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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Dec 16. 2019

공포의 국민교육 헌장

나를 '교육'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비교육적인 '교육 헌장'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 중엔.

여기서 공부라고 하는 것들을 한정 지을 필요가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는 것, 또는 관심사를 공부하는 걸 공부라고 하기엔 애매하다. 그건 취미활동처럼 보니까.

적어도 일반적으로 말하는 공부는 시험이 뒤따르거나 하기 싫은 내용을 외우는 것 따위에 국한되지 않을까?


자기가 좋아하는 걸 열심히 파고드는 건 공부라고 하지 않고, 연구라고 해야 하나? 가령 요즘 아이들이 하는 팬질을 보면 동영상 편집 기술이나 팬 아트, 재치 있고 기발한 글솜씨 등에 감탄을 하게 된다.


요점은 그거다. 절실하게 필요해서 하는 것. 그래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고, 적어도 납득 되는 것.


그런데 준비도 안 되어 있고 그게 뭔지도 모르는데 심지어 회초리를 들고 하라고 하면?

그때부터 헬이 열린다.



나에게는 '공부 포비아' 아니, 정확히 말해 '닥치고 암기 포비아'가 있다.

그 발생 지점을 알려면 많이 거슬러 올라야 한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학교에서 뜬금없이 이상한 문장을 외우라고 했다.


어리디 어린 우리에겐 적어도 "영희야 철수야 노올자." 정도로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사실 평소 대화니까 굳이 외울 필요도 없다.


그 외에 1 더하기 1도 배울 필요는 있었다. 적어도 구멍가게에 가서 100원짜리 내고 10원짜리 과자 하나 산 다음 10원짜리 9개를 거슬러 받아야 하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하지만 적어도 우리 눈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걸 외우라는 거다.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국민교육헌장'이란 걸.


제목부터 맘에 안 들었다. 국민학교에 다니던 우리로서 '국민학교'라는 말은 입에 짝짝 붙는데, '국민교육'은 대체 뭐람?


생소하고 입에서 겉도는 국민교육이라는 말. 거기까진 그래도 괜찮았다. 단어 자체가 낯설지는 않았으니.


그 뒤가 문제였다. '헌장'이라니.

 '헌장? 환장도 아니고?'


현대식으로 아재 개그를 치자면, 굳이 '새(new) 장'도 아니고 헌(old) 장을 왜?


까끌까끌한 제목은 그렇다 치자.


본문 내용은 더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여기서 단 하나의 단어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엄마가 낳아서 '응애~'하고 태어난 거 같은데 대체 무슨 수로 자체적인 역사적 사명을 띤담?


정말로 내가 민족중흥을 위해서 태어났나?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이 난해한 문장을 1인칭 시점으로 쓴 건 가장 큰 에러였다.

차라리 '너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그 뒤에 이어질 문장도 필요하다.) 저를 믿으셔야 한다. 도저히 믿어지진 않겠지만...'


갑자기 그 애증의 원문을 써보고 싶어졌다. 외워서 되는지... 하지만 실패했다.(역시 '아닥 암기'는 안돼.)


원문은 이렇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지금 봐도 사극 대본 외우는 것보다 어렵다.

특히 여기서 꽂히는 대목이 있다.

그 대목은 두고두고 써먹었는데, 특히 우리나라처럼 개인의 소질을 중시하지 않는 학벌 위주의 나라에서 강조되어야 하는 구절이다. 바로 이 부분이다.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이 헌장이 나온 지 51년이나 되었건만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 계발'은 여전히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죽어라 외운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당시 아이들이 이 헌장을 외우는 것에는 왕도가 없었다.
그냥 닥치고 외우는 수밖에.
당연히 머리싸움이었다. 어릴 적 나는 공부를 그리 잘하지 못했다. 자연히 다른 친구들에 비해 암기력이 달렸고, 그 덕분에 선생님 회초리를 여러 대 맞아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울컥한다. 그 회초리는 마땅히 내가 아니라 내 혈관 속 DNA가 맞았어야 한다. )


내 주변 친구들, 특히 내 사촌이 문제였다.(예전엔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한 친척들이 서울 한 마을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내 주변엔 머리가 뛰어난, 어린 위인들이 많았다. 특히 사촌 중 하나는 하필 나랑 동갑인데 바로 옆반이었고, 올백을 무슨 밥먹듯이 해댔다. 분명 나랑 똑같이 뛰어놀았는데.


사촌이랑 나랑 학교 숙제가 똑같은 날 나왔나 보다. 어른들 앞에서 그 사촌이 나랑 똑같이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기 시작했는데...

내가 첫 줄 가지고 버벅대는 동안 그 사촌은 문장 전체를 다 외워버렸다. (사촌이면 비슷한 유전자 구조가 아닌가? 이 죽일 놈의 DNA 랜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운이 좀 나빴다. 그 사촌은 현재 법조계에 있다. 그것도 높은 지위로.

그런 DNA를 내가 감히 어떻게 감당하느냔 말이다. 출발부터 결승점에 다 간 사람과 내가 달리기를 하는 건데.

 

나랑 친했던 옆집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그 친구는 다른 공부는 잘 못해도 단순 암기력만은 뛰어났다. 이래저래 나만 덜떨어진 아이였다.


국민교육헌장에선 분명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인데  DNA는 분명 나를 차별하고 있었다.


그 트라우마는 그 뒤로도 오래갔다. 중학교에서 암기로 배웠던 역사 시간 -먼저 '나랑 피 한 방울 안 섞인 오래전 죽은 어른들의 출생 연도 외우기' 테이프부터 끊었다.


수학에서는 "과정은 몰라도 돼. 그냥 닥치고 공식 암기."

또 미술시간엔 빛의 삼원색- 빨, 노, 파.  빨, 노, 파 등등.


그러다 보니 암기에는 진저리가 쳐졌다.

한 때 텔레비전을 보면서 내가 연기자가 되지 않은 건 단지 대본 외우기가 힘들어서라고 생각하기도.(과연 그 이유 하나뿐일지...)


'국민교육 헌장'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문장이었다.

(지금 와서 보니 교훈까지 없고 단지 누군가의 자기만족이었을 듯 )


'득'이라면 약간의 세뇌교육과 단순 암기력 향상.

'실'이라면 나처럼 평생 '단순 암기 트라우마'로 인한 공부 기피 현상이다.



제발...

앞으론 아이들에게 의미 없는 공부는 그만 하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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