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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스승의 은혜

야만의 시대

by 팔레오

올림픽 주경기장이 건너다 보이는 한강 둔치 어딘가,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4층 건물 한편에서 “딱~딱~딱~”하는 소리가 이어진다. 그런데 잘 들어보면 “짝~짝~짝~”, 퍽~퍽~퍽~”, “찰싹~찰싹~찰싹~”하는 등 다양한 소리가 여러 곳에서 섞여 들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질적인 소리들이 섞여있음에도 절묘하게 어우러져 마치 서로 장단을 맞추듯 하모니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하다.


여기는 한강변에 위치한 ○○중학교.


학교에서 나는 소리니 으레 음악실에서 나는 소리쯤으로 짐작할 테지만 그렇지 않다. 이 소리는 바로 학생들이 교사에게 매를 맞으면서 나는 소리다. 다양한 음색의 소리가 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맞는 부위와 때리는 도구의 조합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대개 맞는 부위는 엉덩이, 앞쪽 허벅지, 뒤쪽 허벅지, 종아리, 정강이, 발바닥, 손바닥, 손등, 팔뚝, 머리, 뺨, 코, 귓불 등이며 때리는 도구는 빗자루, 대걸레, 당구 큐대, 각목, 목검, 죽도, 죽비, 북채, 장구채, 실로폰채, 총채~, (너무 길어지니 한 박자 쉬고~) 주전자, 지구본, 소리굽쇠, 효자손, 쇠 자, 대 자, 플라스틱 자, 출석부, 교과서, 칠판지우개, 슬리퍼, PVC 파이프, 장인정신으로 만든 자작 몽둥이, 주먹과 발, 팔꿈치 등 너무 많아 모두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사실 교사가 쥐는 모든 물건은 언제든 체벌도구로 변신이 가능하다.


매와 더불어 성추행에 해당할만한 가혹행위도 있다. 남학생 젖꼭지 꼬집어 비틀기, 낭심 움켜잡기, 똥침 찌르기, 여학생 머리채 잡아채기, 브래지어 끈 세게 당겼다가 놓기 등등


학생들이 이처럼 험한 꼴을 당하는 이유는 실로 다양하다.


지각해서, 이름표나 학교 배지를 달지 않아서, 복장이 단정하지 않아서, 준비물을 못 챙겨서, 숙제를 제대로 못해서, 납입금을 못 내서, 수업에 집중 안 해서, 졸아서, 질문에 답하지 못해서, 시험 성적이 나빠서, 청소를 잘 못해서, 떠들어서, 복도에서 뛰어서, 인사를 바르게 안 해서, 중앙 현관으로 다녀서, 머리가 길어서, 손톱에 때가 껴서, 뚱뚱해서, 못생겨서, 기분 나빠서...


아직 어린이의 때를 채 씻어내지 못한 순진무구했던 14살, 빡빡머리 중학생이 되고 난 이후에는 거의 매일같이 학교에서 무지막지한 매를 맞으며 하루아침에 나락(那落)으로 떨어진 삶을 살아가야 했다.


