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 갔다 왔어!

Bonjour~

by 팔레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가 프랑스어였다. 영어도 공부하기 짜치는데 발음도 이상하고 웃긴 프랑스어까지 배운다니 무척 부담스러웠다. 명사에 성별이 있어 남성명사와 여성명사를 구분해 외워야 하고, 관사와 형용사도 그 성에 따라 형태가 변하고, 동사는 주어에 따라 달라지고, 글자에 여러 기호도 붙는 등 영어 싸대기를 후려갈길 만큼 프랑스어는 심히 패악스러웠다. 그러나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과목이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언젠가 FM 라디오에서 노래를 들었는데, 너무 좋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가수의 목소리도 어찌 그리 예쁘던지. 라디오 DJ는 '땅바빠'라는 제목의 샹송이라고 소개했다.


'땅바빠? 무슨 뜻이지?'


전혀 감도 오지 않는 말이었다. 프랑스어 사전을 꺼내 발음상 비슷한 것을 찾아보았지만 철자를 모르니 알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날 이후로 이 노래와 가수에 대해 알아내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지금처럼 인터넷도 없고(사실 인터넷은 있었으나 이를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챗지피티 같은 건 더더욱 없었던 때였으니 어려움이 컸다. 웃긴 건 프랑스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관련된 여러 정보까지 뒤지다 보니 부지불식간에 프랑스에 대해 많은 공부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마치 도사 밑에 제자로 들어가 빨래 설거지만 뒤지게 하다 보니 저절로 내공이 쌓여 무술 고수가 되어있었다와 같은 그런?


누가 시키지도 않은 뜻밖의 선행학습을 하다 보니 따로 프랑스어 시험공부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프랑스문화원이 주최하는 프랑스어 경시대회가 열렸는데 모두 참여하는 것은 아니고 상위권 성적이거나 프랑스어 시험 우수자 정도만 한 교실에 모여 시험을 치렀다. 시험지는 프랑스문화원에서 만들고 전국의 프랑스어를 선택한 고등학교에 배부되어 치러진 다음 취합하여 1, 2, 3등을 선발한다고 했다. 입상자는 일주일간 프랑스 여행을 보내준다나?


시험지는 질문까지도 모두 프랑스어였으나 질문 자체는 단순해 괜찮았는데, 문제는 프랑스어 실력을 보는 게 아니라 프랑스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를 주로 묻는다는 것이었다. 이걸 시험지를 받기 전까지 전혀 알지 못했다. 객관식과 주관식이 섞여있었는데 객관식이야 찍으면 되는데 주관식은 프랑스어로 답해야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문제들을 떠올려보면,

이브 뒤떼이(Yves Duteil)의 직업은 무엇인지 답하라. -> Chanteur(가수)

미셸 플라티니(Michel Platini)의 직업은 무엇인지 답하라. -> Footballeur(축구선수)

프랑스혁명의 3대 정신은 무엇인가? ->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자유, 평등, 박애)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다음 대통령은 누구인가? -> Georges Pompidou(조르주 퐁피두)

나폴레옹(Napoléon)은 엘바(Elba) 섬에서 죽었다. O X -> Saint Helena(생 엘레나) 섬

다음 그림(농장 풍경)에서 'P'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아는 대로 찾아 쓰시오.

프랑스 국가(노래)의 제목을 쓰시오. -> La Marseillaise(라 마르세예즈)

등등...


시험 내용이 의외였으나 모르는 거 빼고 최대한 아는 대로 치렀다. 얼마 후 프랑스어 선생님이 나를 불러 네가 학교 1등이라고 알려주며 "너 프랑스 가는 거 아니야?"라고 바람을 넣어주었다. 하지만 나는 전국의 쟁쟁한 고수들이 있을 테니 언감생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당연히 결과도 낙방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프랑스문화원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고, 누구나 방문해 프랑스 영화도 보고 프랑스 잡지나 신문, 책도 볼 수 있는 문화공간이자 쉼터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종로구 사간동 프랑스문화원

얼마 후 프랑스문화원을 찾아갔다. 경복궁 오른쪽 길 건너편 작고 아담한 3층짜리 흰색 건물이었다. 서울 한복판임에도 프랑스문화원 주변은 한적했다.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청와대가 있기에 무전기를 찬 사복경찰들만 주로 보일 뿐이었다.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프랑스 삼색기가 걸려 나부끼고, 입구엔 '주한 불란서 문화원'과 'Alliance Française Corée'라는 글자가 병기되어 있었다. 1층에서 지하로 이어지는 공간은 상시 영화가 상영되었고, 2층은 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3층은 갈 수 없었는데 아마도 프랑스 문화원 관계자가 사용하는 곳이었던 듯했다.


