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몽살구클럽> 리뷰

by 샴스 Shams

*자살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음을 미리 알립니다. 저의 이야기가 독자의 안전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외로움. 어떤 괴로움. 어떤 아픔들은 나눈다고 해서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는 생물이 아니던가. '자몽살구클럽'은 홀로 아픈 시기를 지나가고 있는 이들이 한 번쯤 꿈꾸었을만한 갑작스럽고도 우연히 다가오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다. 이것은 이 실제이고 환상이며, 소설이고 음악이며, 죽음이고 삶이며, 타인이고 자신이다.


싱어송라이터 '한로로'의 첫 소설 <자몽살구클럽>을 만났다. 자몽살구클럽이라는 낯선 조합의 단어는 동명의 EP로도 잘 알려져 있다. 작년 7월에 발간되었으니 이제 막 반년을 넘은 아직 온기가 채 식지 않은 신간이다. 나로서는 아무래도 음악을 들을 기회가 먼저 있었는데, 최근 한로로에 입덕한 지인 덕분에 책도 읽게 되었다.


이 꿈같지만 현실이면서도 또 비현실을 품고 있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후술 하겠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한 학교이다. 그리고 청소년 여성 4명이 주요하게 이야기를 가져간다. 보현, 태수, 유민, 소희. 나처럼 갓 책을 다 읽은 사람은 이 네 명의 이름을 잊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무거운 삶의 이야기를 한명식 풀어나가기 위해서 한 챕터씩을 할애하고 있다.


9791199305304.jpg 출처 _ 교보문고


(이하 이 책의 주요 줄거리, 그리고 핵심적인 스토리라인에 대한 개인적인 소감이 담겨있습니다. 책에 대한 스포를 원치 않는 사람은, 나중에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꿈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의 첫 장면. 티켓을 품고 있는 이상한 포스터는 소하가 집자 찢어지고, 다음날 홀연히 사라진다. 왜 홀연히 사라진 지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소설에서 설명되지만, 이 장면을 보며 티켓을 받은 소하는 마치 꿈을 꾼 듯, 귀신에 홀린 듯 '자몽살구클럽'에 빠져든다. 익숙함을 넘어서 고루함 혹은 권태로움이라고 해도 무색하지 않은 학교라는 장소에서 만나는 신비롭고 이상한 경험과 그로 인해 만나는 새롭고 낯선 모험. 이러한 시작은 많은 이야기들이 차용하는 클래식한 오프닝이다. 소하는 앨리스가 회중시계를 든 토끼를 보고 굴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자몽살구클럽의 포스터를 보고 음악실로 향한다.


여기서부터 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만한 일들이 소하에게 펼쳐진다. 우울하고 외로운, 누군가에게 행여나 들킬까 조용히 지내고 있는, 책 속 표현으로는 '개찐따' 소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말이다. 학생회장인 태수와 그의 절친 유민, 그리고 보현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들은 편견도 질문도 없이 그저 소하를 환영해 준다. 설명하지 않아도 나의 '죽고 싶지만 살고 싶음'을 이해받는다. 그들은 음악실, 소각장, 풀숲과 옥상을 오가며 우정과 연대를 쌓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또 이 미친 세상에서 죽고 싶을 때 나를 붙잡을 수 있는 기억이 된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이야기다.

뉴스에서는 연일 연예인들의 자살 이야기가 대두되지만, 일반인들의 자살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살률은 더 이상 뉴스가 되지 않는 것이다. 하루평균 4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10대부터 40대까지 사망률 1위가 자살이다. 아니, 그다음으로 많이 죽는 이유인 암이나 심장질환에 대해서는 신약을 개발하고, 국민건강보험도 되고, 사설 보험상품도 수만 개인데. 대제 왜 자살을 향해서는 이렇게 외면하는가?


다른 한편 소설에서 보여준 것처럼 '자살'은 일종의 밈이기도 하다. 예은이가 입에 자살을 달고 다니는 모습은 현실 세계의 일과 동떨어져있지 않다. 이미 관용어구로 자리 잡은 '자살각'이나 유행처럼 퍼져나가는 자해문화도 그러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답답함 속에서 '이번 생을 망했다'며 2회 차 3회 차 인생을 바란다.


훌쩍 다가와 매일 코끝에 맺히지만, 이렇다 할 방법도 없는 데다가, 사실 그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이나 조망조차 없는 상황. 그것이 지금 2026년의 현실이다. 최근에 본 다큐멘터리 영화 "자살시도 두 시간 전 담배 피우는 영상"도 이런 현상을 다루고 있다. 자살시도를 한 지윤은 죽기로 마음먹은 날 찍은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그런데 이것이 알고리즘을 타버려서 200만 뷰에 몇천 개의 덧글이 달리고 말았다. 그리고 댓글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도 없는 지윤에게 "삼가고인의 명복을 빈다"던가, 아니면 "죽을힘으로 살지 그랬냐, 잘 죽었다"와 같은 악담을 하고, 성희롱과 욕설을 내뱉는다. 이후 지윤은 악플러들을 추적함과 동시에 자신과 연대하는 또래 여성들과 함께 죽음에 대해서 성찰하며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이 영화가 좋았던 이유 중에 하나는 끝까지 지윤이 왜 죽고 싶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에 사회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죽음들을 파해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반대로 보현, 태수, 유민, 소하는 각각 죽어야 하는 불행한 사연들이 있다. 보현은 어머니가 아프고 동생을 돌봐야 하는 상태로 꿈을 포기해야 하고, 태수는 폭력적인 어머니 아래에서 살고 있고, 유민은 사랑하는 태수가 그렇게 불행하게 말라가는 것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소하는 엄마에게 버림받고 아빠로부터 심각한 가정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상황들은 무척 극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언제나 현실은 픽션보다 더 극적이다. 하지만 이 상황들이 마치 '자살하고 싶어지는 이유'처럼 그려지는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컸다.


