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건져온 엽전
지난 이른 봄 산행에 이어 완연한 봄산행기입니다.
주말에 비소식이 있어서 선빵을 치기로, 아니 예정보다 앞선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급경사지를 무려 300m 이상 치고 올라가야 하는 헬난이도의 포인트 2곳을 비롯해 모두 4곳을 둘러볼 예정이라 새벽녘에 길을 나섰습니다.
너무 이른 아침, 넓은 도로엔 오가는 차량이 거의 없었으나 신호등만은 열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교차로 코앞에서 갑자기 황색등이 켜져 바로 차를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도로에서 차를 세운 이유는 준법정신이 투철한 모범시민이기 때문이 아니요, 신호등 때문도 아닙니다. 그 신호등 위에서 '한 놈만 걸려라'라고 눈을 부라리고 있는 과속, 신호위반 감시카메라 때문입니다. 무서운 사우론의 눈이 따로 없습니다. 단속카메라 앞에서 저는 세상 겁쟁이 호빗이 됩니다.
어쨌든, 잠시 정차한 김에 뒤를 보니 이제 막 떠오른 해가 예뻐서 찍어보았습니다.
1시간 30분가량을 달려 첫 번째 포인트에 도착했습니다. 인생은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죠. 사소한 선택이 극과 극의 결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목적지는 노란색 화살표 너머에 있는 고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택의 상황이 주어졌습니다.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신발을 던져 점을 쳐보니 '왼쪽'을 가리키네요.
그렇다면, 가즈아~~~
바야흐로 봄입니다. 파릇파릇한 냉이가 지천으로 널려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배낭 하나 가득 채우는 건 일도 아닐 테고 집에 가져가면 칭찬도 받겠지만, 어서 엽전을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서 저녁 찬거리 냉이는 못 본 걸로 했습니다. "너희들 운이 좋은 줄 알아!"
왼쪽길을 따라가자 잠시 후 펼쳐진 광경입니다. 갑자기 길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살이 쓸리면 피를 부르는 못된 가시덩굴이 앞을 막고 있네요. 그러나 여기서 발길을 돌리기에는 가오가 허락하지 않습니다.
싸나이는 직진
옷이 가시에 찍~찍 긁히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무대포로 앞만 보고 전진합니다. 그러나 잠시 후 30~50도 가까운 경사가 또다시 싸나이를 막아서며 시험에 들게 합니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간다면 애초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굴욕이 되는 셈이므로, 가오가 뇌를 지배해 버린 노빠꾸의 싸나이는 직진을 또 시전합니다.
그러나 호기로움과 패기도 잠시,
급경사를 거의 100m쯤 기어오르면서 빠꾸를 모르던 상남자 싸나이는 점점 애처로운 소녀가 되어갑니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한 발 한 발 내딛기가 너무 힘듭니다. 탐지기까지 들고 있으니 더합니다. 수없이 멈춰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회한의 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이제 겨우 절반 정도 올라왔습니다. 높이로 150m쯤 올라온 것이죠.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오늘따라 날씨도 왜 이리 더운지, 땀을 한 바가지는 쏟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죽음의 급경사지를 겨우겨우 기어서 고개 근처에 왔더니만 왼쪽에서 올라오는 평탄한 길이 보입니다. 아까 무덤 앞에서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면 이쪽으로 수월하게 올 수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으앙~ ㅠ"
고개에 이르니 오른쪽 나무에 돌이 조금 쌓여있는 게 보입니다. 전에 말했던 엽전 노다지죠. 그런데 주변이 온통 쓰레기 천지입니다. 대부분 요즘 것은 아니고 꽤 오래전에 버려진 것들이었습니다. 보통 금속탐지를 하면서 발견하는 쓰레기는 비닐봉지에 담아 모았다가 버리는데 이번은 도저히 감당이 안됩니다. 페트병 등 부피가 큰 쓰레기가 많아도 너무 많네요.
탐지를 시작하자 여러 곳에서 소리가 납니다. 소리가 나는 곳의 돌을 몇 개 들추자 상평통보 당일전과 일제시대 동전이 함께 나왔습니다.
그와 가까운 곳에서 엽전이 또 나옵니다.
그러고 보니 엽전 아래 있는 돌은 석회암이네요. 옛날 조상님들은 후손들이 이 돌을 갈아 시멘트란 것을 만들어 엄청나게 큰 건물을 짓고, 다리도 만들고, 도로까지 깔게 된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 했을 테죠.
