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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leblue Oct 01. 2018

다섯 번째 잡념 #평생 날 괴롭히는

_영어라는 끔찍한 괴물 ㅣ you의 리투아니아 생활기

리투아니아에서의 첫 일주일,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발
말을 하다가 자주 현기증이 나고 속이 답답했다
마치 영어병에 걸린 것 같았다



                                                                   리투아니아에서의 다섯 번째 잡념 #평생 날 괴롭히는


나의 생애 중 절반을 넘게 이 괴물에 시달려왔다

어렸을 때부터 야금야금 내 자존심을 갉아먹는 괴물

나는 아무런 목적도, 의지도 없이 그 괴물과 싸워왔다

이길 수 있을 거란 확신조차 들지 않았다


출국날이 다가오자

이 괴물은 요동치는 나의 마음에 기름을 부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에 둘러싸여

저 위에서 날 내려다보는 그 괴물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그런 상황


한국에서 '실력'이라는 단어는 상대적인 것에 가깝고

나를 소개하는 여러 가지 '타이틀'은 마치 나란 사람을 다 아는 듯이 행동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저 괴물을 만들어서

회피하고 싶었던 걸까

무언가의 압박을




자기소개서를 적을 때마다

새로운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마다

피할 수 없는 항목은 바로 '학력'이다


어쩌다 보니 나는 '외'고를 거쳐 '외'대에 진학했고

심지어 리투아니아를 다녀오면

'외'국으로 교환학생까지 다녀온 사람이 된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제법 영어 하겠네 싶은 길을 내가 걷고 있었다

전혀 몰랐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길 위에 내가 서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외고를 졸업했다는 것을 은근히 숨기고 싶어 했다

'아니.. 나 사실 영어 못해..'

고등학교 질문에 항상 자동응답기처럼 따라붙는 말이었다




한국에서 '실력'이라는 단어는 

절대적인 것보다

상대적인 것에 가깝고


3년간의 외고 생활에서 나는 

온갖 점수와 등급으로 실력을 평가당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후려치기'


다시 돌이켜보면

마음만 먹으면 나는 언제든지 영어라는 괴물과 친해질 수 있었다

그깟 평가 따위 다 무시해버리고

그깟 숫자 따위 다 무시해버리고

그깟 눈빛 따위 다 무시해버리고


하지만 그저 어리고 여렸던 고등학교 시절

나는 그깟 것들을 다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것들에 잠식되어버려서

외국인이 말을 걸면 입부터 얼어버리는 

외고와 외대를 나온 사람이 되어버렸다




리투아니아에서의 첫 일주일,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발

말을 하다가 자주 현기증이 나고 속이 답답했다

마치 영어병에 걸린 것 같았다


리투아니아에서의 두 번째 일주일,

기숙사에서 마주치는 친구들과 한두 마디를 나누었다

가끔씩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버퍼링이 걸렸지만

친절하게도 내 눈을 바라보며 기다려주었다


리투아니아에서의 세 번째 일주일,

유레카!

맥주 두 잔의 마법을 발견했다

내가 이렇게 영어를 술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리투아니아에서의 한 달,

문법 따위 개나 주고 일단 다 던지고 봤다

신기하게도 다들 알아들었고

친구들은 심지어 나보고 영어 발음이 좋다고 했다


몇십 년 동안 나를 따라다녔던 그 거대한 괴물이

너무나 어이없게도 한 달만에 자취를 감췄다

영영 사라지지는 않았을 거다

아마 한국을 돌아가면 다시 나타나서

인사를 건넬지도 모르지


그때 나는 또다시 겁에 질린 표정일까

아니면

환하게 웃으며 나도 안녕이라 답할까


아무래도 이제 그 괴물은 상관없다

갑자기 영어를 배우고 싶어 졌다

정말 처음으로 언어를 공부하고 싶은 순간이 왔다





2018.01.18~ KAUNAS, LITHU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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