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 기르고 싶다!
[들머리 사족]
이 글은 지난 2001년, 중국 공안에 체포된 우리 국민이 고문을 당하고 심지어 수염까지 뽑히는 수모를 겪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나서 비분강개해 썼던 것이 모태다. 쓴 지 20년도 더 넘은 구닥다리 글이라 여러 군데 손을 보다가 내친김에 본래의 주제까지도 틀어 보았다. 최근 글을 검색해 보면 비슷한 주제의 글이 더러 보이나 내가 원조임을 자처할 수 있다. 왜냐? 당시에 한 잡지사에서 내 글을 그대로 게재하였고 이를 지금도 증거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염을 멋지게 길러보고 싶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한 번쯤은 수염을 멋지게 길러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지금 문득 든 생각인데 어쩌면 그것이 사극 같은 데서 수염 덥수룩한 주인공이 탁주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수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술을 손으로 시원스레 탁 털어내며 호탕하게 웃는 모습을 본 뒤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수염은 사전적으로 ‘성숙한 남자의 입 주변이나 턱 또는 뺨에 나는 털’을 의미한다. 하루에 0.3~0.4mm씩 빠르게 자란다는 수염은 여성과 구별되는 대표적인 성적 이형성(異形性)중 하나로 남성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수염은 몸에서 자라는 다른 털들과 그 의미가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수염은 곧 권위와 자존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고대 이집트에서 수염은 파라오의 권위와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소수의 지배층을 제외하고 일반 백성들은 수염을 기를 수 없었다. 기자 피라미드 부근의 스핑크스는 현재 수염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지만 원래는 커다란 수염이 붙어있었다. 아부심벨 신전의 람세스 2세의 석상,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에도 긴 턱수염이 달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유토피아를 저술한 토마스 모어에게 있어서도 수염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가 영국 헨리 8세의 이혼문제에 휘말려 억울하게 반역죄로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는 사형집행관에게 ‘죄를 지은 것은 자신일 뿐, 수염은 아니기 때문에 수염이 잘리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그에게 있어 수염은 삶이 끝나는 순간에도 지키고 싶은 최후의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권위와 자존심의 속성을 지닌 탓에 수염은 경우에 따라 상대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솔로몬의 아버지이자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으로 유명한 다윗이 적국인 암몬에 보냈던 조문사절단의 수염이 잘리는 모욕을 당한 것에 분개하여 일으킨 암몬과의 전쟁이 바로 그런 사례다. 수염이 기폭제가 된 이 전쟁으로 인해 결국 암몬은 멸망하게 되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수염과 관련된 여러 일화들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 삼국사기를 저술한 것으로 유명한 김부식에게는 김돈중이라는 양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밤 연회에서 장난 삼아 무신인 정중부의 수염을 실수인 척 촛불로 태워버린 일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크게 원한을 품은 정중부는 훗날 무신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뒤 김부식을 부관참시하고 김돈중과 그의 직계 자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당대 최고의 문벌이었던 김부식 가문의 멸문지화를 가져온 것은 물론 우리의 역사마저 바꿔버린 대단한 수염이 아닐 수 없다.
조선 3대 왕인 태종 이방원에게는 권총이라는 어린 외손자가 있었는데 일찍이 왕의 총애를 받고 자라 버릇이 없고 장난이 심했다. 어느 날 이 철부지 외손자는 임금 앞에 엎드린 신하의 수염을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이에 신하들이 들고일어나자 태종은 "손주가 너무 어려서 잘 모르고 한 일이니 부디 중벌은 면하게 해 달라."며 신하들에게 사정을 하고 숭례문 밖으로 쫓아내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호랑이보다 무서웠다던 태종조차도 도저히 감싸줄 수 없을 만큼 수염 훼손은 중죄였던 것이다. 참고로 이 이야기는 정사에 기록되지는 않았다.
