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재미있는 책이 아니다

by 팔랑심

산부인과 전문의가 되기 위해 대학병원에서 받는 수련 기간은 4년이다. 그중 1년 차 때는 환자나 산모의 진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치의를 맡는다. 주치의는 다음날 수술을 위한 수술 동의서도 받고 교수님의 회진을 대비하여 검사 결과와 병력을 파악해 두고 산모들의 분만도 돕는다. 당직 근무도 맡아야 해서 전공의 시절 중 가장 바쁜 때가 그 시기다. 2년 차는 1년 차를 도와서 수술을 하며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스케줄이 들어있다. 3년 차는 주로 연구나 기타 업무를 맡는 경우가 많고 진료나 수술팀에 소속되지는 않는다. 가장 높은 연차인 4년 차는 수석의라고도 하며 특진이 아닌 일반 환자의 수술을 집도하고 특진 교수님의 수술 시에는 일차 보조 의사 역할을 맡는다. 물론 이것은 내가 수련을 했던 병원의 경우고 병원에 따라서 역할 분담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여하튼 대체로 대학 병원에서는 인턴 1명, 주치의 1년 차 1명, 2년 차 한 명, 4년 차 수석의 1명이 한 팀을 이룬다. 한 팀은 한 달 단위 혹은 두 달 단위로 교대로 산과 병동과 부인과 병동을 번갈아 가며 담당한다. 따라서 1년 내내 같은 1년 차와 2년 차, 4년 차가 근무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1년 차들은 누구나 다 마음씨 좋고 잘 지도해 주는 천사 같은 4년 차를 만나기를 바란다. 회사에 들어간 신입 사원이 인품 좋고 많은 것을 잘 알려주는 좋은 사수를 만나기를 바라듯이 병원의 경우도 다를 것이 없다.


5월 어느 날, 1년 차 초반이라 아직 경험도 많지 않고 일도 서툴 때였다. 수술을 마치고 오후 늦게 병동으로 올라와서 저녁 회진 준비를 했다. 어제 나간 검사물의 결과지도 확인하고 아까 수술한 산모의 수술 기록지도 작성해야 하는 데다가 그날따라 새로 입원한 신환도 많아 정리할 일이 밀려 있었다. 내가 주치의로 있는 팀의 4년 차 수석의 선생님이 저녁 7시쯤 회진을 위해 스테이션에 나타났다. 내일 수술할 환자의 동의서도 아직 받지 못했고 낮동안에 입원한 신환 산모의 초진 기록지도 다 마무리를 못했다. 빨리 회진이 끝나면 좋겠다는 생각, 오늘 회진은 한 시간을 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회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수석의 선생님은 차트 정리와 동의서 작성 등 일을 오늘 내로 다 마무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나로서는 시간이 빠듯하여 시간 내에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내 예상으로는 밤 1시나 2시쯤 되어야 마무리할 수 있을 듯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여 아래에 당시 상황을 옮겨 본다.


수석의: "심선생, 12시까지 차트랑 모두 정리해 둬."

나: "알겠습니다. 그런데 일이 많아서 12시 내로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1시든 2시든 최대한 오늘 밤 안으로 끝내 놓겠습니다."

수석의: "아니 오늘 밤이 아니라 12시까지 끝내 놓도록 해"

나: "예 알겠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수석의: "아니 노력이 아니라 무조건 12시까지 끝내 놓으라고."

나: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석의: "아니 이 새끼가. 노력이 아니라 12까지 해 놓으라고. 알겠어?"

나: "......."

