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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장도를 만들어보자

인간문화재 체험

by 팔레오

나는 오래전부터 뭔가 쪼물딱거리고 호작질하는 걸 좋아했다. 프라모델은 말할 것도 없고, 나무를 깎아 아기자기한 물건을 만들거나 생활에 필요한 도구도 종종 만들어 사용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인간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가 은장도를 만드는 영상을 보고는 넋을 잃어버렸다. 금속공예는 넘사벽으로 느껴졌으나 만드는 과정을 찬찬히 보니 인간문화재 수준까지는 한참 못 미쳐도 어느 정도 비슷한 건 만들어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로 도전했다.


인터넷을 뒤져 필요한 공구를 구입하고, 은장도를 만들 재료도 샀다. 주문을 한 순간부터 이미 내 손에는 상상속의 은장도가 쥐어져 있었다.



은을 녹여 은판을 만들고 이를 둥글게 말기 위해서는 많은 장비가 필요하다. 때문에 이를 생략할 수 있도록 925 은봉(은 함량 92.5%로 단단하며 변색에도 강하다)을 샀다. 길이 30cm에 지름 10mm, 두께 0.5mm 짜리가 52,000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은값이 올라 꽤 비싸졌을 듯하다.


또 지름 9mm 짜리 은봉도 꼭 필요하기에 추가로 구입했다. 그 이유는 후에 알게 된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장도를 만들기 위해 황동봉도 구매했는데 은에 비해서는 30cm 짜리가 3,600원 정도로 가격이 매우 착했다.



하나의 장도를 만들기 위해 크게 3토막의 부품이 있어야 한다. 10mm 짜리 두 개, 9mm 짜리 한 개. 은과 황동 두 가지 버전으로 만들기 위해 줄톱으로 먼저 잘라냈다.



은장도는 이름 그대로 칼이니 칼날이 될 쇠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강도가 뛰어난 20cm 짜리 고급 하이스강을 구입했다.(약 8천 원)



은의 무게가 대략 30g이니 1온스짜리 불리언 은화(31.1g) 한 개와 무게가 비슷하다.



이를 조립하면 대략 이와 같은 형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칼날도 없고 위 아래가 뚫려있어 아직 갈 길이 멀다.



뚫려 있는 쪽을 막기 위해서는 땜질을 해야한다. 사각형으로 은판을 잘라 땜질을 했다. 여기에 얇은 땜용 은판을 작게 잘라 붕사를 묻힌 다음 불질을 시작했다. 붕사를 묻히지 않으면 땜이 잘 붙지 않기 때문이다. 아파트 가정집에서 하는 불질의 맛이란...



오~ 잘 붙었다. 땜을 잘하기 위해서는 불조절을 잘 해야한다. 잘못하면 전체가 다 녹아내리는 수가 있다. 불질을 하면 시커멓게 변색이 되지만 나중에 광을 낼 것이므로 지금 단계에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나머지도 마찬가지로 불질을 했다. 토치에서 시원스레 터져나오는 소리를 들으니, 마치 대장간에서 풀무질을 하는 대장장이가 된 듯한 기분이다. 난데없는 괴이한 소리에 놀랐는지 마누라가 방문을 확 열어제꼈다. 화들짝 놀라고는 이윽고 '또 시작이네'하는 익숙한 눈빛으로 쏘아본다. 어쩔티비!



역시 잘 붙었다. 흐흐



윗판, 아랫판이 추가되어 아까보다는 중량이 조금 더 늘어났다.



줄질을 해서 깔끔하게 잘라내고 광택 연마도 마쳤다. 그 과정에서 무려 1.29g의 피같은 은이 가루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지름이 작은 은봉(9mm)은 이처럼 굵은 은봉(10mm) 속에 들어가 칼집을 고정시켜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드디어 외형이 완성되었다. 중간에 황동봉을 조금 잘라 넣어 필기구의 느낌으로 변화의 액센트를 주었다.



이제 칼날을 만들 차례가 되었다. 아래 하이스강은 은장도에 사용하고, 위에 있는 낡은 톱은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것으로 하위버전인 황동장도에 사용할 것이다.