이처럼 수염은 남성에게 있어 단순한 털이 아니라 권위와 자존심을 상징하는 하나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이자 목숨만큼이나 중하게 여겼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수염은 여성성과 상반되는 남성성 그 자체로서 남자임을 증명하고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한(漢) 나라에서는 끔찍한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남성성에 모욕을 주는 형벌로서 거세를 하는 궁형(宮刑)이 있었는데 역사서인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이 바로 이 궁형에 처해졌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거세를 하게 되면 남성호르몬이 끊겨 수염이 나지 않게 되기에 사마천의 초상화는 한결같이 수염이 그려져 있지 않다. 형벌과는 무관하나 궁중의 내관(內官)들도 법도에 따라 거세를 한 탓에 수염이 없다. 또한 르네상스 이후 유럽에서 성인 남성이지만 소년의 고음과 청아한 목소리로 인기를 끌었던 가수인―영화 파리넬리를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진―카스트라토 역시 변성기가 오기 전에 거세하여 수염이 없다. 거세와 수염은 불가분의 관계인지라 수염이 없는 밋밋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 남성성을 상실한 자라고 광고하는 것과 똑같다. 설령 이들이 겉으로는 출세하여 돈과 유명세를 얻었을지라도 사회에서는 물론 특히 여성에게 남자로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을 것이다. 영국의 셰익스피어는 ‘수염이 있는 자는 청년보다 나으며, 수염이 없는 자는 사람보다 못하다(a beard is more than a youth, and no beard is less than a man)’라고 수염이 없는 사람을 노골적으로 폄하했으며, 에스파냐에서는 '턱수염 안 난 남자와 키스하는 것은 소금 안친 달걀을 먹는 맛'이란 속담을 통해 수염이 없는 남자를 비유적으로 깎아내리기도 했다.
수염 없는 사람들이 비하와 천대를 받는 것과는 달리 풍성하고 멋진 수염을 가진 남자는 보는 이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키고,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은 50세가 되도록 수염을 단 한 번도 기른 적이 없었는데, 인상이 험악해 보이니 수염을 기르면 좋을 것 같다는 한 소녀의 충고에 따라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뒤부터 대중의 호감이 상승해 훗날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보는 이에게 호감을 주는 수염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는 수염이 길고 멋진 것으로 줄곧 묘사되는데, 그가 후한(後漢)의 황제인 헌제를 알현(謁見)하였을 때 수염의 자태에 크게 감탄한 황제로부터 수염이 아름답다는 뜻의 미염공(美髥公)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만약 황제마저 반하게 만든 이 미염공의 수염을 술에 취한 장비가 장난으로라도 불태웠거나 뽑아버렸다면 과연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자못 궁금하다. 잠시 샛길로 빠져 나름대로 상상해 보건대, 맏형인 유비가 금석맹약(金石盟約)인 도원결의를 내세우며 중재에 나서본들 관우의 성난 청룡언월도를 거두기엔 역부족이었을 테고 삼국지의 흐름과 결말도 우리가 알고 있던 내용과는 완전 딴판이 되었을 것이다.
각설하고,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남성의 수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매우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오랫동안 남성들과 운명을 함께 해왔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문명사회에서 절대다수의 남성들은 수염을 기르지 않는다. 대체 언제부터 왜 수염을 기르지 않게 된 것일까?
