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에서 살아가는 찢긴 나비
영화라는 매체를 참 좋아했던 적이 있다. 시네필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친구들과 영화 얘기 하면서 밤샐 수 있는 정도. 누군가 대화하다가 '어? 그 감독을 아세요?'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 그때 영화 문화는 외장하드에 불법 다운로드한 영화 파일을 가득 넣어놓고 서로 공유하는 것이었다. 외장하드의 크기나 개수가 그들이 영화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대변해주곤 했다. (내 하드는 고작 512기가였지만, 고등학교 때 시네필이었던 선생님은 1 테라짜리 외장하드라 여러 개였다고) 그런데 내가 영화랑 멀어진 몇 년 사이에 나도 세상도 너무 변해버리고 말았다. 이제 OTT에 없는 영화들은 볼 수 없는 영화가 되었다. 공짜(?) 아니지만 공짜인 영화가 이렇게 많다. 이렇게 많아서 영화를 고르다가 영화를 못 보게 되기도 하다. 그리고 나도 30분이 넘어가는 영화에 집중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것이다. 영화보다는 시리즈물이 성행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끈질기지 못한 지 좀처럼 시리즈 물에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영화. 올해, 참을 수 없는 무기력감과 무료함으로 영화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오기 전에 사이파이 소설과 몇 가지 드라마 시리즈, 애니메이션을 경유했다. 그런데 혼자 집에서는 도통 영화를 끝맺을 수가 없었다. 중간에 멈추고 딴짓을 하거나, 핸드폰을 하거나 등.. 나의 뇌가 숏폼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 틀림없다. 슬프고 억울(?)했다. 그러나 정말 다행이고 누군가랑 같이 보거나, 영화관에 가게 되면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었다. (때로는 핸드폰을 켜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지만) 그렇게 영화를 조금씩 다시 보게 되니 영화를 한참 좋아했던 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올라왔다.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기뻤다. 우선 시간이 잘 갔다. 러닝타임이 긴 영화일수록, 집중이 잘 되는 스펙터클한 영화일수록 좋았다. 오늘 하루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을 영화라도 봤다는 안도감으로 바꿀 수 있었고,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을 때까지 주어진 긴 시간을 자버리거나 하면서 허무하게 소진하지 않을 수 있었다.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는 친구가 추천해 준 영화이다. 무슨 영화인지 알고 추천해 준 것은 아니고, 또 무료하게 오후를 보낼 나를 위해서 시간에 맞는 영화를 찾다가 그나마 볼만해 보여서 추천한 것일 것이다. 러브레터의 이와이슌지 감독의 영화라고. 러브레터는 분명 재밌게 본 게 맞는데, 왠지 지금같이 우울한 다크 모드일 때 보고 싶은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영화에 대한 정보는 없는 채로 보러 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 서론이 길었다. (언제나 서론이 본론보다 길다;) 그렇게 만나게 된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는 2025년의 영화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너무나 소중한 영화가 되었다! 키치하고 음울한 분위기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주는 소소하고도 다정한 위로들이 그날의 권태를 녹였다. 살랑거리는 마음을 가지고 돌아와 사운드트랙을 듣고 또 들었다.
이 글에서는 미진하게나마 스왈로우테일 안에서의 가장 매력적이었던 부분을 "폐허 속에서의 연대"라는 주제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영화의 배경은 가상의 빈민가 "옌타운"이다. 무국적 다국적 옌타운 주민들은 격멸적인 뜻으로 '옌타운'이라고 불린다. 이곳에서 매춘을 하는 여성의 이름 없는 딸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채 팔리고 또 팔려 매춘소로 끌려가게 되고, 그곳에서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런 그를 거기로 데려다 놓은 매춘부 '그리코'는, 갑자기 변덕을 부려 그 여성에게 매춘이 아닌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면서 일자리를 찾아 야매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는 페이홍과 랑에게 데려간다. 일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들은 피가 섞이지 않은 가족이 되어간다.
이들이 앞으로 연루될 수많은 사건들.. 살인, 시체 유기, 위조지폐, 명의도용 등 수많은 사회에서 범죄라 규정된 일들이다. 그러나 법도 나라도 없는 옌타운에서는 어쩌면 일상인 일들이다. 일반 영화에서였다면 하나하나가 소재였을 사건들이 그저 스쳐 지나간다. 그들의 행위의 목적은 흔한 범죄의 목적- 부나 권력, 사랑 따위-이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늘 하루의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춤과 음악, 그리고 복잡하지 않은 매일일 따름이다. 그렇기에 일상과도 같은 사건들은 평범한 하루처럼 지나갈 뿐이다.
