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
1980년대 TV에서 방영되어 전설이 된 만화영화가 있다.
바로 은하철도 999다.
TV용 국산 만화영화가 전무하던 시절, 일본에서 수입되어 방영된 이 은하철도 999는 당시 아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악당과 맞서 싸우는 로봇만화도 아니고, 순정만화도 아니고, 명작동화만화도 아닌 여러 가지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매우 특이한 만화영화였다.
999호를 타고 안드로메다 저편 기계의 몸을 공짜로 주는 행성에 가서 엄마와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게 꿈이었던 철이는 기계백작에게 엄마가 사냥당해 갑자기 고아가 된다. 철이 앞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메텔이라는 여자가 나타나 999호의 승차권을 주고 함께 여행을 시작한다.
은하철도 999의 원작자인 마츠모토 레이지(松本零士)는 2023년 2월 13일에 급성 심부전으로 타계하였다. (향년 85세)
마츠모토 레이지는 은하철도 999의 창작배경에 대해 과거 젊은 시절 청운의 꿈을 안고 시골에서 기차를 타고 도쿄로 갈 때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것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소설 <설국>에서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는 대목이 연상되는 이야기다.
여기에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의 동화 <은하철도의 밤>을 절묘하게 조합해 새롭고 멋진 이야기를 창조해 낸 것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마츠모토 레이지의 유작이 된 만화책 일본어판 은하철도 999를 소개한다. 모두 18권으로 1979년에서 1981년 사이에 발행한 만화책이다. 각 권의 가격은 350엔. 대략 40년이 넘은 책이지만 근래에 만들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종이질도 좋고 인쇄 상태도 좋다.
1, 2, 3권
4, 5, 6권
7, 8, 9권
10, 11, 12권
13, 14, 15권
16, 17, 18권(완)
중간 기착지를 떠나 새로운 행성으로 출발하는 은하철도 999!
어두운 우주를 철로도 없이 날아가는 증기기관차의 비현실적인 모습은 오히려 우주라는 공간을 낭만적인 곳으로 느끼게 한다. 누구라도 999호를 타고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할 것 같다.
잠든 철이(테츠로)를 지켜보는 메텔의 얼굴이 우울해 보인다.
철이를 속이고 있고, 앞으로 닥칠 철이의 시련과 미래를 알고 있다는 데서 오는 양심의 가책 때문일까?
엄마를 잃은 철이에게 때로는 엄마와 같은 존재, 때로는 친구나 연인 같은 존재이기도 한 메텔...
사실 메텔이라는 이름은 라틴어 'mater(어머니)'에서 따온 말이다.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레퍼토리는 도둑이나 강도가 999호 승차권을 훔쳐가거나 뺏어가는 이야기다. 지구에서 안드로메다 은하계까지 가는 999호의 승차권은 어마무시하게 비싸다. 얼마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승객에게 사용하라고 금화가 가득 든 주머니를 서비스로 지급할 정도니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일 듯하다. 그러니 누구나 승차권을 탐낼 수밖에...
그런데 조금 웃긴 것은 현재의 비행기표도 남의 것을 사용하지 못하는데, 미래의 그 엄청난 999호의 종이승차권은 훔치든 빼앗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임자가 되는 설정이다.
현재와 미래의 999호가 시공이 틀어진 공간에서 서로 만났다. 묘한 것은 메텔이나 차장은 그대로인데 옆에 붙어있는 아이가 다르다. 하나는 주인공인 '철이', 또 하나는 '레드릴'이라는 소년이다.
둘 다 똑같은 전사의 총을 가지고 있고, 고유번호까지 동일하지만 레드릴의 총이 더 낡아있다. 그렇다면 레드릴과 함께 있는 메텔이 미래의 모습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철이는 어떻게 된 것일까? 총이 낡을 만큼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는 메텔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왜 철이와 같은 어린 소년을 데리고 또 여행을 하는 것일까?
이는 작가가 던진 떡밥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작가는 이미 고인이 되었으므로 상상과 판단은 각자의 몫으로~
'시간성의 해적'편이다. 이 에피소드만으로도 장편의 애니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구성이 좋고 재미와 감동, 여운도 있다. 시간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기계인간인 '레류즈'가 하록선장을 사칭하는 형편없는 사내에게 마음을 빼앗겨, 자신의 삶을 그르친 데 대한 후회와 자신의 방관 또는 협조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속죄로서 시간이 급격히 흐르도록 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간의 마음을 다시 느끼게 만들어 준 철이에게 작별인사를 하고는 기타를 치면서 처연한 노래(想い出なみだ色 : 추억의 눈물빛)를 부른다. 꽤 괜찮은 노래지만 당시에는 일본어 노래를 그대로 내보낼 수 없어 '기러기'라는 우리나라 동요를 조금 변형시켜 부르는 것으로 대체했다.
불멸이나 다름없던 기계의 몸을 가진 레류즈는 빠른 시간의 화살을 맞아 녹슬고 부스러지며 결국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맞이한다. 슬픈 얼굴로 노래를 부르면서 서서히 부스러져가는 장면은 어린 시절 꽤나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은하철도 999에는 라면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철이는 다른 그 어떤 음식보다도 일본식 라멘을 좋아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는 마츠모토 레이지가 라면회사의 대주주였기 때문에 자신의 만화에 의도적으로 라면 먹는 장면을 많이 넣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앞서 시간을 조종할 수 있는 기계인간인 레류즈의 친동생인 '류즈'도 같은 능력을 가진 것으로 나온다. 류즈 역시 가족 DNA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언니의 경우처럼 형편없고 이기적인 남자에게 마음을 뺏긴다. 그 남자의 뜻을 따라 원치도 않은 기계인간이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참하게 버림받는다.
