하다 새로운 결사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2008년 12월 1일에 Daum 카페에 산부인과 전문의들을 위한 폐쇄 카페를 개설하면서 이름을 진오비로 지었다. 카페를 개설하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대략 600여 명의 산부인과 전문의들이 가입하였다. 이후 다음 카페는 폐쇄하고 독립 서버를 두어 홈페이지도 만들었다.

진오비 단체의 개설 목적은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있지만 일반인들을 위한 홈페이지에 지금도 적혀 있는데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1. 잘못된 산부인과 의료 환경을 개선하여

2. 산부인과 의사가 보람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고

3. 궁극적으로 국민 건강의 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함


한마디로 간단히 말하면 "원칙을 지키며 최선을 다한다."는 진오비 산부인과의 지금 운영 철학대로 운영해도 병원을 운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다. 진오비에서 추진한 활동들이 많지만 가장 많이 알려지고 결국 단체의 해산까지 가져온 것은 낙태 근절 운동이다.

뜨거운 감자인 이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하여 회원들 간에 첨예하게 의견이 갈렸다. 열띤 논쟁을 거쳐 많은 회원이 탈퇴하는 것을 감수하고 낙태 근절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30년 정도의 개업의 생활 동안 20년가량을 낙태를 시술하는 의사로 살았던 낙태 옹호론자다. 물론 낙태를 무분별하게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고 전에 글에도 썼다시피 가능하면 말리고자 하지만 불가피한 경우 낙태를 의사가 돕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내가 낙태 근절 운동을 펼치는 데 앞장서서 낙태 전문 병원으로 알려진 병원의 산부인과 의사를 검찰에 고발까지 하고 단체의 회원들을 독려하여 비록 몇 달간일지언정 강력한 낙태 근절 운동을 펼치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다.


낙태 근절 운동을 펼치기 전에 태동 검사비 환수 사태라는 사건이 먼저 있었다. 태아 전자 감시법 흔히 태동 검사라고 부르는 검사는 임신 후기나 진통 중에 반드시 필요한 검사로 이미 교과서에도 올라가 있는 검사법이다. 그 검사를 적절하게 시행하지 않았을 경우 의사의 과실을 물을 정도로 보편화된 검사였다. 그러나 의료 보험법상 그 검사가 보험 검사로 등재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본인 부담의 검사로 허용된 검사도 아니었다. 정당한 검사임에도 법의 맹점으로 인하여 어떤 산모가 다니던 병원에 태동 검사비를 돌려 달라고 요청하여 환불받은 사건이 생겼다. 그리고 맘 카페를 통해 삽시간에 수많은 산모들 사이에 환수 관련 내용이 널리 알려졌다. 수년간의 태동 검사비는 적게는 1천만 원에서 많게는 수억 원에 이를 정도인 병원도 있었다.


의사들로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검사를 그저 보험에 규정이 없다고 하여 환불해 주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하여 진오비에서 단체로 서명을 받아 이의를 정식 제기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진오비 회원은 물론이고 가능하면 호소력이 큰 대형 병원이나 분만 전문 병원의 병원장들의 참여도 필요했다. 그래서 나를 포함하여 진오비 임원들이 각자의 인맥을 동원하여 서명을 받는 운동에 돌입하였다. 결과는 많은 참여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유는 낙태 시술이었다. 낙태는 당시 형법에 금지법이 있으며 처벌이 징역 1년 이상으로 무거웠다. 물론 거의 사문화되다시피 한 법이라 처벌받는 사례는 적었지만 엄연히 법이 살아 있어서 의사들로서는 항상 신경이 쓰이는 문제였다. 그러니 낙태라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마당에 태동 검사비 얼마 지키자고 나선다는 것은 누구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산부인과 의사의 발목을 잡는 낙태 문제를 그대로 두고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고 의료의 왜곡 현상은 바로 잡아지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결국 산부인과 의료계에서 가장 뜨거운 문제인 낙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것이 낙태 근절 운동이 이슈화된 숨은 이유였다.

그때 강력한 낙태 근절 운동을 펼치면서 나를 포함하여 산부인과 의사들이 바라는 것은 간단했다. 낙태를 일정 부분 허용할 수 있도록 현실에 맞게 법을 개정하거나 법을 개정하지 않고 그대로 둘 것이면 엄격히 금지하고 단속하여 낙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낙태를 시술한 의사와 낙태를 받는 여성 모두를 범죄자로 만들어 속박하는 것은 하지 말라는 호소였다.


나는 낙태 시술을 하지 않은지 10년 정도 되었다. 필요하면 낙태 시술을 의사가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보의 부재 상태에서 여성이 결정한 낙태는 올바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앞으로도 할 생각은 없다. 그보다는 우선 첫 번째로 미혼인 상태의 임신 등 사회적 사유 때문이든 아이를 낳아 기를 형편이 되지 않는 경제적 사유 때문이든 낙태를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드는데 좀 더 정부와 사회가 힘을 쓰기를 바란다. 두 번째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시행하고 있는 것처럼 낙태가 초래할 수 있는 문제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충분히 심사숙고하도록 도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도 낙태 시술을 가급적 하지 않고 설득을 하였던 것은 그리고 지금은 아예 낙태 시술을 하지 않는 것은 사실 개인적인 경험과도 관련이 있다.