탄소강인 톱날을 자르는 것은 쇳가루가 어마어마하게 날리게 되므로 가정집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전동 공구를 들고 나가 야외에서 잘라왔다. 당연히 공업용 마스크도 쓰고 나름 한적한 곳을 찾아 작업했는데 지나가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거, 은장도 만드는 거 처음 봅니까?'

음 생각해보니 처음 보는 광경일 수도 있겠네.



혼을 불어 넣은 두 개의 칼날 외형이 완성되었다. 왠지 귀멸의 칼날 대장장이가 된 느낌적인 느낌~



황동버전과 은버전, 완성되면 어떨지 기대가 크다. 두구두구~



그러나... 열처리 실패로 황동버전 칼날이 부러지고 말았다. ㅠ

불에 달궜다가 칼날 부분부터 단계별로 식혀야 했는데 한방에 담궈버린 것이 문제였다. 때문에 너무 단단해진 나머지 탄성이 사라져 조금 휘어보았는데 뚝하고 부러진 것이었다. 사람들의 눈총까지 받으면서 만든 칼날은 결국 빛도 보지 못하고 개죽음 아니 허망한 최후를 맞이했다. 내가 미안하다아~


그래서 황동버전은 일단 보류하고 다른 버전의 은장도를 급 설계해 제작해 보기로 했다.



이번엔 부품이 더 늘었다. 고리가 있는 은장도를 만들기 위함이다.



아까와 동일한 땜질이다. 시원한 불질. 파이어~



이번에도 역시 잘 붙었다.



그 다음 고리를 연결할 부속을 땜질했다. 귀엽게 생긴 이 부품은 전문용어로 '메뚜기'라고 부른다. 조금 두꺼운 은판을 잘라 줄톱으로 깎아 성형한 뒤 드릴로 구멍을 뚫었다. 이 쪼그만 것도 만드는 데 나름 시간이 꽤 걸린다.



붙긴 붙었는데 은땜이 과하게 들어갔다. 녹은 은이 위쪽으로 타고 올라와 메뚜기가 지저분해졌다. 처음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 번에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하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음엔 땜질용 은을 절반 정도만 써야할 듯 하다. 아쉬운대로 줄질을 해서 모양을 다듬어 주는 수밖에.



모서리 부분을 양철가위로 잘라내고 다듬은 다음 열심히 광을 냈다. 이번 은장도는 앞서와 달리 무광 처리를 했다. 무광처리 과정을 찍지는 못했지만, 전통 방식에 따라 물과 모래를 섞어 위에서 장도에 떨어뜨리면 모래에 의해 미세한 흠집이 생긴다. 이를 전문 용어로 '모래맞춤'이라고 한다. 모래맞춤을 수십 차례 반복하면 샤방샤방, 뽀샤시한 무광이 되는 것이다. 유광과 무광 두가지를 만들어 비교해 보니 개인적으로는 무광이 좀 더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유광과 무광의 차이를 느껴보자. 과연 어느 쪽이 더 나아 보이는지?



이런식으로 칼날이 들어가면 되는데 아직 날이 완성되지는 않았다. 단단한 하이스강을 깎아 날을 세우려면 불질을 해서 빨갛게 달군 다음 천천히 식히는 열처리를 해야한다.



그 다음엔 무른 상태가 된 쇠에 줄질을 해서 칼날 모양을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무른 상태가 되었다지만 쇠로 쇠를 깎는 과정은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왜냐면 쇠를 깎아내느라 팔이 아픈 것도 문제였지만, 꺄꺄꺅~하는 쇠 깎는 소리가 인정사정없이 고막을 뚫고 들어와 달팽이관을 잡아 조졌기 때문이다. 쇠 긁는 소리, 잘 아실거라 생각한다. 문밖에서 뭐라 뭐라 절규에 가까운 마누라의 소리가 들렸으나 못 들은 척 했다. 응 안 들려~



어느 정도 모양을 잡았으면 작은 줄로 섬세하게 다듬어 주면 된다. 제법 칼 같은 모양이 되었다. 사극 같은 데서 흔히 여자가 은장도로 자결하는 장면이 자주 나와 은장도를 자결용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냥 조선시대 생활용품 혹은 과시용의 사치품 정도로 보는 게 타당하다.