서구 사회에서 남성의 수염이 사라지기 시작하게 된 것은 16세기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남성에게 수염세(鬚髥稅)를 부과하면서부터다. 이를 필두로 18세기 러시아의 표트르 1세도 수염세를 걷으며 수염 탄압 정책을 이어 나갔고,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 이르러서는 해군 병사가 아예 수염을 기르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해 수염 탄압의 정점을 찍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그보다는 조금 늦게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소위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이발과 면도가 권장사항이 되었다. 수염은 구시대의 잔재로서 이를 고수하는 사람들은 계몽되지 못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 사회분위기가 되면서 자연스레 면도를 하는 사람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인류의 몇 백만 년 역사와 늘 함께 해왔던 남성의 소중한 수염은 국가세수확보, 구습 타파 따위의 이유로 면도를 하면서 불과 몇 백 년 만에 그렇게 덧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면도를 하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로 한 문장 안에 모두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단점들이 즐비하다. 우선 면도를 하는 데는 꽤 많은 비용이 든다. 나날이 고급화되어 가는 면도기와 소모품인 면도날, 기타 제반용품 등을 구입하는 비용이 제법 만만치 않다. 게다가 면도를 할 때마다 피부 각질층이 깎여나가는 쓰라림을 매번 느껴야 하며 이따금 면도날에 베여서 세면대에 새빨간 피를 뚝뚝 흘리는 참혹한 광경도 봐야 한다. 반복되는 피부 자극과 손상으로 인한 각종 피부 트러블과 노화도 덤으로 따라온다. 뿐만 아니라 매일매일 바쁜 아침을 더욱 바쁘게 만든다. 매일 5~10분씩 평생 면도를 하는 데 드는 시간을 좀 더 의미 있는 곳에 사용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반대로 면도를 하지 않는다면 많은 장점들이 다투어 줄을 선다. 수염을 기를 경우 당연히 면도기가 필요 없게 된다. 따라서 면도기와 기타 소모품 등을 구입하는데 들어갈 헛돈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 고스란히 절약된 돈은 얼마든지 다른 가치 있는 일에 사용할 수 있다. 또한 피부를 예리한 칼날로 깎아내지 않아 더 이상 아플 일도 생채기가 날 일도 없게 되며, 피부 각질층도 그대로 유지되므로 피부가 좋아진다. 여기서 조금만 더 관리하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꿀피부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아침마다 거품을 바르고 면도를 할 필요가 없으니 아침이 좀 더 여유로워지게 된다. 매일 5~10분씩 면도로 소모될 시간만큼 대신에 신문을 읽거나 영어단어 또는 한자를 외우거나 혹은 스쿼트나 푸시업과 같은 운동을 한다면, 그 유익함에 있어 전자와 후자가 얼마나 큰 차이가 나게 될지는 일일이 이르집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수염은 링컨대통령의 사례처럼 외모의 단점을 보완하는 효과도 있다. 특히 하관(下觀)이 좋지 못할 경우에 더욱 좋다. 수염은 헤어스타일처럼 꾸미기에 따라 멋을 살리고 다양한 개성도 드러낼 수 있는 훌륭한 패션 요소가 된다. 가리발디, 카이저, 할리우드, 힙스터 등 기르는 모양에 따라 수염의 종류는 수십여 가지에 이를 만큼 매우 다양해 자신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골라 멋들어지게 연출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수염이 복싱이나 격투기와 같은 경기에서 얼굴에 오는 충격을 최대 37%까지 완화시킨다는 미국 유타대학의 논문도 나왔다. 수염이 있는 사람과는 싸움도 피해야 할 일이다. 또한 수염은 심리적 안정을 주는 효과도 있다. 수염을 쓰다듬으며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생각을 가다듬거나 사색에 잠기는 멋도 부릴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장점이 많은 수염을 기르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다. 현대의 남성들은 남자로서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고유한 것 하나를 상실한 채 불완전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마치 갈기 없는 수사자처럼, 뿔 없는 수사슴처럼, 꽁지깃 없는 숫공작새처럼 말이다. 또한 그들은 위엄 있는 파라오, 미염공 관우, 호감 넘치는 링컨의 모습을 닮으려는 대신 우스꽝스럽게도 사마천, 궁중 내관, 카스트라토와 같이 거세된 사람의 얼굴이 되기 위해 매일같이 일부러 시간과 비용을 들여 면도를 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비정상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수염을 기르면 될 게 아닌가?’
그러나 이제 수염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수염을 기르는 사람은 대체로 지저분하다거나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자연인 혹은 도를 닦는 사람, 아예 한 술 더 떠 노숙자나 범죄자 같아 보인다는 부정적인 인식까지 있는 형편이다. 때문에 그런 부정적 편견의 색안경을 뒤로하고 수염을 기르기로 결심하는 데는 꽤나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사실 몇 년 전에 나는 모처럼 큰마음을 먹고 한 달 남짓 수염을 길러본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수염이 길어질수록 더해가는 오지랖 넓은 사람들의 관심과 간섭이 부담스러워 결국 스스로 거세 아니 면도를 해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참에, 아직 저버리지 못한 나의 버킷리스트를 또 한 번 외쳐본다.
“언젠가는 반드시 수염을 멋지게 기르고야 말 것이다!”
고양이와 강아지의 수염이 부럽고,
심지어 잉어와 메기의 수염마저도
탐스럽게 느껴지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