매를 맞는 것이 참 무서운 일이었지만, 그보다도 더욱 무서운 건 그처럼 두들겨 맞아도 어디에 하소연한다거나 위로받을 길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스스로 창피한 죄를 진 것처럼 생각해 부모님에게도 차마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설사 말을 한다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네가 맞을 짓을 했나 보지”라는 핀잔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학교에 찾아가 “우리 애를 왜 때렸느냐”라고 따지는 용감한 부모는 아무도 없었다. 교사와 학부모 관계에서 교사가 철저히 ‘갑’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사정도 제대로 모르고 연신 굽신거리며 “선생님, 우리 애 좀 많이 때려 주십시오.”하며 소갈머리 없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국민학교(現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찾아온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가 너무 놀랍고 무서웠다. 그러면서 들었던 생각이 ‘이게 그렇게 맞을 만큼 잘못한 것인가?’하는 의문이 생기면서 이전까지의 가치관이 혼란해지고 선생님에 대한 심적 저항감마저 들었으나 곧 그와 같은 의문과 저항감은 거대한 파도를 맞은 모래성처럼 맥없이 무너져버렸다. 살벌한 폭언과 폭력도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되자 나는 그만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운명으로 여기고 순응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입학 후 첫 수업에서 어떤 교사는 “난 원래 아주 착한 사람이다. 하지만 난 너희들이 하기에 따라 천사도 악마도 될 수 있는 사람이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그에게서 천사의 모습을 기대했지만 그는 늘 악마의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나는, 나를 포함해 우리 반 급우들이 딱히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길래 그가 늘 악마의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천사의 모습은 어떻게 해야 볼 수 있는 건지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끝내 그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는 종종 “조선놈(혹은 조센징)들은 맞아야 돼!”라고 말하면서 호되게 때리곤 했는데 이 때문에 나는 한동안 그가 원래 일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었다.


또 다른 어떤 교사는 당구 큐대를 깎아서 만든 자작 몽둥이를 ‘색채의 마술사’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그는 “이게 말이야, 처음 맞았을 때는 살이 빨간색이 됐다가 조금 지나면 멍들어서 파란색으로 변해. 쫌 더 지나면 멍이 옅어지면서 노란색이 되지. 즉 빨강! 파랑! 노랑! 색의 삼원색을 만들어 내니까, 그래서 색채의 마술사인 거야.”라고 껄껄 웃으면서 본인만 즐거운 우스개를 하며 박장대소했다. 그냥 농이라고 생각했지만 이후에 이 마술사는 정말로 많은 아이들의 몸에서 삼원색을 기똥차게 뽑아냈다.(사실 색의 삼원색이 빨강, 파랑, 노랑은 아니다.)


또 용의 검사를 한다고 아이들을 모두 일으켜 세운 다음 바지를 내리고 열중쉬어를 시킨 다음 팬티를 살펴보면서 “넌 왜 팬티가 이리 누렇냐?”, “팬티 입고 오줌 싸냐?”, “넌 누나 팬티를 훔쳐 입고 왔냐?”라고 망신을 주고 조롱하면서 몽둥이로 머리를 딱딱 때리던 변태 같은 교사도 있었다. 또 자신에게 소개해줄 예쁜 누나나 이모가 있냐고 물으면서 재미 삼아 학생들을 툭툭 때리며 가지고 놀기도 했다. 그 어떤 대답을 하든지 간에 별의별 구실을 들어 그의 몽둥이는 절대로 가만히 있는 법이 없었다. 몽둥이가 신들린 춤을 출 때마다 악기처럼 활용되는 앳된 학생의 작은 머리는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쌓아온 많은 기억들과 사랑 같은 따뜻한 감정이 담겨있는 ― 귀중한 머리가 아니라 그저 심심풀이로 희롱당하는 한낱 장난감 대갈통에 지나지 않았다.


교탁에 가래침이 묻어있다고 대대적인 범인 색출작전을 벌인 교사도 있었다. “누구야? 어떤 개xx냐?”고 몹시 흥분해 몽둥이로 교탁을 마구 내리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순순히 자수할 강심장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모두의 눈을 감게 한 뒤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는 사람은 이름을 써내라고 했으나 아무도 이름을 써낸 이가 없었다. 더욱 화가 난 교사는 60명 아이들을 모두 일으켜 세운 뒤 너희들은 모두 공범이니 한 명씩 앞으로 나와 가래침을 핥아서 없애라고 했다. 설마... 설마... 홧김에 그냥 하는 소리겠지라고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첫 번째로 불려 나온 학생이 주저하며 가래침에 입을 대지 못하자 몽둥이로 인정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매를 이기지 못한 학생은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끈적한 가래침에 혓바닥을 대고 할짝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거의 울상이 되어 자리로 돌아온 친구의 표정을 보면서 앞으로 내가 겪게 될 사태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와 제멋대로 뛰는 가슴을 도무지 진정시킬 수 없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학생도 똑같이 가래침을 핥은 뒤 울상이 되었고 결국 내 차례까지 오고야 말았다.