낙태 시술을 하려면 마취를 해야 한다. 보통 수면 마취를 많이 하는데 요즘 시끄러운 프로포폴이라고 불리는 수면 마취제를 이용한다. 이 수면 마취제는 10분 내지 20분 정도의 작용 시간을 가지고 있어서 짧은 수술에 많이 쓰이는 마취제다. 수면 마취를 하면 깰 때 흡사 만취한 상태와 비슷해서 속마음을 털어놓는 사람들이 많다. 낙태 시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모두 서럽게 운다. 물론 깨고 나면 본인은 기억을 못 한다. 맨인블랙이라는 영화에서 번쩍하는 전기 불빛을 보고 기억을 잃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낙태 근절 운동을 하면서 여성 민우회나 한국성폭력 상담소 등 수많은 여성 단체의 사람들과 가톨릭 생명 윤리 위원회 신부님들, 프란체스코 수도원 수사님, 낙태 반대 운동 연합의 대표님을 포함한 목사님, 조계종의 스님들, 지금은 베이비 박스로 유명해진 목사님 등 많은 사람을 만났다.

여성 단체는 ProChoice (프로초이스, 여성의 선택이 우선이라는 입장)를 주장했고 종교계는 ProLife (프로라이프, 태아의 생명이 우선이라는 입장)를 주장하면서 둘 사이의 강은 너무 깊어서 도저히 합일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를 포함한 진오비 회원들은 낙태는 필요하지만 충분한 심사숙고와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와 산부인과 의사들을 ProWoman (프로우먼, 여성을 위하여 낙태를 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돕자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태아의 생명권을 위해 낙태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위하여 불가피한 낙태는 허용할 수밖에 없더라도 사회 경제적 지원을 하여 낙태를 가능하면 줄이는 방향으로 함께 노력하자는 생각이었다.


시간이 흘러 낙태 근절 운동도 거의 포기 상태일 때 어떤 진오비 회원의 조언이 나를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회원께서 나에게 한 말은 "남을 바꾸려고 애쓰지 말고 당신 병원이나 제대로 돌봐라."는 말이었다. 그때는 병원 이름이 아이온 산부인과였다. 병원 운영이 어렵던 차에 그런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점도 있고 진오비 활동도 거의 한계에 봉착하여 의료 환경의 개선은 불가능한 일이구나 생각하고 진오비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성과를 거두지도 못하고 그 이름을 달고 시작한 진오비 산부인과도 별로 든든하게 자리매김하지 못하여 산부인과 의사 동료나 후배들에게 롤모델이 되지 못하고 말아서 미안한 마음이 크다.


나는 종교가 없다. 태아가 생명인지, 가능하면 최선을 다해 보호해야 하는 생명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산부인과 의사니까 여성과 태아의 생명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여성의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태아를 임신한 여성이나 태아의 아빠인 남성이 맛없는 식사를 먹는 대신 맛있는 식사를 먹는 것과 태아의 존재 중에 골라야 한다면 혹은 직장에서의 승진과 태아의 존재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나는 태아를 선택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임신한 여성들이 어떤 선택을 하던 본인의 자유고 의사 중에 일부는 나처럼 출산을 도와야 하고 의사 중에 일부는 낙태 시술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비록 태아를 잉태한 여성이 태아를 원치 않는다고 해서 여성 단체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것이 제거해야 마땅한 종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많이 나간 것이다.

생명이든 아니든 우리 모두는 거기서부터 출발했다.


르네 마그리트는 초현실적인 작품을 많이 남긴 벨기에의 화가다. 그는 우리 주변의 사물을 비틀어서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방식의 그림을 많이 남겼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그림은 그의 대표작처럼 여겨지는 작품이며 그림 밑에 적혀 있는 글귀가 그림의 제목이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를 그린 그림일 뿐이라는 의미에서 그런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마그리트는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과 그것을 표현하는 것 사이에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벌린다. 그럼으로써 그림이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하여 한번 더 생각해 보게 한다.

내가 마그리트였다면 나는 파이프 그림 대신 팔다리가 생긴 임신 12주 시기의 태아 그림을 그려두고 "이것은 생명이 아니다"라고 밑에 적은 그림을 보여 주었을 것이다. 그랬을 경우 그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이것이 생명이 아니라면 과연 생명은 무엇이며 그림에 보이는 태아는 그럼 무엇인가라는 점에 대하여 생각을 진지하게 하게 될 것이다.



-여기 실은 그림-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33_Magritte_Pipe.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30.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