언제 봐도 반가운 대한제국 근대전입니다. 처음에 흙이 묻어 문양이 잘 안 보일 때 살살 문질러 한글이 보이면 심쿵합니다. 마치 스크래치형 복권을 긁었는데 당첨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이번에는 비녀가 나왔습니다. 내심 은비녀였으면 했는데 양은(알루미늄) 비녀네요. 지금이야 알루미늄이 너무 흔한 금속이지만 그래도 옛날에는 비교적 귀한 금속이었습니다. 보크사이크를 가공해 만드는 알루미늄은 생산과정에서 전기를 엄청나게 많이 소모하기 때문이죠. 옛날에는 전기가 귀했으니까요.
오늘은 초반에 에너지를 많이 소모해서 그런지 일찍 허기가 찾아왔습니다. 조금 이른 점심을 먹기로 합니다. 지난번처럼 이번에도 찬물 부어 먹는 발열밥으로 점심을 때웁니다. 왠지 자꾸 광고하는 것 같은데 참고로 저는 이 회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도 광고 모델 제의가 들어오면 수락하겠습니다.
"금속탐지인 팔레오가 선택한, 산에서의 최고의 만찬, 발열 밥~밥~밥~, 별이 다섯 개~♪"
얼굴 테러하고 광고 나가면 밥 맛 떨어진다고 매장에 나갔던 제품도 반품요청이 쇄도하겠네요.
회사의 앞날을 생각해 다른 모델에 양보하겠습니다. 또 이 회사 없어지면 저도 점심을 굶어야 할지 모르니까요.
밥이 데워지기를 기다리며 뒷정리에 들어갑니다.
높은 곳까지 동행하며 힘써준 나의 <Equinox800 'Ssaguryeo' Limited Edition> 금속탐지기
"수고했어, 오늘도!"
왼쪽 길을 따라 하산을 시작합니다. 이 길은 아까 올라온 지옥 같은 길에 비하면 고속도로나 다름없습니다. 이 산속 고속도로는 일제시대쯤 조성한 길로 보입니다.
좋은 길을 따라 편하게 하산을 하고 나서 인근에 위치한 두 번째 포인트로 이동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선택의 실수가 아니라 착오의 실수로 인해 또다시 지옥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말았습니다. 여기가 아니라 더 왼쪽에 위치한 골짜기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지도를 대충 보고 처음부터 잘못된 길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여기도 석회암이 눈에 많이 뜨입니다. 이 석회암을 가져다 잘게 부순 다음 염산이나 빙초산에 담가두면 '코노돈트'라는 미화석(微化石)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모암인 석회암(CaCO3)이 산과 만나면 녹아버리고 산에 녹지 않는 이산화규소(SiO2)로 된 화석만 남게 되는 것이죠.
코노돈트의 실체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분분하지만, 고대 어류의 이빨이라는 설이 힘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뱀도 아니고 고생대 원시 어류 참 무섭게 생겼습니다.
낚시 하다 잡으면 후덜덜~
바늘 빼다 물리면 꺄아악~
논문에 나온 다양한 코노돈트 화석의 모습입니다. 직접 찾고 싶으신 분은 석회암을 깨서 한 번 실험해 보시길 권합니다. (주의 : 시판되는 시멘트는 석회암이 주성분이지만 곱게 갈았기 때문에 안됩니다.)
아... 잘못된 길로 올라와도 한참을 올라왔습니다. 너무 덥고 숨이 차서 금속탐지고 뭐고 그냥 쓰러지고 싶네요. 힘들어서 죽을 것 같은 게 첫 번째 문제라면, 두 번째 문제는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내려갈 뒷 일이 더욱 걱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정상까지 올라가서 능선을 타고 한참을 돌고 돌아 애초에 목적했던 장소에 이르렀습니다. 앞에 있는 큰 나무 좌우로 옛길입니다.
고갯길에는 이렇게 수령이 수백 살 이상 되어 보이는 큰 나무들이 종종 보이는데, 과거에는 서낭당 나무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나무 주변에는 옛 조상들이 안녕을 기원하며 묻어놓았거나 혹은 쉬면서 흘린 엽전이 심심찮게 발견됩니다.
'어디에 엽전이 숨어있을까?'
앉아서 쉬기 좋아 보이는 평평한 곳에 탐지기를 대보자 바로 엽전이 나옵니다.
이후로 주변을 정밀 탐색을 하자 몇백 년 동안 꼭꼭 숨어있던 엽전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냅니다.
