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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대부도 할머니

대부도 에피소드 1편

by 팔레오

대부도에서 군복무를 하던 시절을 떠올려본다. 그때 알게 된 할머니 한 분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바로 그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아주 오래전에 쓴 투박한 글이기는 하지만, 수정하지 않고 원글을 거의 그대로 옮긴다.




대부도는 모두 5군데의 작은 포구가 있다. 그곳에서 군인들은 어선의 출입을 관리, 기록을 하였고 그것이 곧 어선통제소, 즉 어통소 근무였다.


각각의 어통소마다 분위기가 사뭇 다르고 근무에 있어 장단점이 있었다. 방아머리, 홍성리, 동5리 어통소를 나가게 되면 외지의 행락객들과 자주 접촉도 할 수 있고 여러 가지 먹을 건수가 생기기 때문에 좋았다. 좋게 비유를 하자면 소풍을 가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기습적인 부대장의 순찰이 있을지 몰라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것은 큰 단점이었다.


반면에 남2리, 남5리 어통소는 한없이 고즈넉한 곳이었다. 행락객은 고사하고 현지인 한 명도 보지 못하는 날도 있었으니 얼마나 적막하고 조용한 곳이었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곳은 하루 종일 배 한 척 나가지 않는 버려진 포구였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폐선 몇 척과 흉물스럽게 흩어진 잔해들이 한 때 이곳이 배가 드나들던 포구였음을 겨우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곳에 왜 근무를 나가야 하는지 의문스러웠지만 까라면 까는 군대니까 나가야만 했다. 이곳은 외지고 조용한 곳이어서 순찰이 올 걱정도 없었다. 따라서 마음 편하게 준비해 간 책도 읽으면서 일기도 쓰고, 푹 쉬었다가 오는 그야말로 쉼터나 다름없었다. 당시 이등병이었던 나에게 이곳은 고참들이 득실득실한 내무반에서는 감히 맛볼 수 없는 자유와 해방감을 한껏 느낄 수 있게 해 주던 곳이었다.


점심은 주로 미리 가져다 놓은 작은 가스버너를 이용해 라면을 끓여 먹곤 했다. 반합에 밥과 김치를 조금 가져가 라면과 함께 먹는 맛은 정말 꿀맛이었고 매일 같이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대부도와 와서 그렇게 근무를 선지 보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여느 때처럼 점심을 먹기 위해 물을 끓이려는데 버너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부탄가스가 떨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도보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작은 구멍가게에 가스를 사러 갔으나 공교롭게도 가게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낭패였다.


결국 헛걸음을 하고 돌아오면서 생각을 해보니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가 봐야 대책 없이 쫄쫄 굶어야 하기에 민가에 들러 가스를 얻든지 그마저 안된다면 돈이라도 주고 살 요량으로 눈에 띈 한 집을 찾아 들어갔다.


하필 눈에 띄었던 집은 대문도 없고 싸리나무로 만든 담장마저 거의 허물어진 낡은 기와집이었다. 만약 부엌에서 밥을 짓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면 폐가나 흉가쯤으로 여기고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를 만한 그런 집이었다.


"계세요?" 하고 주인을 부르자 작고 힘없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요?” 하며 부엌에서 할머니가 나왔다.


난 인사를 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근무서는 군인인데 점심을 할 가스가 없어서 그런데요...”하는 찰나 막 할머니가 나온 부엌이 보였다. 장작 아궁이와 무쇠솥, 그 옆에 있는 석유곤로가 보이자 헛다리를 짚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스가 있냐고 물어보았지만 역시나였다.


그렇지만 굶어 죽으라는 법은 없었나 보다. 인심 좋은 할머니는 밥을 차려 줄 테니 먹고 가라고 했다. 그렇지만 기다리고 있을 고참을 두고 나 혼자 먹을 수는 없어 고참을 데리고 오게 되었다. 다소 황송한 마음으로 마루에 걸터앉아 기다렸고 잠시 후 할머니가 차려주신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비록 반찬은 푸성귀였지만 말이다.


할머니는 150cm도 안될 작은 키에 허리가 많이 굽었고 기관지가 좋지 않은지 연신 색색거리는 거친 숨소리를 내었다. 배가 어느 정도 불러오자 몸도 부실한 할머니에게 일을 시켰다는 것이 너무 죄송했다. 그런 나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머니는 앞으로 계속 와서 점심을 먹으라고 했다. 그러나 그 말대로 다음날부터 밥을 먹겠다고 할머니 집을 뻔뻔하게 찾아가지는 못했다.