욕까지 들으니 더 이상 대답하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그때 갑자기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주변에 있던 2년 차와 스테이션을 지키던 간호사들이 놀라서 쳐다본다. 정통으로 눈두덩을 맞고 잠시 휘청거려 쓰러질 뻔했지만 몸을 가누고 서 있었다. 다시 주먹이 날아왔고 발길질이 시작되었다. 결국 바닥에 쓰려진 채 두들겨 맞았다. 나는 별 다른 대응을 하진 않았다. 지금은 많이 좋아져서 그런 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때만 해도 대학의 수련 과정은 군대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4년 차 선배는 병원에서 하늘 같은 존재라서 대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그때 내가 근무하던 병원만 그런 것은 아니고 다른 병원들도 대체로 비슷했다. 특히 외과 계열이 군기가 셌다. 물론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흔한 편은 아니었고 언어폭력이 대부분이다. 다만 그때 내가 만난 4년 차 선생님이 성격이 과격하기로 유명한 사람이고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 나로서는 그렇게 하겠다고 거짓으로 말해도 되었을 텐데 내게도 융통성이 없었다고는 생각한다. 주변에 있던 다른 의사들이나 스테이션의 간호사들도 아무도 말리지 못하고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4년 차 수석의 선생님의 별명은 미친개였을 정도로 성격이 아주 험해 함부로 끼어들었다가는 사태가 더 악화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10분 정도 이어진 구타로 눈에는 시퍼런 멍이 들고 입술은 터져 피가 흘렀다. 이가 부러지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원래도 못생기고 부정 교합이 심한 이가 그나마 부러지기라도 했다면 보기가 영 좋지 않았을 것이다. 한참 두들겨 패던 4년 차 선생님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나가 버리고 나와 우리 팀 인턴이 스테이션 탁자에 앉아 있었다. 얼굴의 피는 물수건으로 닦았다. 멍든 눈과 찢어진 입술은 봉합할 정도는 아니라 간호사의 도움으로 대충 반창고를 붙여 두었다. 맞은 건 맞은 거고 할 일이 많아 일을 빨리 서둘러야 했다. 너무 늦은 시간에는 환자와 보호자도 자야 하니까 늦기 전에 다음날의 수술을 위한 수술 동의서부터 받기로 했다. 병실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저녁 근무를 하던 젊은 간호사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두들겨 맞은 나도 울지 않는데 왜 갑자기 우나 싶었다. 나중에 들으니 두들겨 맞고 병실로 가겠다는 내 모습이 너무 처량하고 불쌍해 보여서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고 한다. 당시 간호사들과는 야식도 사서 함께 먹고 한밤중의 콜 (환자에게 이상이 있거나 하여 담당 주치의에게 연락하는 일)에도 내가 귀찮은 내색 없이 즉시 응대를 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날은 어찌어찌 보내고 다음날 날이 밝고 나서 산부인과 전공의 수련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에 사직서를 들고 산부인과 과장님께 찾아가려고 당직실을 나섰다. 그때 함께 수련을 하던 동료 1년 차 선생님들이 나를 말리면서 조금만 참으라고 했다. 어렵게 의국에 들어와서 고생하면서 수련을 잘하다가 그만두고 가면 너무 아깝지 않으냐고, 앞으로 좋은 날이 올 것이니 한 번만 참으라고 말려서 결국 사직서는 내지 못했다.


그 후 4년의 전문의 수련을 마치고 나는 지금 산부인과 전문의가 되어서 진료를 하고 있다. 비록 한때였지만 두들겨 맞아가면서까지 수련을 마쳤는데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인지, 잘한 선택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수련 과정 때 힘들어하는 레지던트에게 친한 간호사들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선생님은 지금은 힘들지만 수련 마치고 나가시면 월급에 동그라미 하나 더 붙잖아요."라고 말해 주면서 격려를 했다. 그때 전공의 월급이 50만 원 언저리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나가서 취직하면 500만 원쯤 되던 시절이라서 하는 말이었다. 지금도 산부인과 의사 평균 연간 수입이 6,000만 원이라고 하니 그때와 별반 차이는 없다. 물론 산부인과 의사 중에는 월 수입 수천만 원 이상인 사람도 있고 나처럼 경영에 허덕이는 의사도 있으니 천차만별이다.


