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체는???
한산한 인사동 거리를 걷다 우연히 한 골동품 가게 앞에 놓인 옛 물건을 보기 위해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문득 가게 주인이 나를 힐끔 보더니 넌지시 말을 건넸다.
“손님, 저희 가게에 아주 <대단한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대단한 물건? 그게 뭐지?’ 나는 궁금해졌다.
호기심이 발동한 내 눈빛을 읽었는지 상인은 빠르게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게 어떤 물건이냐 하면요, 일단 만드는 과정부터가 대단합니다.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풀무질을 해서 1,000도가 넘는 도가니에서 녹인 다음 꺼내서 준비된 틀에 붓습니다. 그러니까 그 틀로 말하자면, 당대 최고의 명필이 쓴 글자를 받아다가 나무 원판에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껏 새긴 겁니다. 주물이 식은 다음엔 장인들의 섬세한 줄질과 마무리 작업을 합니다. 근데 그게 끝이 아니에요. 담당 관리가 OK 해야만 세상에 나올 수 있는 물건입니다.”
‘명필과 장인의 콜라보라니... 게다가 품질관리까지.... 대단한데’ 나는 그게 무엇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이 모든 건 백프로 수작업으로 만든 거예요. 이게 수십 년 된 물건도 아니고 무려 삼백 년이나 된 물건이라면 어떻습니까?” “더구나 조선에서 구하기 힘든 구리를 다른 나라에서 사서 만든 것이니 더 말해 뭐 하겠습니까? 자 어떻습니까? 말만 들어도 정말 대단한 물건이 아닙니까?
나는 상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도 아니하였거니와 가격도 비싸게 부를 것 같아 살 마음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 물건의 정체와 부르는 가격이 적잖이 궁금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오, 그런 거면 가격이 장난 아니겠는데요? 그게 뭔데요? 얼마나 하는데요?”
상인은 말없이 슬쩍 입꼬리만 올리고는 귓속말을 하듯 입에 한쪽 손을 대고 말했다.
“삼천 원입니다.”
“예? 삼천만 원 아니고 사... 삼천 원이요?”
이윽고 달변가 상인의 보이지 않는 손에 붙잡혀 가게 안으로 따라 들어간 내게 상인이 자랑스레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게 바로 그 물건입니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건 다름 아닌 ‘상·평·통·보’였다.
상평통보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조선중기 숙종 때 발행되어 널리 통용되었던 화폐다.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이름은 상시평준(常時平準)이라는 단어에서 ‘상평(常平)’이란 표현을 차용한 것인데 이는 유통에 있어 가치가 변하지 않고 항상 등가(等價)를 유지하려는 뜻과 노력이 반영된 의미다. 당시 국가 대계로서 조선에서는 귀한 구리를 일본이나 청나라에서 수입해 만든 것이다.
상평통보의 큰 특징 중 하나가 당시 일본이나 청나라에서 통용되던 화폐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상평통보라고 다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단 크게 분류하자면, 뒷면에 아무 글자도 없는 ‘무배자전’과 한 글자만 있는 ‘단자전’, 하부에 二가 새겨진 ‘이자전’, 天·地·玄·黃 등 천자문 글자가 박힌 상평통보 ‘천자문전’, 구리를 아끼기 위해 조금 더 작아진 ‘중형전’, 크기가 더욱 작아진 ‘당일전’, 그리고 흥선대원군 때 발행한 ‘당백전’, 마지막으로 當五라는 글자가 쓰인 ‘당오전’이 있다.
대부분의 상평통보 뒷면에는 마치 작은 우주를 품은 듯 해와 달, 별을 의미하는 기호인 일표와 월표, 성표와 오행의 글자 및 천자문의 다양한 글자들이 조합되어 있다. 때문에 발행된 종류는 무려 3,000종을 훌쩍 넘어선다. 종류가 다양한 만큼 그 희소성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라 저렴한 것은 1,000원부터 시작해 비싼 것은 1,000만 원이 넘는다.
워낙 종류가 방대한 탓에 우리나라의 고전(古錢) 수집가들 중에 그 모든 종류를 완집(完集)한 사람이 있다는 말은 지금까지 한 번도 들은 바가 없다. 몇십 년 동안 10만 개가 넘는 상평통보를 수집한 전문가들조차도 상평통보 완집은 불가능했다고 말을 한다.
이와 같은 상평통보의 제조는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상평통보는 지금의 한국조폐공사처럼 한 곳에서만 이루어지지 않고 약 삼십여 곳이나 되는 주전소에서 만들어졌다. 각 주전소마다 주전소를 나타내는 글자를 뒷면 상단에 새겨 이를 표시했다. 이렇게 되면 만약 문제가 있는 화폐가 어디서 생산된 것인지를 즉시 알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불량 화폐의 책임을 묻고 양질의 화폐를 생산, 관리하기 위함이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주전소로는 호조(戶), 병조(兵), 공조(工), 경기감영(京), 전라감영(全), 균역청(均), 금위영(禁), 비변사(備), 어영청(營), 총융청(總), 훈련도감(訓), 진휼청(賑), 전환국(典) 등을 비롯해 30여 곳에 이른다.
앞서 상인의 말처럼 상평통보는 당대의 명필들이 참여해 글자를 쓰고 이를 나무에 새겨 만든 원본으로 최초 주조를 해 매우 완성도 높은 ‘모전’(母錢)을 만든다.