2001년에 이 프랑스문화원은 다른 곳으로 이전했지만 이 사간동 프랑스문화원은 특히 70~80년대 영화검열이 극심하던 시기 우리나라의 검열을 받지 않는 영상문화의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때문에 영화감독을 꿈꾸는 청년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했다. 봉준호, 박찬욱 감독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이곳에서 운영하는 극장은 '살 드 르누아르(Salle de Renoir)'로 화가의 이름을 따 '르누와르의 방'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 개봉관이 4,000~5,000원 정도였던 때 르느와르의 방은 단돈 500원이었다. 부담 없는 가격에 난 영화를 보기로 했다. 프랑스어에 영어 자막이 나왔다. 예술 영화 비슷한 장르 같았는데 내용을 이해하기도 어렵고 지루해서 지금은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노출씬이 종종 나왔는데 그 수위가 매우 높았다. 순진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주위를 곁눈질하며 눈치를 살폈다. 눈알 굴러가는 소리와 침을 삼키는 소리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문화 충격이었다. 검열 없는 선진국의 영화란 이런 것이구나를 생생하게 깨달았다.


나중에 프랑스어 선생님에게 문화원에 가서 영화를 본 적이 있다고 하니 깜짝 놀라며 "뭐? 거기 미성년자 못 가는데? 어떻게 들어갔어? 아직은 안돼"라고 말했다. 문화원 직원이 보기에 아마도 내가 겉늙어 보였거나, '설마 고등학생이 여길 오겠어?'라고 생각해 들여보낸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금단의 장소였다는 걸 알게 되자 더욱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노출씬 같은 거 보고 싶어 그런 마음이 생긴 건 아니라고 믿는다. 아마도?


다시 '땅바빠'로 돌아가보자.

결국 그 노래는 영화 '내 인생의 여인(La femme de ma vie)'에 나오는 '엘자 륑기니(Elsa lunghini)'라는 배우 겸 가수가 부른 <T'en va pas> 라는 걸 알아낼 수 있었다.



이 영화가 궁금했고, 엘자를 보고 싶었다. 주말의 명화에서 가끔 프랑스 영화를 보여주었기에 혹시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보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엘자의 노래는 나중에 라디오에서 또 나왔을 때 카세트테이프로 녹음을 했고, 내 재산목록 제1호인 워크맨에서 수백 번도 넘게 반복되었다. 다른 가수들의 샹송까지 닥치는 대로 들으며 나는 점점 샹송 마니아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신문 TV편성표 옆에 프랑스문화원 상영작도 가끔 붙어있기도 했는데 'La femme de ma vie' 자그마한 글씨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깜짝 놀라 상영 시간을 자세히 보니 평일 저녁 7시였다. 순간 절망감이 밀려왔다. 밤 10시까지 꼼짝없이 강제 자율학습을 해야 하는 신세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지금 이걸 놓치면 평생 후회할지도 몰라'


일탈을 저질러 보기로 했다. 계획도 세웠다. 정규 수업이 끝나면 대략 4시 반, 이후 청소와 1시간의 저녁식사 시간이 주어지고 저녁 6시부터 자율학습이 시작되니 그 중간인 저녁식사 시간이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내 자리 주변 친구들에게 말했다.


"집에 가서 좀 있다 올 건데, 혹시 선생님이 이놈 어디 갔냐고 물으면 화장실 간 거 같은데요라고 해라"

"뭐야? 이거 수상한데"

"아 몰라, 아무튼 그렇게 해라. 진짜 죽는다."


프랑스문화원 같은 소리는 아예 꺼내지도 않는 게 현명하다 생각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째고 그것도 무려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를 보러 간 사실이 들통나기라도 하는 날엔, 그야말로 '사망' 확정이었으니까. 적어도 이것 만큼은 모두에게 비밀로 해야 했다. 책상 위엔 공부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척 연습장과 책을 흐트러뜨려 위장막을 쳤다. 그리고는 재빨리 학교 뒷담을 넘어 지하철 역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달리기 때문인지 불안감 때문인지는 잘 몰랐지만 뒤이어 이를 압도하는 짜릿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얼마 후 나는 르누아르의 방 한가운데 앉아있었다. 나를 포함해 관객은 고작 몇 명뿐이었다. 불이 꺼지고 뒤에서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며 스크린이 밝아졌다. 인트로에서 격한 바이올린 소리와 함께 술주정뱅이 혹은 미치광이와 같은 남자의 일러스트가 교차하며 영화가 시작되었다. 초반부터 진한 베드신이 나왔다. 동공이 조금 커지긴 했지만 나의 관심사는 그게 아니었다.


'우리 엘자는 언제 나오는 걸까?'


프랑스어를 좀 배웠다고는 하나 여전히 대부분은 알아듣지 못하는 프랑스어였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더 장면에 집중해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설렘과 기대감 속에 엘자가 나왔다. 피아노 앞에 앉아 그 노래를 불렀다.