앞서 여러 아이들의 침이 덧칠된 가래침은 번들번들해져 흡사 빵에 들어있는 슈크림 같았다. 나는 천천히 몸을 숙여 가래침 쪽으로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이윽고 몇 cm앞에 이르자 눈을 질끈 감고 혀를 내밀었다. 눈을 감았음에도 내민 혀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곧이어 혀끝에 미끈한 것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약간 시큼한 맛이 느껴졌을 뿐이지만 여러 사람들의 침이 더해진 더러운 가래침에 내 혀가 닿았다는 생각만으로 속은 한없이 울렁거렸다. 가래침에 닿았던 혀를 차마 입속으로 다 집어넣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자리로 돌아왔다. 단순히 매를 맞는 것과는 전혀 다른,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형태의 고통이었다.


나를 비롯해 모든 우리 반 친구들은 그날 그렇게 교탁에 얼굴을 처박았다. 악몽과도 같았던 시간이 끝난 후 교사는 한껏 의기양양해진 얼굴로 “느그들이 뱉은 가래침 맛보니까 어때? 맛 좋지?”라고 이죽거리면서 교실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날, 광기 어린 교사에 의해 해코지를 당한 피해자는 나를 포함해 모두 60명이었다. 나는 이후로 지금까지도 그때의 가래침이 연상되어 슈크림이 들어간 빵을 먹지 않게 되었다.


‘본디 잔인한 사람이 교사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교사를 하다 보니 사람이 잔인해지는 것일까?’ 나의 이 같은 의문은 점점 고조되어 갔다.




3학년 때 담임이었던 교사 또한 특출 났다. 그의 얼굴에는 X자 형태의 깊은 인디언 주름과 더불어 윗입술과 턱에 흉터가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조폭과 같이 험상궂은 인상이었다. 공업과목 담당이었던 그는 수업 중에 시도 때도 없이 이런저런 질문을 했는데 대답이 시원찮을 경우 50cm짜리 플라스틱 자를 꼬나쥐고 양쪽 뺨을 번갈아가며 사정없이 때렸다. 너무 세게 때린 나머지 두꺼운 자가 큰 파열음을 내며 몇 조각으로 부서져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냉혈한이었던 그는 “넌 운이 좋은 거야, 자가 부러지면 충격이 분산돼서 덜 아프니까 말이야.”라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중간, 기말 시험점수가 나오는 날엔 전 과목을 종합해 틀린 개수대로 뺨을 때렸다. 대부분 과목별로 담당 교사들에게 이미 매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담임차원에서 한 번 더 특별 보너스를 지급했던 것이다. 어떤 때는 엎드려뻗쳐를 시켜놓고 대걸레에서 빼낸 기다란 나무 자루를 들고 홈런타자처럼 휘둘러 때렸다. 너무 세게 때리는 까닭에 하루에 다 맞지 못하고 며칠에 걸쳐서 나눠 맞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담임교사가 어떤 사람인지를 똑똑히 알게 해 준 일이 생겼다. 여느 때처럼 친구와 나는 학교가 끝나 재잘거리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학교 부근 골목 입구에서 낯선 형들이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도망치면 금세 잡힐 만한 거리여서 감히 도망갈 엄두도 못 내고 순순히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른바 만만한 학생들의 삥을 뜯는 동네 불량배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갈아서 날카롭게 만든 일자 드라이버를 눈앞에 들이 밀고 위협하면서 장님되기 싫으면 돈 가진 거 다 꺼내라고 했다. 친구와 나는 속절없이 가진 돈을 모두 내놓고 주머니를 뒤집어 검사까지 받고 나서야 겨우 풀려났는데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담임 선생님과 마주쳤다.