자살은 어디에나 있다. 극단적 삶의 조건이 없더라도 무기력과 우울을 경험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희망을 가지기 어렵고, 자신의 삶을 잃어버리도록 만들어진 위태로운 삶의 조건은 일부의 특권층을 제외하고는 적용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다 가질 수 있는데 찾아오는 무기력이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을 이 이야기는 간과한다. 불행을 놓고 자살을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상투적임과 동시에 납작하다. 하지만 자살을 놓고 불행을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훨씬 더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비현실에 대해서.

마지막으로는 이 소설을 읽으며 픽션으로서의 면모를 더 짚어보고자 한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결국 '소하'를 중심으로 보현, 태수, 유민의 성장 서사라고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로로라는 뮤지션의 첫 소설, 그것도 장편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민망하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책장을 넘길수록 의아하거나 궁금한 점들이 생겨났다.


첫 번째. '태수'의 죽음에 관하여

태수의 죽음은 자몽살구클럽의 일종의 실패담이기도 하다. 서로를 통해서 서로를 살릴 수 없다는 한계에 대해서 마주한 자몽살구클럽은 절망한다. 이야기가 아무도 죽지 않는 해피엔딩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약간은 현실과 동떨어진 동화 같은 측면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실패담이 써내려 져 감으로써 이야기는 완성된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도 다른 멤버들을 위해 정성스러운 편지를 써놓는 태수가, 그러니까 타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온 마음을 다했던 태수가 자기 자신만큼은 살릴 수 없을 만큼 긴 우물에 빠져있었던 것에 대한 이야기가 충분하게 펼쳐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자몽살구클럽을 창단을 할 정도로 살고 싶었고 살리고 싶었던 태수가 그럼에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 부분이 생략됨으로써 나는 머릿속에서 태수는 이 클럽 멤버들 중 한 명이 반드시 죽어야 해서 죽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만들어냈다. (물론 이 의심은 틀릴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후 태수의 죽은 장면은 자세하게 묘사되는 부분이 불편했다. 서사를 빼고 장면만 남았다.


둘째, 결말 대해서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소설은 이를테면 청소년 성장 소설이다. 특히 연대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 다루는. 그렇기에 마지막 부분은 당혹스러움을 넘어서 약간의 배신감 마저 선사하는 듯하다. 소하는 자신의 디데이를 앞두고 아빠에 분노가 커졌고, 아버지의 심각한 폭력을 경험하고 충동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하는데 이른다. 앞선 보현, 태수, 유민의 자리에서 나오지 않았던 '불행한 상황'을 바꾸고자 하는 살고 싶다는 간절한 외침과 그 속에서 탄생한 주체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대항폭력'이라는 말이 한국사회에서는 널리 알려진 말은 아니지만, 작년 9월 "60년 만의 미투, 최말자 사건"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는 일도 있었다. (최말자 님은 성폭행을 가하려는 상대를 대상의 혀를 깨물어 절단시켰다는 이유로 상해죄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미투운동을 보고 감명받아 재심신청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폭력이 일어난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정당방위'는 비교적 인정받는 한편에, 지속적이고 구조적으로 발행하는 폭력을 향한 대항폭력은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한다거나 '다른 선택지도 있었다'는 이유를 들며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사회적 통념과는 달리 대항폭력은 구조를 변화시킬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한 피해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이며, 비로소 대등한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는 필수적인 조건이다.


소하의 아버지를 향한 분노는 정당했으며, 지속적으로 일어났으며 구조적으로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났던 대항폭력 또한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의아함을 자극한 것은 이것이 결말지점이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이자 핵심인 따스한 연대와 우정은 마지막을 폭력에 대한 분노와 저항, 조현증적인 외침으로 마무리되면서 흩어져버린다.


만약에 이야기가 소하의 상황을 들은 멤버들이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기발한 방식으로 대항폭력을 함께 조직하는 것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소하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의 대처방안을 함께 모색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면? (뻔한가.. 나의 상상력도 여기까지가 전부일뿐..) 최종적인 순간, 가장 외롭고도 두려운 순간에 결국 소하는 혼자 남음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통과하거나 뚫어내지 못한 혼란 속에서 마무리되며 그간의 이야기가 쌓아 올렸던 온기가 식어버린다.



그런 여러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주고 싶었던 메시지를 기억하고 싶다. 살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죽고 싶지도 않은 모두에게 자몽살구클럽이 있기를, 하는 바람말이다. 이 비참한 세계에서 우리의 손으로 유일하게 바꿀 수 있는 삶의 조건이 있다면 그것을 서로를 믿어주는, 단 한 존재가 되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찰나가 될 수도 있고,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는 죽어가는 누군가를 살리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나도 오글거리지만 자몽살구클럽의 시그니처 합창으로 마무리 한다.


살구 싶다,

살구 싶다,

살구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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