"댁이 관대하여 갈 곳 없는 엽전들을 거두어준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사실이오?"
"허허 거 소문 한번 빠르구려, 냉큼 이리오시오!"
"난 식솔이 있소, 함께 받아줄 수 있는 것이오?"
"당연하다마다, 금슬 좋은 가시버시라면 더욱 좋소!"
"내 처는 청에서 온 처자요, 다문화 가문인데 괜찮겠소?"
"본좌는 국적을 불문한다 그리 말하지 않았소!"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에서 조선시대로 돌아가 정신병자마냥 사극 놀이를 신나게 한바탕 즐겼습니다. 어느덧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네요. 아쉽지만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거둔 귀염둥이 동자들입니다.
고개를 뒤로 하고 내려오는 길, 수백 년 동안을 이 고개에 서서 많은 사람들의 쉴 곳이 되어 주었던 나무가 두 팔을 들어 작별인사를 하는 듯합니다. 정신이 나간 놈 같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나그네를 만나 반가웠다고~
- 끝-
... 이라고 여기서 끝내면 좋을 텐데... 하산길이 심각해서... 사족을 붙이지 않을 수가 없네요. 올라올 때와 다른 코스인 고개 아래 옛길을 따라 하산합니다. 이게 지름길일 테니까요.
그런데 고개에서 내려가는 길에 큰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고갯길로 사람이 다니지 않았길래 길이 이 모양이 되었을까요?
점입가경이라더니,
"세상에~ 와~~ 진짜~~~" 너무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옵니다.
사람이 걷는 속도가 보통 시속 4km쯤인데 30분 동안 200m도 채 가지 못했습니다.
습기를 머금은 경사진 길은 얼음처럼 미끄럽고(2번 미끄러짐)
잔 나뭇가지는 채찍처럼 매섭게 뺨을 후려치고(눈물이 핑~)
탐지기는 나무와 덩굴에 걸려 얼마나 걸리적거리는지(패대기치려다 고오급 탐지기라 참음)
겨우겨우 지옥 같은 길을 빠져나와 탁 트인 곳을 만나니 그제야 비로소 살 것 같았습니다.
아직 가야 할 곳이 2군데가 남았지만 체력도 없고 힐링포션도 없습니다. 남은 두 곳은 몇십 미터만 올라도 될 쉬운 포인트임에도 불구하고 오를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결국 내비게이션에 '우리집'을 외치고 출발합니다.
그러나...
사람 일이 어디 항상 마음먹은 대로, 뜻대로 되겠습니까?
돌아가는 길에 체력이 눈곱만큼 회복되자 예의 금속탐지 병이 또 도져버리고 맙니다. 3번째 포인트는 이미 지나쳐 버렸기 때문에 못 가고, 4번째로 가려했던 포인트 부근에 차를 대고는 올라가 보기로 합니다. 철망과 철문이 앞을 막고 있었으나 글을 읽어보니 아프리카 돼지열병을 막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필요하면 출입하되 문은 꼭 닫고 다니라는 뜻이네요.
늦은 오후, 노을빛으로 화장해 더욱 예뻐진 진달래가 온 산에 가득합니다. 정말 봄이네요.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금세 고갯길에 도착했습니다. 역시 아름드리 소나무가 서있습니다.
즉시 주변을 살펴보며 견적을 내봅니다.
큰 나무 => 100점 (100점 만점)
골이 깊은 좌우길 => 90점 (100점 만점)
넓은 안부 => 90점 (100점 만점)
역사 있는 고갯길 => 100점 (100점 만점)
'이 정도면 대충 훑어도 주머니가 두둑해질 만한 명당이다.'
그러나... 통신 중계기가 떡하니 자리 잡고 서있습니다. ㅠ
통신중계기 또는 송전탑 => 100점 만점에 99점 감점
깨진 도자기와 돌멩이가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번듯한 돌무더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통신 중계기를 세우면서 돌무더기를 밀어버리고 흙을 덮어 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입니다. 하고 많은 자리 중에 하필이면 여기다 이런 걸 세우는지.
쇳조각, 철사, 전선, 볼트, 너트가 흩뿌려진 극악의 상황에서도 포기를 모르는 상남자는 탐지를 시작합니다.
결국 상평통보 당이전 2개, 중형전 2개를 찾아냈습니다. 역시 불굴의 의지를 가진 한국인이네요.
오늘 탐사는 한마디로 지옥훈련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만난 과거의 흔적과 유물은 그 힘든 여정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고도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