나는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기분이었다. “선생님! 이 골목에 돈 뺏는 형들이 있어요. 저하고 경호가 방금 돈 뺏겼어요.”라고 말했는데 놀랍게도 그는 발걸음 속도를 잠시 줄이는가 싶더니 “바쁘다.”라고 무표정하게 한마디 하고는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나는 뺏긴 돈도 되찾고 못된 형들을 붙잡아 혼내주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선생님의 너무 황당한 행동에 말문이 막혔다. 우리는 무서운 형들이 다시 나타날까 두려워 급히 자리를 떴다.


그는 언제나 우리에게 큰소리를 치고 힘을 과시했기에 교실 안은 물론 교실 밖에서조차 항상 거침이 없으며 세상에 두려울 것 하나 없는 선생님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고작 학교 주변에서 중학생 삥이나 뜯던 불량한 고등학생 몇 명 따위를 상대하기 두려워 궁색한 변명을 하고 꽁무니를 빼버린 것이다. 그렇게 그는 그날 선생님을 떠나 어른으로서, 인간으로서 너무 초라하고 면이 서지 않는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교실에서 여느 때처럼 똑같이 아이들에게 큰소리를 치며 몽둥이를 세차게 휘둘렀다.


그랬다. 그는 플라스틱 자와 나무 몽둥이를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로 삼아 힘없고 어린 제자들에만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좁디좁은 20평 남짓한 교실 안에서는 여포(呂布) 행세를 했지만 교실과 교문을 나서면 그저 아무것도 아닌, 그냥 겁 많은 보통 아저씨에 불과했다. 이제 내게서 그는 힘세고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가 때리는 매가 여전히 아플지언정 더 이상 사람 자체가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올림픽 개최국이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은 잔혹한 시대이자 미개한 야만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더욱 억울하고 화가 나는 건 그들이 육체적 고통을 가했다는 사실보다 정신적인 상처를 주고 ‘가스라이팅’을 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납치범의 별 것 아닌 친절에 고마움을 느끼다 나중에는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심지어 변호하기까지 하는 ‘스톡홀름 신드롬’처럼 말이다. 폭력을 일삼던 교사가 어느 날 내게 작은 한 조각 자비라도 베풀 때면 한없이 고마운 기분이 들었다.


어떤 친구는 시험시간에 작은 부정행위를 하다가 발각이 되었는데 시험감독교사는 0점 처리 대신 친구의 뺨따귀를 인정사정없이 마구 때렸다. 그러면서 “이 새끼야, 퇴학시키지 않고 몇 대 때리고 끝내주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라고 말했는데 나중에 그 친구는 개구리 볼처럼 퉁퉁 부은 뺨을 매만지면서 나에게 “정말 다행이다. 그래도 난 ○○○선생님이 좋아.”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매일 폭력과 고통이 반복되면 처음에는 힘들지만 곧 그러한 부조리에 순응하고 익숙해지게 된다. 폭력을 매개로 한 그들의 가스라이팅은 우리로 하여금 그처럼 인권이 처참하게 유린된 비정상적인 삶을 누구나 감내해야 하는 지극히 당연한 일인 양 착각하게 만들었다. 이는 자칫 잘못된 가치관과 인생관으로 빠질 수도 있는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마음의 그늘을 만들었다.


그들은 종종 ‘너희를 위해서 사랑의 매를 드는 거다.’라고 역설했지만 정말 사랑해서 그러는 게 맞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이 그토록 학생들에게 가혹하게 굴었던 속내를 솔직히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다. 난 그들처럼 사람을 때려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많은 학생들을 보다 손쉽게 통제하고 또한 자신들의 업무를 편하게 하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그저 짐작할 뿐이다.


