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절망을 말할 때 희망을 말해줘
하루하루 쏟아지는 소식들을 따라가기에 바쁘다. 몇 주 전부터는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소식을 듣다가 우울했고, 무안공항 참사와, 이스라엘의 서안지구 폭격, 서부지법사태, 대전 초등학생 살인 사건.. 가장 최근에는 고 김새론 씨의 사망 소식을 들으면서 우울했다. (이 글을 최초로 썼던 것이 연초라 사건 타임라인이 지금과는 조금 맞지 않는다ㅠ) 열거하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많은 소식들은 하나같이 무겁고, 숨이 막히고, 절망적이다.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우물 같은 슬픔은 이 세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해?'
답답한 마음에 누구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털어놓아도 대화 끝에 도착하는 곳은 ‘모른다’는 말이다. 모르겠다. 이 타락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루를 채워야 할 것인지. 그저, 숨을 몰아쉬면서 견디는 것밖에는 없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모르겠다.’로 시작된 한숨 끝에 ‘그래, 그렇지.’ 하는 명료함을 만나는 날들이 있다. 오늘도 그런 날이다. 선물 받고 한동안 책꽂이를 무겁게 하는 역할만 하던 ‘우리는 지구를 떠나지 않는다’에 갑자기 손이 닿았기 때문이다. 15명의 저자들은 ‘죽어가는 행성에서 에코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를 자처하며 지구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한다.
매년 증가세에 있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한국에서만 한해 1만 3천 명이 넘는다. 이는 매일 37명, 그러니까 3~40분마다 한 명씩 세상을 떠난다는 말이다. 매일, 아니 매시 매분 매초 누군가는 스스로 지구를 떠나고 있다. 가까운 사람의 위로도, 사회적 약속도, 복지도, 돈도, 떡볶이도 그들을 지구에 붙여둘 수 없다. 빈곤, 불안, 우울, 관계-직장-학업 스트레스, 사회적 압박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이들에게 자살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들의 희망을 앗아가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는 이들은 망가진 인류와 지구를 두고 화성으로 떠날 궁리를 하고 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없어서, 많은 사람들은 많아서 지구를 떠난다.
그뿐이랴? 비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대량 죽음들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다. 예방적 살처분 소식은 끊이지 않는다. 한두 명이 아니고 몇천 명의 축산 동물들이 산채로 파묻힌다. 무안공항 참사에 대한 대안으로 ‘철새들을 다 죽여버리자’ 해법을 제시하는 인간중심주의 세상은 이미 오래전에 유기자연물보다 인공물들이 더 많은 세상이 되었다. 콘크리트로 덮여가는 세상에서 더 이상 살아갈 곳이 없는 비인간 생명은 매일 136종씩 사라져 간다. 이 믿을 수 없는 숫자들은 지구에 사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알려준다. 이런 답이 없어 보이는 세상을 이 저자들은 떠나지 않고, 살리면서 살겠다고 한다. 그들은 어떻게 그런 마음을 낼 수 있는 걸까? 다르게 살아갈 방법을 알기라도 하는 걸까?
인류의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재난이 우리 앞에 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대안이 없는 시대라고, 불안과 절망, 무기력을 말한다. 그런데 ‘대안은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리아 미스, 반다나 시바, 베로니카 벤홀트-톰젠 같은 에코페미니스트들은 대안이 위기가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잉여가 아니라 필요의 세계로부터 온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 현명한 여성들은 한정된 자원을 지닌 지구에서 전지구적인 부자 되기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전략이며, 모든 것이 상품화된 세상에서 소비하는 자유만을 누리며 살아가는 출구 없는 삶에서 벗어날 길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돈을 위해 노동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생명과 삶을 위해 노동하고, 사치품을 사들이는 게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을 스스로 생산하는 삶이 있다고 말이다. (자급하는 삶과 몸의 기쁨_김혜련 96-7p)
지구에서 살아가는 것에 깊은 회의를 느끼며 머릿속이 인간이 도대체 뭔지, 세상은 뭔지, 왜 언제부터 이런 건지, 공허한 질문들로 가득 찰 때, 그저 살아가는 이들이 있었다. 땅과 서로에게 딱 달라붙어서. 이들은 조용한(비가시적인) 노동을 하며 스스로와, 지구-인간-생명 공동체를 살려왔다. 이들의 노동을 보이도록 하고, 가치를 부여하여 상품 생산 체제에서 삶 생산 노동의 체제로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이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다.
‘어쩌면 세계에는 희망이 있을지도 몰라.’
이들에 따르면 희망은(절망이 그러하듯) 늘 있어왔고,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저 그것을 보지 못하는 내가, 우리가 있을 뿐. 대규모 농업이 자본을 축적하고 표토를 갉아먹고 탄소를 배출하는 동안, 상품생산 경제 체제가 막대한 소비시장과 더불어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동안, 누군가는 전 세계 인구를 먹여 살리고, 바다와 강, 땅과 하늘, 동물과 식물들을 살려왔다. 노동청에도, GDP에도 잡히지 않는 노동을 하고 있는 이들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에코페미니스트’이다.