등장인물들은 옌타운 밖 사람들이 이해하기 못할 선택을 해버린다. 기껏 모은 돈으로 더 많은 돈을 만들어 편한 삶을 살면 좋겠다는 생각은 나의 생각일 뿐. 그들은 옌타운을 떠날 생각이 없다. 대신에 그리코가 마음껏 노래할 수 있는 라이브 클럽을 열어버린다. 라이브 클럽은 망하지만, 훗날 아게하는 다시 한번 지폐를 위조하여 라이브 클럽을 살리려고 한다. 그들은 옌타운의 더러운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강렬하게 갈망하지도 않는다. 대단한 꿈을 이루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 폐허가 기존값인 삶의 조건 안에서 그저 지금의 일상이 더 파괴되지 않기를 바라고, 서로의 삶을 계속 목격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것은 내 삶에 대한 사랑이며, 내 옆에 있는 이들에 대한 존경이다. 그들은 그들의 삶의 조건이 최악일지라도 멸시하지도, 조롱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다른 삶의 경로로 떠나가버린 인물은 단 한 명, 그리코다. 그는 라이브클럽에서 노래하면서 잠시 유명세를 타지만, 매춘부로 일했던 경력이 문제가 되고, 페이홍의 사건 때문에 옌타운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그런 삶의 선택이 패배주의로 보이지 않는다. 돌아온 그리코는 오히려 안전하고 편안한 곳으로 왔다는 듯이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경험한 삶의 다양성이 더 넓었다면, 그들은 빈민가의 경험들을 완벽하게 지울 수 있었다면, 과연 그들의 삶의 선택은 어떻게 달려졌을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가 느낀 것은 자기애와 우정, 사랑과 같은 감정들이다.
우리가 지금의 삶을 유지하는 대가로 얻은 것들 - 안전, 편안함, 명예, 부-와 바꿔야 했던 -자기애,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시간, 멍 때리는 시간-들의 가치는 바꿀 만한 거인가? 아니, 그전에 정말로 안전이나 편안함 같은 것들이 실제 하긴 하는가? 세탁기가 생겨서 집안일 시간이 줄은 것 같은 감각이나 자동차가 생겨서 이동하는 시간이 짧아진 것 같은 감각이 사실은 착시이라는 연구가 있다.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 풍요로운 삶이 저당 잡히는 이 모순적인 상황에서, 그들은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딱히 결론도 결말도 없는 스토리라인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은 가난의 전시도 아니고, 가난의 극복 서사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거기에서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언제까지고.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무수한 소동들과 함께 일어날 것이다. 그 소동들이 그려내는 것은 삶을 향한 지극한 긍정과 사랑, 우정이다. 그 삶은 언제나 여느 삶들과 마찬가지고 어떤 해로움, 그리고 어떤 반짝임을 가지고 있을 테다. 영화는 그 두 가지를 분명하게 조명한다. 반짝임에 대해서 영화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감각으로, 그러니까 영상미, 음악과의 조화, 대사, 배우들의 연기를 조합해 최상의 결과물로 보여주면서. 그러나 한편으로 빈민가가 가지고 있는 절망과 고독에 대해서 조망하는 것도 놓치지 않는다.
이것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아게하가 타투를 하기 위해서 빈민가 안에서의 빈민가, 음지 중에서도 음지인 건물 속으로 들어가는 부분에 있다. 지금까지 보여준 아게하와 페이홍, 그리코의 삶에도 죽음의 색은 짙었다. 그러나 그 건물 속은 그야말로 상실된 생명이다. 시체 더미가 쌓여있고, 마약에 절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 교육도 돌봄도 받지 못한 어린아이들의 시선 속을 보여준다. 거기에서 우리의 가난과 폭력에 대한 상상력이 얼마나 빈곤한지 알 수 있게 된다. 그 장면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이 영화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빈민가의 삶에 대한 낭만화 혹은 낙관주의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영화는 한참 그들의 삶의 아름다움에 빠져있을 우리에게 충격을 안겨주며 이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단지 아름다운 음악과 어려운 삶 속에서의 아름다운 만남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코가 노래하는 장면, 아게하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장면이나 아게하가 그리코를 따라서 타투를 하는 장면, 나비를 쫒는 장면.. 등 표현력 넘치는 장면들이 정말 많다. 96년도 영화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리고 캐릭터, 무표정하고 무뚝뚝하지만 다정히 넘치는 아게하나, 사랑스럽고 바보 같지만 한편으로 모두를 돌보는 그리코, 그런 그리코를 사랑하는 페이홍 (그러나 그들은 독점연애를 하지 않는다.), 해결사 랑과 그의 동료 킬러, 그리고 영화에서 가장 큰 적이지만 또 그 명성에 비해서 큰 활약도 하지 못하는 류량키까지 캐릭터들의 매력도 엄청나다. 이것에 대해서 길게 언급하는 것은 사족이다. 말해 뭐 해! 영화의 긴 러닝타임이 무색하게 나는 이들을 더 보고 싶었고, 이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이 글을 쓰면서 시리즈 물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