기본 칼날 성형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아직 무른 상태이므로 이걸 그대로 쓴다면 날이 쉬이 무뎌져 금세 몹쓸 물건이 될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열처리에 들어갔다. 천천히 식히면 무른 쇠가 되고, 빠르게 식히면 강한 쇠가 되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치이익~ 열탕에서 냉탕으로~ 마치 냉탕과 열탕을 12번씩 오가는 우리 동네 목욕탕 할배를 보는 듯하다. 그거 혈관 건강에 안 좋다던데...



이렇게 두 자루의 칼 부품이 거의 완성되었다.



칼날을 끼우면 이런 모양이 된다.



칼집까지 씌우면 이런 모양이 된다.



칼날을 숯돌에 겁나게 문질러 날을 세웠다. 광이 반질반질, 파리도 앉으면 비명을 지르며 미끄러질 듯 하다. 이제서야 칼이라는 느낌이 확 든다.


그렇지만 이게 끝은 아니다. 마지막 과정이 남았다. 바로 칼날을 고정하는 것!

에폭시 접착제를 쓸까 했는데, 과거 조선시대엔 은장도에 송진을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100% 수작업으로 이루어진 은장도에 에폭시를 쓰는 건 은장도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로 전통 방식에 따라 송진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가정집에 송진이 있을리가 없다. 산에 가서 송진을 몇 방울씩 채취한다 해도 과연 어느 세월에?



아... 생각해보니 집에 송진이 있었다.

마누라 바이올린, 일명 깽깽이 활을 문지를 때 쓰는 사탕같은 게 바로 송진 아니겠는가? 흐흐

들키면 아작날 수 있다는 것 따윈 나중 일이고, 은장도의 완성을 목전에 둔 내게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일 죽더라도 이건 완성해야만 한다는 장인정신이 본능적인 위험을 압도하고 있었으니까. 캬캬캬



허허~ 보글보글 잘 녹는구나. 가스버너 지저분한 건 못 본 척 해주셈.



녹은 송진을 칼자루에 채워 넣고 먼저 유광버전 칼날을 꽂아 넣었다. 앗 뜨뜨~ 무지무지하게 뜨거웠다.



다음은 무광버전 칼날을 꽂아 넣었다. 여전히 뜨뜨뜨...



깔끔하게 잘 들어갔다. 완전히 굳기 전 칼날이 반듯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계속 모양을 잡아주었다.



드디어 유광버전이 완성되었다. 광택과 간지가 그냥 아주 그냥



이렇게 칼집을 끼우면 꼭 들어맞았다. 아아 이 쾌감~



생각해보니 무광버전 고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오래전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굵은 전선의 피복을 벗겨, 순도 99%의 구리선을 끄집어내 고리를 만들었다. 이래서 주워오면 다 쓸데가 있다니까~



그런데 구리색과 은장도 색의 부조화가 눈에 거슬렸다. 진작 이걸 눈치챘으면 손발이 덜 고생했을 텐데...

은과 비슷한 색상의 백동 철사를 가지고 다시 고리를 만들었다. 백동은 구리와 니켈의 합금으로 색상도 좋고 강도도 뛰어나며 잘 변색되지 않는다.



거칠게 잘린 부분을 줄로 갈아주면 고리가 완성~



조심스레 고리를 끼우고 예쁜 술도 달아주었다. 은장도 한자루에 순수 재료비만 6만 원 정도 든 셈이다. 가성비는 좀 떨어지는 듯하지만, 그래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칼이다. 그것도 내손으로 탄생한 칼이니 그 의미가 남다르다.



오오~ 신이시여, 초짜인 제가 과연 이걸 만들었나이까? 앞으로 팔레오는 인간문화재... 까지는 아니고, 좀 덜 된 인간문화재 정도로 불리워도 괜찮지 않을까하는 혼자만의 생각을 하며 은장도 제작기를 마친다.



p.s : 고리 달린 예쁜 은장도는 마눌에게 금세 빼앗겼으나, 아직도 칼날을 고정시킨 누런 것이 깽깽이 송진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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