그래서 에코페미니즘의 자급적 관점은 경제활동의 목표를 ‘더 많은 상품과 화폐의 생산’이 아니라 ‘생명의 장초와 재창조’에 둔다. 자급적 관점은 인간과 비인간 세계의 상호존중과 협력 관계 및 참여적 풀뿌리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문제와 환경문제의 연결성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페미니스트 전략은 자신이 상아 가고 있는 지역의 사회경제체제부터 더욱 생태적인 방식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구체적인 실천 전략을 찾고 수행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 점차 지역과 국가의 제도적 변화를 위한 권리의 모색으로 확장할 수 있다. (땅에서 시작되는 여성소농운동 :김신효정 92p)
이 희망의 맛이 짜릿하고 명쾌하면 얼마나 좋을까! ‘스스로 생산하는 삶’은 명료하지만 간단하지만은 않다. (떠올리면 마음 한켠이 무거워지기까지 한다.) 지금 이 가부장-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전복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에코페미니즘적 내적 전환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일상 속 모든 것들과 치열한 싸움이 시작된다. 매일 먹는 음식들을부터 의심하게 되고, 매일 입는 옷, 내가 사는 집, 타고 다니는 교통수단, 돈벌이 수단이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스스로- 타자-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 말하기와 쓰기, 취미활동, 일상 속 대화까지도 어색하고 불편하다. 어떤 착취의 구조 속에서 나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점점 명료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은 나로 하여금 무기력에 젖어들도록 하기도 했다. 집 뒤에 작은 언덕에 올라 도시의 풍경을 보는 것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모든 것이 폭력으로 느껴졌다. 뭐가 문제였는지 조금이나마 명료하게 알게 된 것 만 같았는데, 이 거대 시스템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 거대함에 비하면 내 일상은 한없이 보잘것 없어질 따름이다. 슬픔, 분고, 고통과 우울, 무기력에 사로잡혀 시름시름 앓으면서 삶의 의욕이 꺼져가고 있는 나의 고통을 이 책에서는 ‘생태적 슬픔’이라고 명명한다.
인류의 다양한 생활방식과 생계 형태는 약탈적 자본주의의 파괴와 변형으로 단일화, 균질화되거나 사라져 갔다. 땅, 물, 공기와 다양한 생명체 종들의 사라짐에 대해, 앞으로 사라질 것에 대해 깊은 슬픔을 느끼고 있다. 애슐리 컨솔로와 캐런 랜드먼은 이런 슬픔을 생태적 슬픔이라고 명명한다. (…) 이런 정동을 통해서만 인류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 복잡한 관계의 실타래를 헤아리고, 상실한 것과 상실될 것에 대해 슬퍼하면서 위기 이후의 희망을 기획해 나갈 힘을 얻게 된다. (…) 생태적 슬픔은 피해자의 정서가 아니라 변혁자의 분노다. (우리는 우주로 떠나지 않는다. : 김현미 19-20p)
그들은 이 슬픔을 정면으로 긍정하며, 이 슬픔과 고통, 무기력이야말로 우리 스스로가 지구 생태계와 공명하는 증거라고 말한다. 이 슬픔 자체가 저항이자 대안이 된다는 것이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정의는 체제와 싸워서 이기라고 하지 않는다. 그 또한 근대적-남성적 관점이라고 이야기한다. 대신 ‘애도’하자고 이야기한다. 지금, 여기의 우리의 몸과 마음이 감각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나누자고.
나는 거대 시스템에 압도되어 그 안에서 나와 소외되고 있는 다른 존재들을 ‘작고 미약한 존재’로 여기며 그 소외에 동참하고 있었다. 나의 몸과 마음이 느끼고 있는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중요하고 큰지에 대해서 인식하지 않고, 너무 우울해서 집회에 나갈 수 없는 나, 오늘도 동물성 식품을 섭취한 나, 오늘의 살해를 막지 못한 나를 증오하고, 그렇게 내버려 둔 세상을 증오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에코페미니즘이 이야기하는 사는 이야기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피, 가해의 서사 속에서 일어나는 지독하고 난잡한 얽힘이라는 명료함 속 복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때로는 고통스럽고 어려운 얽힘망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엘러이모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에코페미니스트 윤리는 “우리가 누비고 지나가 얽힌 그망들을 풀어내는 것에 관한 것이며, 환경/자연-몸과 우리 몸들은 내부 작용하면서 공동 구성” 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월경을 통해 지구와 공생하기_이안소영 162p)
이 절망을 단숨에 베어버리고 나아가게 만들어줄 ‘데우스 엑스 마키나’따위는 없다는 것을 무척이나 명료하게 말해준다. 대신 우리의 철저하고 지독한 얽히망이 지구로부터 떼어낼 수 없는 끈적함을 선사해 줄 것임을 시사한다. 이 세상이 이상한 게 사실 맞았다고. 자연-인간 이분법 속에서 우리는 혐오, 차별, 억압, 착취의 굴레를 지속적으로, 다른 형태로 경험하고 있었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의심하며 하나씩 실타래를 풀어가지 않으면 ‘내부 작용 하면서 공동 구성’하는 사건을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모든 이야기들을 단순화 시키고 치열한 싸움대신에 손절만 남고, 대화대신에 혐오와 배제가 남은 지금의 가부장제-자본주의 사회의 흐름을 거스르는 이야기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감히 살아가고 싶다는 욕심을 내본다.
다시 말하지만, 에코페미니즘은 ‘그저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