이 모전을 가지고 틀을 제작한 다음 ‘자전’(子錢)을 제작하는데 이 자전이 바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상평통보다. 상평통보에 사용되었던 모전은 나중에 세도가나 양반가로 흘러 들어가 열쇠패 장식품 등으로 사용되었다. 서체가 칼날같이 예리하고 조형미 넘치는 모전은 지금도 상당히 비싼 값에 거래된다.
그럼 상평통보를 위조하는 경우는 없었을까?
가치를 교환하는 매개수단이 물물교환이나 쌀, 베와 같은 현물화폐에서 작은 금속화폐로 바뀌자 민간에서는 몰래 화폐를 위조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도주(盜鑄)라고 한다. 도주전은 정식으로 조정의 허가를 얻어 민간에서 주조한 ‘사주전’(私鑄錢)과는 구별된다. 도주를 하는 사람들은 깊은 산이나 섬, 심지어 바다에 배를 띄워놓고 만들기도 하였고, 최대한 많이 생산하기 위해 값싼 재료를 섞어 대충 만들기도 했다. 도주행위는 당연히 국법으로 금하였고 발각될 경우 사형에 처하기도 했으나, 그 이익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좀처럼 도주가 줄지 않았다. 때문에 시중에 유통되었던 화폐의 약 30%가량이 도주전이라는 기록도 있을 정도다.
화폐를 만들던 장인들은 어떻게 급료를 지급받았을까?
놀랍게도 그들은 급료를 지급받지 않았다. 대신 일주일 중 6일은 화폐를 만들어 납품하게 하고, 마지막 날은 장인들이 직접 화폐를 만들어 가질 수 있도록 했다. 그러다 보니 장인들은 구리에 납이나 다른 불순물을 섞여 조금이라고 더 수량을 늘리려 했고, 이는 화폐 품질이 나빠지는데 크게 일조했다. 또한 조선후기에 접어들어서는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 전체적으로 화폐의 품질이 저하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특히 조선 말기에 제작된 당오전의 경우가 그렇다. 납을 비롯한 잡다한 금속이 섞인 탓에 쉽게 파손되거나, 주물이 번져 형태가 뭉개지고, 글자조차 식별하기 어려운 것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상평통보는 당시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졌을까?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당일전이 1푼, 당이전이 1~2푼, 당백전이 100푼(1냥)이었는데, 당시 노동자의 평균 일당이 약 20푼이었고, 80kg 정도인 쌀 한 가마니가 5냥이었던 것을 토대로 추정해 보면 1푼이 오늘날 가치로 약 200~600원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단순 비교이고, 쌀이 매우 귀하고 인건비가 낮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실제로 체감하는 1푼은 1,000원의 가치를 크게 상회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사극에서 청부살인과 같은 나쁜 일들을 지시하며 엽전 꾸러미를 던져주는 모습을 종종 보았을 것이다. 얼추 엽전 200~300개 정도로 보이는데 이를 현대의 화폐가치로 환산한다면 개당 1,000원으로 잡아도 고작 20~30만 원 남짓의 금액이다. 청부살인같이 큰 위험성이 뒤따르는 대가로 치기에는 너무나도 저렴한 비용이 아닐 수 없다.
조선말에는 근대적인 조폐시설에서 오늘날과 같이 동전에 글자나 문양을 눌러 새기는 압인(壓印) 방식으로 생산된 신화폐가 등장하였으나 일부 지방에서는 여전히 상평통보가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10년 일제강점기부터 일본화폐가 대량으로 유통되면서 더 이상의 통용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시중에 유통되었던 상평통보의 상당수가 회수되지 않고 민간에 많이 남아 지금도 상평통보를 손쉽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상평통보에 대한 관심이 생겨 한 두 개쯤 사고 싶다면 진휼청과 평양감영, 호조에서 만든 ‘이자전’과 총융청에서 만든 ‘당일전’을 추천한다.
물량이 많아 상태 좋은 것을 3,000~4,000원 정도면 살 수 있다. 서체가 매우 아름답고 재질도 좋으며 마감처리 등 전체적인 완성도도 좋다. 너무 저렴한 탓에 짝퉁을 만드는 메리트도 없기에 진위여부를 의심할 필요가 거의 없다.
이날, 상인에게 홀려 들어갔던 나는 그 대단한 물건 몇 개를 손에 쥐고 가게를 나섰다. 인사동 거리를 걸으며 내도록 주머니 속 상평통보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이 상평통보가 만들어지던 날을 떠올렸다. 300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손을 거쳐 가며, 이 작은 동전에 울고 웃었을 수많은 사연들을 상상하며 상념에 잠겼다.
인사동 산책길에서 생각지도 않게 만난 오래된 동전 몇 개가 내 마음을 잔잔히 흔들었다. 누군가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따뜻한 밥이 되었을지도, 누군가의 구슬땀이 서린 노동의 대가였을지도, 누군가의 시름을 달래는 한잔 술이 되었을지도 모를 상평통보가 이제는 누군가의 글감이 되었다. 정말 대단한 물건의 의미는, 그 물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옛사람들의 피땀과 끝내 살아갔던 소중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뜻밖의 행복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