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재미있는 책이 아니다
아래는 어떤 물건에 대한 설명이다. 처음 3가지 문항을 보고 답을 맞힌다면 대단히 센스가 있는 사람이다.
1. 난임 치료 방법 중 하나다.
2. 3등급 의료기기 (인체 내 일정 기간 삽입돼 사용되거나 잠재적 위험성이 높은 기기 그룹)에 속한다. 참고로 이보다 높은 위험도인 4등급 의료기기로는 심장 혈관 스텐트나 심장 충격기 등이 있다.
3. 미국에서는 1918년이 되어서야 법적으로 이것의 사용이 허가되었다.
여기서 답을 맞히지 못한 분들을 위하여 조금 더 쉬운 힌트를 드린다.
1. "유해 화학물질을 제거하였습니다. 색료, 향료를 첨가하지 않았습니다. 택배 송장에는 패션잡화로 기재됩니다."--이 물건의 인터넷 구입을 위한 제품 안내 페이지에 있는 설명이다.
2. 과거 이것이 없었을 때는 격렬히 몸을 흔들고 폴짝폴짝 뛰거나 무릎을 굽히고 몸을 웅크린 채로 재채기를 하라고 권고했다.
3. 국내 회사에서 제조하는 이것의 표준 사이즈는 폭 53㎜, 길이 180㎜, 두께 0.07㎜이다.
아직도 무엇인지 모르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실망할 것은 없다. 이것을 사용하는 당사자들도 잘 모르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위의 문장은 모두 콘돔을 설명하는 문장이다.
콘돔은 1957년 듀렉스(Durex) 사에서 처음으로 윤활제를 발라서 판매하면서 대중화에 성공했으며 지금도 전 세계를 통틀어 콘돔을 가장 많이 판매하고 있다. 콘돔은 성병의 예방을 위해서도 쓰이지만 주 사용 목적은 피임이다.
콘돔은 정관 수술과 함께 남성이 할 수 있는 피임법으로 비교적 저렴하고 조심해서 사용하기만 한다면 그럭저럭 사용할만한 피임법 중 하나다.
내가 산부인과를 선택한 전공의 1년 차이던 1987년 우리나라의 연간 출생아 수는 623,831명이었다. 내가 산부인과를 택한 직접적 동기의 하나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출산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고 출산이 저녁 마실 나가는 정도로 간단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되기 전까지는 의사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안전하게 오래 먹고살 수 있는 직업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그런 예상이 착각이라는 것은 이미 10년 전에 알았다.
1987년으로부터 딱 한세대인 30년이 지난 후 인 2017년 연간 출생아 수는 357,700명이었다. 합계 출산율은 1.05명으로 여성 1인이 출산하는 아이가 한 명이라는 뜻이다.
출산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권리이며 선택이다. 다만 출산을 피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국가의 출산율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그런 사람도 낮은 출산율로 국가와 사회가 퇴보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꼭 낮은 출산율이라고 해서 국가와 사회가 퇴보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실 그런 저출산의 결과가 어떤 미래를 가져올지는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세계 어느 나라도 그런 저출산 환경에 장기간 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충분한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작은 것들의 총합이 끼치는 결과를 알기 어렵다.
돌도끼만 들고 다니면서 맹수를 피해 숨어 살던 오래전 우리 조상들도 사는 것이 팍팍했을 것이다. 내 식견이 짧아서인지 모르겠으나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를 봐도 모든 국민들이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리면서 편히 살았다는 글을 읽어 보지 못했다. 사는 것이 편한 시대는 없다.
삶은 고해라는 부처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는 것은 고통이라는 것은 출산하는 순간만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아기는 태어나면서 운다. 30년 동안 출산을 도우면서 아직 단 한 아기도 웃으면서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다만 현재가 오래전 과거에 비해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과거에는 힘들어도 그것이 당연한 것이고 당연하기 때문에 묵묵히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힘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당연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중단하는 사람도 많다. 석기시대에도 자살하는 사람이 있기는 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마 거의 없었을 것 같다. 얼마 전 부모의 성적 압박에 시달리던 학생이 죽기 살기로 공부해서 마침내 부모가 원하던 1등을 하고는 성적표와 함께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고 한다 유서의 내용은 "이제 됐어, 엄마?"라는 한 문장이었다고 한다.
