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편
놀기 좋아하던 뺀질이 수험생 팔레오는 턱걸이로 겨우 대학에 합격했다.
입학식 전, 신입생 간담회가 있다고 해서 학교 구경도 제대로 할 겸 참석을 했다. 그런데 간담회는 뭔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고 듣는 자리가 아니었나? 헌데 초등학생도 X팔려서 안 할 동요에다 율동, 게임, 퀴즈 맞히기 같은 유치 찬란한 짓만 줄창 시키며 즐거워 하는 게 아닌가? '혹시 여기 무슨 사이비종교나 사이코패스 집단인가?'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나는 그때까지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게 율동과 춤이었다. 가오가 상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팔다리 뼉다구 마디마다 본드질이라도 한 듯 내 몸은 뻣뻣했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자체부터 고문이었다. 007게임은 물론 난생처음 보는 희한한 게임에 강제 투입되었다. 룰을 잘 이해 못 한 탓에 걸려서 끌려 나와 벌칙으로 노래를 부르기까지 했다. 하아~ 이불킥 X 100
영겁의 악몽과도 같던 시간이 끝나고 나서 모두는 뒤풀이로 인근 술집을 향했다.
이날 처음 만난 선배들은 세상 천사 같은 얼굴로 반갑다며 돌아가면서 술을 권했다. 잔이 마를 틈이 없었다. 이때 눈치를 채야했다. 이건 애들 장난 같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또한 이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라 지옥에서 기어나온 술귀신들이라는 것을...
수강신청일, 입학식, 개강식은 말할 것도 없고 누구누구 생일 등등 모였다 하면 무조건 술집행이었다. 특히 신입생 환영회는 그 정점이었다. 신입생 동기들끼리 '컨디션'을 미리 마시면서 '우리 살아서 다시 만나자'고 파이팅을 외쳤다.
곧이어 냉면 사발에 소주 2병을 부어 한방에 마시는 신고식샷! 이후에 우정샷! 러브샷! 병나발샷! 쏘맥샷! 파도타기샷! 네버엔딩샷! 이 이어졌다.
몇백 ml 숙취해소 약물 따위의 힘으로는 무한리필로 쏟아지는 술의 총탄을 도저히 막아낼 수 없었다. 결국 여기저기서 신입생 전사자들이 속출했다. 이날 어떻게 내가 집에 돌아왔는지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눈을 떠보니 집이었다. 이때 난생처음 알코올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순간이동의 신세계를 경험했다.
나를 포함해 신입생들은 처음에 선배들을 원망했지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완벽하게 선배들과 똑같은 술귀신으로 변모했다. 아니 오히려 한 차원 더 진화했다. 낮이든 밤이든 학교광장, 잔디밭, 벤치, 팔각정, 친구들과 술만 있다면 언제 어디든 좋았다. 공부는 뒷전이고 학교는 그야말로 술을 마시러 오는 곳이었다.
대학수업은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고등학교 때보다 나은 점이 하나 있다면 맴매는 맞지 않는다는 정도? 특히 쉬지도 않고 진행하는 3학점 3시간짜리 필수교양과목은 재미없음을 넘어 나의 온몸을 비틀다 못해 꽈배기로 만들었고 입에서는 게거품까지 뽀글거리게 만들 지경이었다. 나는 이 고문에서 벗어날 해법을 찾아야만 했다.
팔레오왈 "형, 졸려서 죽을 거 같아요. 방법이 없을까요?"
복학생왈 "기본 출석일수는 채워야 하니까 출석만 하고 째면 돼! 족보 있으니 그때 가서 벼락치기하면 되고"
팔레오왈 "중간에 교수님이 누가 도망쳤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복학생왈 "교양수업 100명 훨씬 넘는데 괜찮아, 우리과 교수님도 아닌데 얼굴 기억 못 해"
팔레오왈 "우와~ 굿아이디어네요. 신난다~^^"
이후 출석 체크할 때 내 이름이 불리고 나면 징검다리 건너뛰듯 슬쩍슬쩍 출입문쪽 빈자리로 이동해 뒷문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럼 그렇게 주어진 소중한 자유시간에 무엇을 했을까? 강의실을 함께 탈출한 동지들과 당연히 술집행~ 그것도 대낮부터 말이다.
수십 명이 떼로 도망쳐 낮부터 저녁까지 한 술집에 모여 전세라도 낸 듯 부어라 마셔라, 웃고 떠들고 노래했다. 주위의 다른 손님들이 더러 있다 해도 전혀 안중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었다. 우린 이 술집 골목을 '파전 골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파전을 팔아서? 아니다. 길바닥에 항상 많은 파전이 달라붙어있기 때문이었다. 술귀신이 만들어 놓은 이 파전들은 비둘기들이 즐겨찾는 양식이 되곤 했다. '구구구구'소리를 내며 파전을 쪼아먹는 광경은 자연과의 친환경적 공존을 연상케했다.
관찰하기를 좋아했던 나는 그 파전들을 보며 생산자가 무엇을 어떻게 먹었는지를 추론하기도 했다. 건더기양에 비해 묽은 것은 안주섭취에 소홀했던 탓일 테고, 라면가닥과 쏘세지 파편이 보일 경우 라면사리가 들어간 부대찌개를 먹었음을 짐작했다. 파전의 크기가 작은 경우, 다른 곳에서부터 여러 차례 파전을 만들다 여기서 재료가 떨어졌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파전의 재료와 색깔을 근거로 추적하면 생산자의 이동 경로와 방향까지도 유추가 가능했다.
