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하여> 리뷰

요양사의 삶에 대하여

by 샴스 Shams

어느 일요일 저녁, 가족들과 함께 볼 영화를 고르고 있었다. <딸에 대하여>가 보인다. 한동안 사람들로부터 보았다는 이야기나, 추천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시놉시스에서 '요양보호사'라는 단어를 엄마가 읽어내고 웃었다. 엄마는 몇 년 전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고 요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좋다. <딸에 대하여>를 보자고 제안하고 자리를 잡았다. 17년에 발간된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24년에 개봉한 나름 최신의 영화라고 한다.


IE003344247_STD.jpg 출처 <오마이뉴스>


<딸에 대하여>는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도 있을 정도로 '훌륭한' 어르신이자, 치매환자인 제희를 돌보는 요양호보사 주희, 그리고 그의 딸 그린과 그린의 파트너 레인의 이야기이다. 제희의 치매가 심해져서 요양원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짐과 동시에, 불안정해진 주거 때문에 주희네 집으로 와서 살게 된 그린, 레인과의 동거는 단조롭고도 외로웠던 주희의 일상이 바뀌며 영화가 전개된다.


중년 여성 그것도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가 주인공인 영화, 그리고 성소수자가 나오는 영화라는 점에서 나의 궁금증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감은 사실 조금 실망. (잘 실망하기도 감동하기도 하는 양은냄비 같은 사람임을 감안해 주길 바란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어쩌면 스포 포함?)


엄마는 작년부터 요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풀타임 교대근무에 40명의 어르신을 4명이 모셔야 하는 상황이다. 그곳에 엄마는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적응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어르신을 돌봐야 하다 보니 매 순간이 일회용품이다. 하루에도 물티슈며 기저귀며 패드며 산더미 같은 쓰레기가 나온다. 어르신들은 누군가 면회를 오지 않는 이상 바깥바람을 쐴 수도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요양원이 한강뷰라는 것일까? 이런 요양원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공장 같기도 하도 감옥 같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감옥 맞지."


요양원이 사회의 최전선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 최전선을 방어하고 있는 건 엄마와 같이 비정규직의 중년 여성들이었다. 감옥에서 일하는 엄마의 마음은 어떨까? 엄마라고 그런 곳에서 일하고 싶지 않으리란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엄마는 꿎꿎이 일했다. 특별히 사명감을 가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박봉에 몸으로 하는 노동을 60대 중반의 몸으로 매일 해나가는 엄마가 걱정이 된다. 그럼에도 일을 그만두라는 말을 할 수 없다. 엄마를 부양할 수도 없는 형편일뿐더러, 엄마는 일을 통해서 매일을 버텨냈다.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자들을 비출 때 영화는 의무를 가진다. 그들의 삶을 카메라로써 대상화하지 않을 의무. 영화의 불편은 요양사라는 인물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인터뷰를 나올 정도로 꽤나 유명한 제희를 단독으로 모시는 요양사 주희. 제희를 각별히 모시면서 물품을 많이 쓰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게다가 제희만 모시는 것이 어떤 특별 대우가 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제희를 모시고 있다는 자부심과 그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동료나 관리자의 핀잔은 그에게 닿지 않는다. 주희는 자발적으로 야근을 하거나, 모자란 물자를 집안 살림과 몸으로 때우며 제희를 살뜰히 모신다. 영화 속에서는 주희를 향한 말과 행동들이 '부당하게' 그려진다.


IE003346535_STD.jpg 출처 <오마이뉴스>


딸 그린이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해고된 동료 강사와 함께, 차별과 혐오를 만들어내는 '학교'라는 구조적 폭력에 대응할 때, 엄마 주희는 '훌륭한 어르신' 제희에게 처해진 상황으로부터 그를 구출해내려 한다. 악화된 치매에 병원이 옮겨지고, 약에 취해서 다른 곳으로 옮겨서 누워있는 제희를 보며 눈물을 흘리다가 그곳의 직원에게 말한다.


"여기서 이런 취급을 받으실 분이 아니라고요."


직원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한다.


"이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어디 있어요."


영화의 중심은 제희를 모시는 주희가 아니라 이 직원의 한마디라고 생각했다. 개인의 훌륭함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감옥에 갇히지 않을 권리가 있다. 직업을 잃지 않을 권리가 있고, 생명 존재 답게 존중받으며 살아갈 권리가 있다. 주희는 제희를 구함으로써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로 한다. 이는 아름다운 기만이다. 이런 아름답고 소중한 순간들은 우리는 연결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사랑이라 부르기도 하고 집착이나 기만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요양시설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영화가 가지는 의미는 고무적이다. 그곳의 이용자와 노동자들이 처해있는 끔찍한 현실이 더 많이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영화가 만들어가는 서사는 과연 그것을 윤리적으로 드러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모든 영화가 윤리적일 필요는 당연히 없으며, 나도 윤리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좋아하고 소비한다. 하지만 윤리적 인척 하면서 그렇지 않은 영화는 더욱 위험하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을 낭만화하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직에 있는 요양사들이 이 영화를 보면 어떤 기분을 느낄지 생각해 보았다. 알순 없지만 혹시 "나는 저렇게는 못하겠어", "저렇게 하고 싶은데 형편이 안돼", "저런 마음이 들지 않는 / 저렇게 까지 못하는 나는 나쁜 사람인가?"와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되진 않을까? 그것이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으로 다가오거나 자신의 결함으로 받아들여지진 않을까? 혹은 여느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직업인들에 대한 '판타지'로 여겨지진 않을까?


IE003350825_STD.jpg 출처 <오마이뉴스>


직업인으로서 주희의 윤리적 딜레마가 더 드러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주희는 요양사라는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잊은 듯 맹목적이다. 여기서 이런 취급받을 분이 아닌 제희를 어떻게든 구하려고 모든 것을 제쳐놓는다. 만약에 그것이 주희의 '어떤 모순'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 또한 더욱 드러났어야 했다. 그러나 영화는 주희의 서사와 언어를 의도적인지 아닌지 생략함으로써 자칫 윤리적인 선택을 한 영웅으로 보이도록 한다.


엄마는 감옥인 것을 알면서도 요양원에서 일을 한다. 때로는 괴롭고, 때로는 무딘 감각에 휩싸이면서. 우리 모두 이 사회의 구조적 폭력 아래에서 찢어질 듯 날카로운 아픔과, 그것에 무뎌진 감각을 동시에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을 전복하는 감각, 그러니까 제희에 대한 폭력이 일어나며 주희가 느낀 이질감은 무척이나 반갑고 소중한 감각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저항이 되고 마침내 체제를 전복하는 우리의 힘이 될 테니까.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윤리적 선택이나 책임으로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개인'이 아닌 '구조'가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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