그 충격으로 흑화한 나머지 시간을 제멋대로 조종해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마녀가 되어버린다. 이 해골들은 류즈에 의해 살해된 많은 희생자들 가운데 일부다.
무섭고 악한 여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만화영화 작가가 꿈인 마음씨 고운 반딧불 행성의 '플레어'도 있다. 호텔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플레어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철이가 동정심에 돈을 그냥 쥐어주자 자신은 마음마저 가난하지 않다고 말하며 대가 없는 돈을 정중히 사양한다.
이후 철이에게 자신의 집에 와달라고 부탁하는데, 집으로 찾아온 철이에게 자신이 소중히 여기던 만화 콘티를 보여주며 살 마음이 있으면 사달라고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정전이 되어 어두워지자 철이는 발광하는(?) 플레어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반딧불 행성에서 온몸 전체가 빛이 나는 사람은 귀족이고 듬성듬성 빛이 나는 사람은 천민이다. 자신의 가난조차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플레어였지만, 태생적으로 듬성듬성 빛이 나는 존재임을 의도치 않게 철이에게 보이게 되자 그것 만큼은 너무나 부끄러웠는지 자신을 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
호텔로 돌아온 철이는 플레어의 콘티를 보고 감명받아 돈을 지불하는데 콘티도 그냥 돌려준다. 나중에 만화영화를 만든 뒤 콘티가 필요 없어지면 그때 돌려받겠다고 말하면서... 만화영화판에서는 '훗날 플레어는 유명한 작가가 되어 만화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철이가 그 만화영화를 보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는 내레이션이 나온다.
반딧불 행성에서와 같이 별 것 아닌 시시껍적한 걸로 사회적 계급이 나뉘고 대우가 달라지는 것은 비단 먼 별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 현실에서도 이처럼 별 것 아닌 걸로 계급이 나뉘고 사람들의 평가가 달라지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은하철도 999에서는 각 행성마다 온갖 종류의 다양한 인간군상이 나온다. 이는 바로 우리 세상을 반영한 모습이다. 현실의 축소판이 아니라 우주확장판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이와 같은 에피소드들이 옴니버스와 유사한 형식으로 계속 진행되며, 이를 마주하는 철이를 통해 삶과 철학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준다. 만화를 가장한 심오한 철학서이자 멋진 성장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다.
수백 억 개의 별이 모인 작은 은하계가 우주 공간을 떠돌다가 메텔의 손에 들어왔다. 끝없는 우주를 기준으로 보면 우리 은하도 이와 같이 작은 존재일 것이다.
철길이 끝나도 그대로 곧게 하늘로 날아가는 기차의 모습은 정말 기차다. (참을 수 없는 아재 드립)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너무 멋진 장면이다. 나도 저 기차를 타고 우주로 날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메텔도 함께
철이는 999호를 타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먼 길을 떠나며 새로운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다.
"젊은이가 일생에서 단 한번 맞이하는 여행을 시작할 거야"
"실패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도 돼"
"이제 잊을 수 없는 여행을 시작할 거야"
"너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어"
철이는 든든한 조력자 메텔과 함께 수많은 행성을 여행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면서 가치관을 형성해나간다. 결국 최종 목적지인 안드로메다의 기계제국 프로메슘 행성에 도착한다. 여기서는 모든 사람들을 무상으로 기계의 몸으로 바꿔준다. 오랜 시간 소망했던 꿈을 이루려는 순간, 철이의 눈에 보인 것은 영원한 삶을 가진 인간들의 방탕하고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언제 일하고 공부를 해요?"
"우리 기계인간은 영원히 살 수 있지, 골치 아프게 일하거나 공부같은 건 안 해도 돼"
"시간이 있으니까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나요?"
"우리한테는 무한의 시간이 있어, 하고 싶을 때 하면 된다고"
'영원한 생명을 손에 넣었다면 그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을텐데...'
철이는 이들을 보며 회의감을 느낀다.
이어 투신 자살을 하는 기계인간을 보게 된다.
그는 죽어가면서 "영원히 산다는 건 쓸모없이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거야, 죽는 편이 나아"라고 말한다.
철이는 '인간의 생명은 좀 더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나?' 라고 자문한다. 마침내 '끝이 있는 생명이라 더 의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래서 유한한 삶이 더 가치있다'는 결론을 내리며 그토록 소망해왔던 기계인간이 되기를 거부한다.
철이는 자신이 꿈꿔왔던 유일한 소망, 우주 저편 안드로메다에 이르러 영원한 삶을 얻고자 했지만...
그 기나긴 여행의 끝에는 메텔과의 슬픈 이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난 언젠가 헤어질 때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나는 청춘의 환영. 젊은이들에게만 보이는 흐르는 시간 속을 여행하는 여자"
"메텔이라는 이름이 너의 추억 속에 남는다면, 나는 그걸로 족해, 나는 그걸로 충분해"
이별의 결말을 맞이했지만 메텔과의 여행을 통해, 철 없던 철이의 마음은 크게 성장한다.
"안녕 소년의 시절이여"
"이제 소년은 어른이 된다."
이 모든 것들을 처음부터 메텔은 알고 있었으리라...
어린 시절, 즐거움과 좋은 추억을 안겨준 '마츠모토 레이지'작가에게 경의를 표하며, 안드로메다 우주 저편 어딘가에서 메텔과 같이 영원한 여행을 하고 있을 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