비가 억수같이 오던 늦가을의 어느 날 다시 그 할머니 집을 찾았다. 나 역시 그랬지만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 추위를 참기 어려웠던 고참이 몸이라도 좀 녹이자고 찾게 된 것이었다. 어차피 배 한 척 나가지 않는 곳에서 비를 맞으며 계속 밖에 있기는 그랬다. 할머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반갑게 맞이하였고 우리는 따뜻한 방에 들어가 언 몸을 녹일 수 있었다. 넉살 좋은 고참은 이내 아랫목에서 코를 골며 잠들어 버렸고 나는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전히 할머니의 숨소리는 고르지 못했고 건강상태도 별로 양호하지 않은 듯 보였다. 할머니의 이름은 ‘이순이’였고, 82세인 할머니는 외지에서 대부도로 16세에 시집을 와 지금껏 살아왔다고 했다. 남편은 결혼한 지 10년도 못되어 세상을 떴고 자녀도 없어 이후로 줄곧 혼자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듣자 참으로 안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



방을 찬찬히 둘러보니 그 흔한 TV도 없고 보온밥통이나 옷장 같은 기본적인 세간살이조차도 없었다. 한쪽 벽면에 누군가 해주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할머니의 영정사진이 있었고, 모서리에는 면사무소에서 주었다는 쌀 2가마가 있었으며 두꺼운 이불과 동그란 베개 하나가 있었을 뿐이었다. 치아 상태가 좋지 못한 할머니는 빵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죽을 쑤어 식사를 한다고 했다.


서울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할머니 말에 나는 매우 놀랐다. 언제 서울 나들이라도 한번 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등병 주제에 말이다. 당시 군대에서는 매주 월요일 아침메뉴가 햄버거였다. 이후 할머니 집을 찾을 때면 남아도는 그 햄버거용 빵을 잊지 않고 챙겨서 가져갔다. 내가 첫 휴가를 갔다 올 때 부모님은 우황청심원을 몇 개 챙겨주었다. 건강상태가 좋은 내게 별 필요 없는 그 우황청심원은 오히려 그 할머니에게 필요할 듯하여 한사코 마다하는 할머니 손에 기어이 쥐어드렸다.


언제부터인가 그 할머니는 내가 아주 어릴 적 돌아가신 나의 외할머니를 닮아있었다. 자그마한 체구와 주름살 많은 얼굴, 검고 거칠며 앙상한 손가락, 그리고 싫지 않은 할머니의 냄새에서 나의 외할머니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해가 바뀌고 이듬해 3월, 미처 할머니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채 군복무 중 다시는 못 올 대부도를 떠나게 되었다. 그때 내가 제대를 하게 되면 반드시 대부도를 다시 찾아 할머니를 서울로 모셔와 서울 구경을 시켜드리겠노라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나는 휴가를 나와 어머니에게 그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외할머니를 닮았다는 말에 혹했는지는 몰라도 그 할머니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나의 생각에 동의해 주었다.


그리고 어느덧 세월은 흘러 난 제대를 했고 다시 찾은 자유와 편안한 일상에 빠져 모든 것을 잊고 살았다.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군생활을 애써 기억에서 지우려 했고 나도 모르는 사이 할머니도 그와 함께 저절로 잊혀 버렸다. 몇 해가 지났을까? 다시금 군생활을 회상할 만큼 시간이 더 지났을 무렵, 할머니의 존재가 문득 생각났다.


과연 아직도 할머니가 그곳에 살아 계실까? 건강상태도 별로 좋지 못해 보였던 할머니였는데 지금껏 무고하게 살아 계실까? 속단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을 것 같다는 비관적인 생각도 들었다.


내가 대부도를 영영 떠나고 난 뒤에도 어쩌면 할머니는 "얘가 왜 요즘엔 밥 먹으러 안 오지?" 하며 밥을 넉넉히 해두고 계속 나를 기다리셨을지도 모른다. 평생을 고독 속에서 살아오셨을 할머니에게 난 또 다른 고통을 안겨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 와서 대부도를 다시 찾기가 너무 겁이 난다. 그 집에 갔을 때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 너무 두렵기 때문이었다.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으로 할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조금만 더 일찍 할머니를 찾아뵐 수 있었더라면...


“왔어? 밥 차려줄게 먹고 가”라는 할머니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오늘따라 그 할머니가 너무나 그립고 보고 싶다. 누구보다 더...






이 글은 이다연 작가님의 '섬 thing special/ 대부도 (https://brunch.co.kr/@5638ac18e0044b6/180)를 읽고 게시하는 글로서,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어 주신 이다연 작가님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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