어쨌든 이러한 나날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 술귀신들은 저마다 가진 독특한 캐릭터성을 자연스레 발현하기 시작했다. 말이 거칠어지는 귀신, 헤벨레 웃기만 하는 귀신, 우는 귀신, 혼잣말하는 귀신, 수다가 심해지는 귀신, 잠자는 귀신, 노래하는 귀신, 파전 만드는 귀신, 고백공격하는 귀신 등 다양하게 분화되었다.
반면에 여학생들은 알코올 저항성이 낮아 몸을 사리는 탓에 대부분 술귀신이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파도타기샷을 하면 마시는 척 입에 머금었다가 눈치 봐서 바닥에 종종 뱉곤 했다. 언젠가 술집에서 옆에 있던 동기 김00이가 물을 마시고는 "와~ 신기하게 이 집 물에선 술맛이 나네."라고 말했는데 이에 나는 "물이 변해 포도주 만드는 소리 하고 있네, 이리 줘 봐"하고 마셨더니 진짜 술맛이 났다. 신기해서 몇 모금 더 들이켰는데, 그 옆에 있던 여학생 이00은 그걸 보더니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 그거 내가 아까 술 뱉은 건데?"
이날 이때까지 여자 손목 한번 잡아 본 적 없는 순수 그 자체였던 팔레오는 알코올이 혼합된 여자의 아밀레이스를 처음으로 섭취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아~ 미래의 마누라 미안해!
장난기가 많았던 나는, 한 번은 같은 과 여학생을 마음에 두고 있는 동기 박00을 곯려주려는 생각으로 맥주잔에 소주를 넘치도록 부어주며 "걔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나한테 보여줘, 내가 걔랑 친한 거 알지? 다리 놔줄게, 자~ 사랑하는 만큼 마셔!"라고 슬슬 미끼를 던졌다. 나는 장난이었는데 녀석은 진심 어린 눈빛으로 그럼 "아유~ 당근 완샷이지"하며 마셨다. 이걸 한 시간 동안 10번쯤 했던 것 같다. 부지불식간에 박00은 쿵하며 탁자에 머리를 박았다. 벌을 받은 걸까? 다른 동기와 떠들고 있는데 내 허벅지가 갑자기 뜨거워졌다. 보니 탁자에 머리를 박은채 박00 입에서 마셨던 술과 음식이 용암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던 것이었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과에서 2명의 여학생과 늘 함께 붙어 다니는 장00이라는 남학생이 있었다. 아마도 셋이 같은 동네에 살아서 같은 방향으로 집에 자주 가다 보니 친해졌으리라. 어느 날 내가 장00에게 "야, 너 혼자 2명 다 사귀면 어떡해? 한 명은 나한테 양보해라. 오늘 술 마시고 먼저 쓰러지면 지는 거다. OK?"라고 슬슬 속을 긁었더니, 진심으로 알고 승부를 받아주는 게 아닌가? 한 잔 두 잔 끝없이 술잔이 오가다 소주 너댓 병쯤 마셨을 때 의식을 잃고 나가떨어졌다. 누가? 당근 장00이었다. 뻗어서 실려나가는 모습을 보고 키득거렸지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또 순간이동을 했다.
눈을 떠보니 낯선 방이었다. '여긴 대체 어디일까?' 나는 그대로 누워있는데 공간은 끝없이 뱅글뱅글 3축으로 회전운동을 했다.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속은 참지 못할 정도로 울렁거리고 뒤틀렸다. 그때 만약 바로 옆에 안락사 버튼이 있었다면 주저하지 않고 눌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동기 김00이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학교 수업 끝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어제 내가 취해서 자기 하숙방에 데리고 왔다고... 그리고는 컨디션 한 병을 내게 내밀었다.
일주일 후 나는 이 천사 같은 김00에게 미안하고 고마워서 인근 슈퍼마켓에서 참치캔과 음료수, 과자 몇 봉지를 사서 찾아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꽤 시간이 지나자 밖이 시끄러워졌다. 이윽고 뭔가를 떨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미닫이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HP가 바닥난 술귀신을 여러 명이 들쳐업고 문 앞에 떨군 소리였던 것이다. 잠시 후 방안에는 의식불명 술귀신과 말이 없는 김00, 무안한 표정의 팔레오가 앉아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또 다른 술귀신 하나가 더 실려왔다. 서너 평짜리 하숙방이 비좁아져 "그럼 난 갈게"라고 말하며 머쓱한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때의 하숙방 천사 김00의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다. 내가 스타트를 끊고 난 이후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그 하숙방은 술귀신들의 재충전을 위한 힐링 쉼터이자 맛집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브레이크 박살난 폭주기관차처럼 질주하던 술생활은 입대하면서 일단락되었다. 군대에 가서 순수함을 잃고 흑화 되었으나 군생활 중 유일한 의의를 꼽는다면 그것은 바로 술귀신에서 벗어나 그나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음 그런 줄 알았다. 휴가를 나오기 전까지는... 첫 휴가를 나와 집으로 가려다 이른 시간에 집에 아무도 없을 듯 해, 군복을 입은 채로 학교로 향했다. 낮부터 교문 주변에 널브러진 익숙한 파전과 비둘기, 비틀거리는 학생들이 보이자 화색이 돌았다. '그렇지, 이게 바로 우리 학교지.' 난 마치 고향에라도 온 듯 마음이 푸근해졌다.
과방에 들어가니 지평좌표계에 잘 고정한 지박령 술귀신들이 반갑다며 난리가 났다. 오늘 집에 갈 생각 말라며 바로 술집으로 이동해 거하게 술잔치가 벌어졌다. 물론 이날도 순간이동을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진작에 블랙아웃이 와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아 생생하게 전하지 못함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한다.
- 하편(MT편)에 계속 -
P.S : 이 글은 혈중 알코올농도 0.125%의 만취상태에서 작성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