그때로부터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주먹이나 발로 두들겨 맞는 것은 그리 아픈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몸이야 좀 아프고 멍도 들고 마음도 상처를 입지만 몸의 상처는 그리 오래가지 않고 마음의 상처도 세월이 흐르면 무뎌진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그저 사건으로서의 기억일 뿐이지 그 당시의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지는 않다. 장작이 타고나서의 검은 재를 보는 기분과도 같다. 열기가 없는 재는 더 이상 상처를 주지 않으며 위험하지도 않다. 물론 그때의 4년 차 선배를 그 이후 몇 번 스쳐 지나가면서 보기는 했지만 세미나 등에서 만나도 굳이 아는 척하지는 않았다. 재는 비록 뜨겁지는 않지만 검댕이가 묻어 더러워질 수 있는데 일부러 검댕을 묻혀 내 감정을 더러워지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때 두들겨 맞고 과장님 방으로 가서 사표를 제출하고 그만두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힘든 일이 생겨 밤 깊이 잠을 못 이루는 날에 가끔씩 든다. 만일 그랬다면 지금처럼 많은 빚과 아직도 밤낮을 가리지 않는 출산 산모를 보아야 하는 불규칙한 생활을 하지는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귀여운 아기의 출산을 도우면서 얻는 보람도 없을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의 삶이 더 행복한 삶이었을지는 모르겠다. 인생에는 만일이 없으니까.


그때 두들겨 맞고 나서 힘들 때 나를 붙들어준 힘 중 하나는 동료들의 지원과 위로였다. 그 후 의료 분쟁으로 힘든 시절도 있었는데 그때 나를 견디게 해 준 힘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처럼 경영이 별로 좋지 않아 빚만 늘어가는 상황에서 나를 붙들어주는 힘도 아마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서정주 시인은 자신의 시 "자화상"에서 스물 세 해 동안 자신을 만들어준 것은 팔 할이 바람이라고 하였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의 울음과 천둥과 무서리가 필요했듯이 어떤 인간이든 버티고 설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있게 마련이다.


아내는 내가 품은 그것을 미련이고 집착이라고 이야기하지만 희망이라고 부르던 미련이라고 부르던 붙들 것이 있으면 다행이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한다. 비록 생명을 구하는 것이 되지 못하더라도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죽는 순간까지 헤엄을 치다가 죽는 것과 지푸라기조차 잡지 않고 그저 손 놓고 무기력하게 죽는 것은 의미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삶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사는 하루하루의 삶은 모두 죽음을 앞둔 어느 날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지푸라기처럼 보였던 것이 동아줄일 수도 있고 동아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지푸라기일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영국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조지 프레드릭 워츠는 "영국의 미켈란젤로"라는 찬사를 받는 화가다. 그러나 지극히 내성적인 데다가 타협을 모르는 성격 탓에 다른 사람들과는 척을 지면서 살았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는 세속적인 명예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살았다고 하니 고단한 삶이었으리라는 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의 대표작 "희망"은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가 26년간 옥살이를 할 때 감방 벽에 걸어 놓고 매일 보았다고 하는 그림이다. 한 여성이 지구를 상징하는 커다란 원 위에 앉아 리라라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녀의 두 눈은 붕대로 가려져 있고 리라의 7개 줄 중에 6줄은 이미 끊어지고 오직 한 줄만 남아 있다. 딱 봐도 아주 절망적인 상황이다. 희망이란 그렇게 절망이 극에 달했을 때 사람을 붙들어 주는 유일한 힘이다. 그림의 모델인 여인은 도로시 딘이라는 이름으로 "화가의 신혼"을 그린 프레드릭 레이턴이 딸처럼 키우면서 모델로 삼았던 여인이라고 한다.



-여기 실은 그림-

조지 프레데릭 워츠의 “희망에 곰팡이 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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