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2)
빈곤한 이민자의 삶
같이 사는 소장님 중 한 분이 포커 치는 걸 좋아했다.
도박을 싫어하지만, 짬에서 밀리기에 어쩔 수 없이 머릿수를 채우기 용으로 포커판에 앉았다.
포커는 최소 3명은 돼야 패 돌리는 맛도 있고 배팅도 하기에, 소장님 인도네시아 5년 지기 친구이자 인테리어 하청업체사장까지 섭외해 3명이서 포커를 쳤다.
억지로 포커를 치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따라 인테리어 사장님이 연달아 큰판을 먹었다.
이상했다. 배팅이 그전과 다르게 너무 당당하다. 그러다 내 차례가 와서 패를 잡았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카드가 몇 장 부족한 것 같았다.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카드는 많이 안 잡아 봤어도, 초등학교 시절 학종이는 신물 나게 잡아봤다.
초등학교 시절 학종이 치기를 할 때. 50장이 넘어가면, 학종이를 세지 않고 손감각으로 배팅을 했다. 내 거 이만큼 친구 거 이만큼. 그럼 친구도 손대중으로 내 것과 본인의 학종이를 확인 후, 게임에 참여한 두 사람이 동의하면 게임을 진행하던 방식이었다. 실제로 세어보면 많아봐야 두어 장 차이였다. 그 시절의 감각이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
카드가 몇 장 부족하지만, 사회적 지위상 막내이기에 섣불리 말할 수 없었다. 증거가 필요했다. 누가 숨겼을까. 일단 의심이 가는 건 오늘 돈을 많이 딴 거래처 사장님이다. 그렇다면 카드를 어디에 숨겼을까. 타짜처럼 손으로 휙휙 숨겼을 것 같지 않다. 허술하게 어디에 숨겨놨을 태지. 가령 판때기로 쓰는 모포아래 말이다. 판때기 위에 올려진 카드를 모으며 실수인 척 모포를 확 끄집어 당겼다. 모포 위에 올려놓은 소장님의 맥주가 쏟아지고 돈도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인테리어 사장의 발 밑으로 패가 우수수 떨어졌다.
어이가 없다.
어허허허 하며 실수인척하지만, 그 자리에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 이후로 더는 포커를 치지 않았다. 포커를 치지 않아 좋았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의문이 남았다. 영업하러 왔을 텐데 왜 저랬을까. 타짜도 아니면서 어설픈 장난질을 한 걸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인테리어 업체 사장은 당시에 많이 어려웠던 상황이라고 들었다. 10년 넘게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일을 하다 정착한 경우다. 인도네시아 내 건설사를 다니며 돈을 모아 독립 후, 식당도 하고 뭣도 했는데 다 잘 안 풀렸다. 거기다 부인이 병으로 큰 수술하는 아픔까지 겪었다. 그사이 모아놓은 돈은 사라졌고 나이는 50대 중반이 됐다. 물러 설 곳도 물러 나서도 안 되는 상황이 왔다.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고뇌를 하고 패를 숨겼을까. 거래처 소장과 포커를 치면 돈을 잃어줘야 하지만, 돈을 잃으면 당장의 생계가 곤란한 상황.
외국에서 돈이 떨어진 이민자의 삶은 정말 비참하다. 외국 나가서 한국사람 조심하라는 말이 그냥 생긴 말이 아니다. 돈이 떨어져 한국으로 갈 수도, 그렇다고 현지에 있을 수도 없는 사람들은 상상이상의 나쁜 짓을 저지른다. 그에 비하면, 그 사장님은 나름 마인드 컨트롤을 잘 한 셈이다.
그날 카드로 장난질 치다 걸린 사장은 어허허허 웃으며 판돈을 놓고 떠났는데, 같이 포커를 치던 소장님은 떠나는 사장에게 딴 돈은 들고 가라며, 판돈에 자신의 돈까지 얹어 한국돈으로 20만 원가량을 억지로 손에 쥐어줬다. 당시에는 인연을 끊으려고 저러나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소장님은 그 짧은 순간 상대방의 처한 곤궁한 상황을 알아차였던 것 같다. 다행히 인테리어 사장은 돈은 없지만, 좋은 친구는 남아 있는 듯싶다.
한국 가서 살기 힘들 것 같다는 A사 차장.
차장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 25년 차 직장인이다. 현장만 25년이다. 한국에서 5년 동안 근무하며 대리를 달고 외국으로 파견됐다. 그 후 중동에서 15년, 인도에서 4년 그리고 인도네시아 1년 차인 차장님이다. 월급도 많이 받고 있고 돈도 많이 모았다고 자랑한다. 그런데 도저히 한국에서 살 엄두가 안 난다며, 지난 20년 동안 한국이 너무 변했음을 투덜거린다. 계산을 해보니 차장은 2002년 월드컵이 지나고 해외현장을 돌기 시작한 것이다.
2002년 즈음을 떠올려본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낭만이 있었던 것 같다. 부모님 이름 대면 슈퍼에서 외상도 줬고, 동네에서 교복 입고 담배 피우는 형들을 보면 진심으로 걱정해서 혼내는 아저씨 들도 있었다. 지금은 그랬다간 큰일 난다. 시간이 지나 내가 그 아저씨들만큼 나이를 먹었지만, 담배 피우는 아이들을 봐도 별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학생들 흡연에는 무감각해지고, 간혹 버스정류장 옆에서 담배 피우는 아저씨들을 보며, "애들이 저런 개념 없는 아저씨만 안 닮아도 좋겠다."는 상상은 한다. 세상이 많이 변하긴 했다. 아니면 내가 이상한 거일 수도 있고.
그렇다면 인도네시아는 어떤가. 동네 슈퍼에는 장부를 쓰고 물건을 사가는 사람이 태반이다. 아이들은 숨어서 담배를 피운다. 혹여나 지나가는 아저씨들이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고 한 마디 씩 해도 달려들거나 하지 않는다. 또한 한국말로 표현하면 오지랖 넓은 행동을 해도 어른이라는 말로 포장이 가능하다. 어찌 보면 한국의 90년대를 닮았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90년대에 일을 시작한 차장님에게는 한국보다 오히려 인도네시아가 더 편할 지도.
"요즘에 한국 가면 담배 필 곳이 없어. 보호구역이다 뭐다. XX 내 집에서 내 맘대로 담배도 못 피워."
90년대와 2020년대의 바뀐 문화만이 문제가 아니다. 차장에게는 더 큰 문제가 있었다.
"20년을 가족들 하고 떨어져 살다 보니, 집이 더 불편해."
저런 상황을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차장의 진심 어린 감정이 느껴진다. 주기적으로 현장을 옮기기에 자신만 외국에서 생활하고 부인과 자녀는 한국에 있었다고 한다. 많이 봐야 일 년에 한두 번이다. 아직까지 차장의 머릿속에는 젓먹이였던 아이가 있는데, 아이는 얼마 전 대학교를 졸업했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지만, 공유한 추억이 없어 이제는 어색해져 버린 가족들이 자신의 집에 있다. 차장이 왜 인도네시아에서 살고 싶어 하는지 알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