'아 저렇게 생긴 사람이었구나'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달랐지만 예뻤다. 목소리와 노래는 더욱 예뻤다. 엘자는 영화를 찍으면서 저 먼 나라의 고딩 하나가 학교에서 도망쳐 자신을 보러 올 줄은 단연코 몰랐을 것이다. 영화는 알코올중독자인 바이올리니스트 남편과 아내가 주인공이었고, 그 둘 간의 이별과 재회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그런 내용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비록 딸로 분한 엘자의 전체 출연시간은 10분도 채 되지 않았던 것 같지만, 나에게 있어 이 영화의 빛나는 뮤즈는 엘자였다.


영화가 끝나고 르누와르의 방을 나서며 나는 생각했다.


'오늘 나의 일탈은 먼 훗날 돌아보았을 때 틀림없이 잘한 선택이었노라고... 만약 이 순간을 놓쳤다면 작은 용기를 내지 못했던 걸 영영 후회하고 살았을 거라고...'


뿌듯한 마음을 안은채 다시 지하철을 타고 학교로 향했다. 지하철 어두운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조명 불빛들을 보자 비로소 들키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슬슬 밀려왔다.


나는 밤 9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학교 담장 밖에 홀로 서 있었다. 도망칠 때 넘었던 담장보다 왠지 더 높게 느껴졌다. 먼저 귀를 기울여 학교에서 어떤 소리가 나는지 들어보았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딴짓하다 교실을 순시하는 선생님에게 걸린 애들이 종종 맞는 경우가 있었으니 그 소리를 감지해 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학교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 조용함이 오히려 더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이때만큼은 선생님이 위험한 '적'이었고 그 적의 위치를 도무지 알 수 없었으니까. 어쩌면 담너머에 선생님이 몽둥이를 든 채 "요놈 봐라?"하고 서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율학습이 끝나기 전에 선생님이 각 반을 돌며 인원 점검과 종례를 하니 그전에는 반드시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던 터라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도둑놈처럼 또 담을 넘었다. 사주경계를 하며 천천히 뒤뜰을 지나 현관을 통과해 숨을 줌이고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위층 어딘가에서 몽둥이로 때리는 듯한 소리가 연거푸 들려왔다. 순간 깜짝 놀라 멈칫했으나 이내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적의 위치를 파악했고 우리 교실 쪽도 아니었으니, 천재일우와 같은 잠입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닌자처럼 빠르게 그러나 정숙하게, 뒤꿈치를 들고 계단을 나는 듯 올라 교실 앞까지 들키지 않고 가는 데 성공했다.


복도에서 창문을 통해 교실안의 동정을 살펴보니 만화책 보는 놈, 오목 두는 놈, 소곤소곤 떠드는 놈들이 보였다. 안전하다는 판단이 서자 전광석화처럼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일단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이 터져나왔다.


"너 뭐야, 왜 이제 와?"

"나 안 걸렸지?"

"안 걸렸어. 그런데 뭐냐고?"


다시 한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내 자리 주변 친구들도 모두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 집 아니고 딴 데 갔다 왔지?"

"맞아"

"어디?"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던 나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느그들이 입시지옥에서 신음하는 동안... 난..."





Bonjour~
프랑스에 갔다 왔어!




Elsa - T'en va pas (떠나지 마세요)

https://youtu.be/TeaKAB-IxOE?si=2WVbWLBepdRQjfHx



<감성 터지는 샹송 추가>

여기까지 보셨다면 음악감상 강력 추천~

노래가 별로면 팔레오 때려도 무죄!!!



Hélène - Ce train qui s'en va (떠나버린 기차)

https://youtu.be/5oqqt9pqZyM?si=HAK_qtOOzH0Hq-TO



Françoise Hardy - Comment te dire adieu (어떻게 너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할까)

https://youtu.be/oJCkBhKzdfw?si=AdYQ_TMFidC_xJ_R



Goldman, Fredericks et Jones - C'est pas d'l'amour (이건 사랑이 아니야)

https://youtu.be/Tx98sbRnMJQ?si=N8wU9SjT4hYhPTq0



<2024 파리올림픽 개막식>

Céline Dion - Hymne à l'amour (사랑의 찬가)

https://youtu.be/9wQ-GYnKPYM?si=vPO4JS43APHqw0SM

병마와 싸우면서 '기어서라도 청중과 만나겠다'는 셀린 디옹 누나 가창력 미침. ㅠ

에펠탑 위에 우뚝 서서, 전 세계 수십 억 명의 시청자 앞에서 노래하는 그 감격이 어떨지... ㅠ

동시대에 만나서 영광이었습니다. ㅠ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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