소위 말하는 ‘사랑해서’, ‘너를 위해서’, ‘나중에 잘되라고’ 따위의 구실은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헛소리라 생각한다. 피멍이 들도록 몽둥이로 때리고, 귀싸대기를 올려붙이고, 발길질을 하고, 멱살을 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날아차기를 하고,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고, 성기를 움켜쥐고, 친구끼리 맞따귀를 때리게 하고, 가래침을 먹이는 등의 행위가 그 어떤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인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수 있겠는가? 불량배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나 몰라라 내뺀 사람을 어떻게 스승이라 부를 수 있을까?


다른 학교도 그랬겠지만, 우리 학교도 매년 5월 15일 스승의 날이 되면 전교생을 동원한 행사를 거행했다. 천사와 악마의 모습을 가졌다는 스승님도, 색채의 마술사를 데리고 있는 스승님도, 예쁜 누나와 이모를 밝히는 스승님도, 가래침의 맛을 알게 해 준 스승님도, 36계 줄행랑을 친 스승님도 모두 운동장에 한데 모여 무려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빨간 카네이션을 당당히 가슴에 단 채 제자들이 불러주는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네~♪’라는 노래를 들었다. 그들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스승의 날만큼은 폭언을 하지도 때리지도 않았다.


“… ….”


그로부터 어느덧 한 세대가 지났다.


2010년대 경기도 교육청을 시작으로 전국 시·도 교육청에서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지고, 2023년 개정된 초·중등 교육법 시행령에서 「학교의 장과 교원은 법 제20조의 2에 따라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분야와 관련하여 조언, 상담, 주의, 훈육·훈계 등의 방법으로 학생을 지도할 수 있다. 이 경우 도구, 신체 등을 이용하여 학생의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해 교육 현장에서 모든 체벌을 금지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참 씁쓸한 것이 그와 같은 구태와 악습이 사라진 데는 폭력교사들의 통렬한 자기반성을 통한 의식의 개선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컸다는 점이다.


여러 이유들이 있지만 특히 학령인구의 감소와 더불어 집에서 귀하게 자란 학생들의 의식 변화와 기술 발전에 따른 휴대전화의 보급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그 실례로 가녀린 여학생의 얼굴을 주먹으로 세차게 때리는 남교사, 남학생의 따귀를 수십 차례 때리고 급소를 걷어차는 여교사의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와 공분(公憤)을 샀던 일을 들 수 있다. 그 덕분에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하는 교사들의 민낯이 수면 위로 적나라하게 떠올라 결국 공론화를 거쳐 관련법이 하나둘 제정되게 된 것이다. 미개하고도 야만스러운 교사들이 벌였던 가혹행위와 폭력은 마침내 사라져 이제 영화나 소설, 만화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라틴어로 깨끗한 석판(石板)이라는 뜻을 가진 ‘타불라 라사(tabula rasa)’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어떤 기제(機制)도 없이 마치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와 같은 빈 마음을 갖고 태어났다가 자라면서 감각적인 지각활동과 경험에 의해 흰 종이를 채우면서 마음이 형성된다는 인식론이다. 이는 '태어나는 것인가? 길러지는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서 후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교육하는 데 있어 아이들 마음속 순수한 하얀 도화지 위에 붓을 가져다 대는 것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중요한 일인 지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미성숙한 어린 시절에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사소한 칭찬, 따뜻한 말 한마디, 애정 어린 눈빛과 표정은 도화지를 예쁜 무지갯빛으로 채우게 할 것이나 거친 폭언과 가혹한 폭력은 도화지를 지저분하게 먹칠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리게 될 것임은 불 보듯 자명하다.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기억되는, 야만의 시대에도 아이들을 때리지 않고 늘 인격체로 대해주셨던 몇몇의 참 선생님들이 있었다. 예쁜 무지갯빛으로 하얀 도화지를 채워주셨던 은사(恩師) 김민자, 이준범, 박애준, 김규인, 김휘경, 인선경 선생님께 이 글을 빌어 한없는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아울러 지금 이 순간에도 아이들에게 진심 어린 애정을 갖고 교육현장에서 애쓰시는 이 땅의 모든 참 선생님들께도 이 글을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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