공부는 힘든 것이고 1등은 더더군다나 힘든 것이고 나아가 사는 것이 원래 힘든 것이라는 사실을 그 학생이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그리고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더라도 자살하는 방법을 몰랐다면 그런 비극적인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인간에게 선택의 기회가 있다는 것은 혜택인 동시에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모든 선택은 작든 크든 책임과 대가를 요구한다. 석기시대보다 철기 시대는 훨씬 위험하고 그렇기 때문에 쇠를 다루는 방법에 대한 것 못지않게 그 쇠를 다루면서 고민해야 할 철학에 대하여도 같은 비중의 시간과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피임이라는 선택 방법이 있음으로써 인간은 힘든 출산과 양육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서 자기가 살고 싶은 방향으로 삶을 계획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를 포함해 많은 나라들이 저출산 국가가 되었다.
자동차와 세탁기 같은 문명의 이기들이 개발되어 사람들에게서 힘든 노동을 어느 정도 줄여 주었다. 그리고 고혈압과 당뇨 같은 생활습관병이 늘어났다.
약을 이용하던 다른 방법이던 자살이라는 수단이 있어 힘든 삶을 계속 이어가지 않고 종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그 개인에게 남는 것은 없다.
우리는 살면서 하루에도 수많은 것들을 선택한다. 어쩔 수 없는 선택도 있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선택도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전혀 예상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들도 있다.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만난 운명처럼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된 것이 어쩌면 “점심 먹었어요?” 같은 짧은 문장 하나가 시작이었을 수도 있다. 형제간에 칼부림이 나서 서로 죽고 죽이는 끔찍한 일을 벌이게 된 것이 점심 내기 화투 놀이판일 수도 있다. 한마디 식사 제안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하는 사소한 선택이 배우자와 전혀 모르는 남남의 두 길중 한쪽 길로 가게 만들었고, 똥 껍데기를 쌍피로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하는 것 때문에 삶과 죽음이 갈라졌다.
우리나라는 초저출산 국가가 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 초저출산 국가가 된 것도 아니다. 개개인의 사소한 선택이 모여서 이런 상황에 도달했다. 수많은 개개인의 사소한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에 바꾸기가 쉽지 않다. 좋은 비유인지 모르겠으나 지방종이라는 것은 지방 조직이 신체의 일정 부분에 모여서 종양이 된 것이다. 비만은 같은 지방이 늘어났더라도 종양으로 된 것이 아니라 복부든 허벅지든 신체의 거의 모든 곳에 퍼져서 늘어난 상태다. 같은 양의 지방이라도 지방종은 수술로 간단히 제거할 수 있지만 비만으로부터 벗어나는 쉽지 않다.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은 대체로 좋은 것이다. 권력이 높거나 돈이 많거나 또는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고 권력과 돈과 지식이 적으면 적을수록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적다. 그러나 과연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아져서 인간이 행복해졌냐고 묻는다면 나는 바로 대답을 하기가 어렵다. 경제적으로든 다른 것으로든 다양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나에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은 삶과 그렇지 않은 삶 중에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당연히 선택이 많은 삶을 선택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기 전에 사소해 보인다고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오늘 저녁으로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좀 심사숙고해 보아야겠다.
귀스타브 카유보트는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화가의 길을 걸었다.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 덕분이기는 하지만 그는 하고 싶었던 화가의 길을 마음껏 누렸다. 누구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한평생 살 수 있고 그 일로 하여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 지거나 혹은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진다면 감사한 일이다.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그림 중에는 비 오는 시내를 산책하는 커플의 모습을 그린 '비 오는 날의 파리 거리'라는 작품이 제일 많이 알려져 있다. 이 글에 이 그림이 적당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에서 느껴지는 여유가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내가 비 오는 날을 좋아하기 때문에 넣었다.
-여기 실은 그림-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비 오는 날의 파리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