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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Jun 02. 2020

"순이야. 노~올자."

노는 방법을 배워야만 놀 수 있는  아이들

 내가 어렸을 적 가정에서 많이 하던 말이 무엇일까? 엄마들은 "순이야 밥 먹어라."이고, 아이들은 "철야. 노-자."였을 것. 그 시절 아이들은 참 많이도 놀았다.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은 등교 전 아침 댓바람부터 골목에 모여서 놀았다. 또 학교 갔다 오면 가방을 휙 던져 버리고 골목 어귀나 공터에서 해가 지도록 놀았다. 그러다 엄마가 "순이야. 밥 먹어라."라는 소리가 들리면 부랴부랴 집으로 뛰어갔다.






브런치 글 중 뒤늦게 조회수가 오르는 경우가 있다. 내 경우 코로나 이후 조회수가 오른 글이 있다. '엄마표 놀이'에 관한 글이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적 내가 온몸을 다해 놀아준 기억을 되살려 쓴 글이다. 처음엔 별로 반응이 없던 글인데 코로나 이후 검색을 통해 많이 유입이 되었다. 유입 어는 '아이와 놀아주기, 엄마가 아이와 노는 법' 등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엄마들이 갑자기 집에서 아이들과 오랜 시간을 보내자니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것. 아이들은  방학 때라고 해서 집에만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바빴다. 평소 소홀히 했던 예체능이나 선행학습, 특히 집중 코스반 학원에서 영어실력을 일취월장시키려고.


처음엔 실컷 놀 것을 기대하던 아이들도 차차 체념하게 된다. 그런데 코로나로 방학이 지나도 학교에 가지 못하니 당황하는 건 엄마나 아이들이나 마찬가지. 그렇다고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기도 께름칙하다. 집에만 있어본 적이 없는 아이들과 온종일 아이들과 있어본 적이 없는 부모, 그 앞에 많은 시간이 놓인 것이다.



우리 땐 아이들의 육아를 책임져 주는 게 학원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었다. 그저 공터였고 햇빛이었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밖에 나가서 햇빛 아래 뛰어놀았다. 발갛게 익어가면서. 굳이 그늘을 찾아들지도 않았다. 햇빛을 따라다니는 건 아이들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뜨겁거나 얼굴이 그을리거나 그런 걸 따지는 법이 없었다.


그것이 아이들이 사는 법이었다. 밝고 씩씩한, '태양을 피하는 피하지 않는 법'으로. 팔다리를 한껏 내어놓고 햇빛에 얼굴을 찡그려가면서 마치 식물처럼 자연을 빨아들였다.


이번 코로나로 오랫동안 집에 갇혀있던 아이들은 느꼈을 것이다. '뭐야! 하루가 이렇게 다니.'  학교, 학원으로 종종거리고 다니던 시절엔 몰랐을 것이다. 그들은 마치 생활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어른들처럼 쫓기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뎅그러니 놓인 시간 앞에 학부모들은 당황을 하고 아이들은 지루해했다.


우리 어린 시절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이들이 시간이 많다고 지루해하다니. 또 엄마들이 놀아주는 법을 검색하다니. 왜 엄마들이 아이들과 놀아주어야 하나? 우리 땐 엄마가 아이와 놀아준다는 개념이 없었다. 아이들은 노는 법을 가지고 태어나는 걸로 알았으니. 신생아 시절부터 말이다. 신생아 시절 아기들은 낮에 잠깐 동안 깨어 있을 때도 혼자서 재밌게 논다. 방 안을 둘러보며 나름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자기 발을 들어 올려 만지거나 빨기도 한다. 아이들에겐 노는 게 제일 쉬운 일인 것이다. 마치 숨을 쉬듯.


우리 때엔 장난감도 없었다. 추운 겨울에 방에 앉아만 있어도 끊임없이 놀이에 열중했다. 장난감은 우리 몸이었다. 여러 명이 양다리를 서로 끼워 넣고는 "이 거리~ 저거리~" 하면서 손바닥으로 다리를 탁탁 때렸다. 이는 실내에 오래 앉아 있는 경우 다리의 혈액순환을 도울 수 있다. 또 손바닥을 마주쳐가면서,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라면서 손바닥 부딪히는 놀이를 하고 놀았다. 이는 손바닥의 기혈을 촉진시켜 두뇌발달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또 이불을 덮고 누웠을 때도 끝말잇기 놀이나 스무고개 같은 걸 했다. 이를 통해 어휘 실력이나 추론 능력을 향상할 수 있었다. 간혹 놀다가 친구랑 싸우는 것도 공부가 되었다. 어떻게 하면 친구가 자길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를 공부만 해서는 알 수가 없다. 이는 몸으로 일일이 부딪혀서 얻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나는 생래적으로 안정성보다는 다소 불안함이 깃든 모험 상태를 좋아한다. 이는 아이들을 양육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추운 겨울에도 마스크를 씌우고 단단히 입혀서 밖으로 나가 눈싸움을 하고 놀았다. 비가 올 때는 아이들에게 우산을 씌워서 산책을 하면서 빗줄기를 관찰하게 했다. 보슬비가 올 때는 놀이터에서 모래놀이를 하면서 마른 흙에서 젖은 흙으로의 질감 변화를 손으로 직접 느끼게 했다. 이때 길을 지나가는 엄마들은 그런 나를 보면서 모진 엄마 취급을 했다. 모두 우리 아이들이 건강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어릴 적부터 단련을 해서인지 동네에 폐렴이나 독감 등이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우리 아이들만 건너뛰었다. 혹한이나 혹서도 직접 견뎌보게 한 것이 아이들 건강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엄마들이 내 의견에 반대할 수도 있다. 아이를 나쁜 세균으로부터 완벽하게 지키고 나쁜 일을 절대 안 당하게 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 생각할 수도.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이 세상은 나쁜 병균과 이기적인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빨리 백신을 맞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중학교 교사로 있던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요즘 중학생 중에는 정서적으로 안정된 경우가 절반도 안 된다고. 초등학교도 마찬가지다.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점점 많은 아이들이 정서적 장애를 겪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런 아이와 상담을 하고 나서 내가 내리는 결론은 늘 하나다. 바로 '못 놀아서'다.


특히 나가 놀지 못하는 게 문제다. 아이들이 체육을 가장 좋아하는데 단지 움직이고 싶어서가 아니다. 실내 체육을 하면 시큰둥해한다. 햇빛을 보고 싶은 것이다. 햇빛을 쬐면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 분비가 활성화된다.


요즘 아이들에게 소아 우울증이 많은 이유다. 요즘 아이들은 햇빛을 볼 일이 거의 없기 때문.

매일 아파트라는 콘크리트 상자에서 학교라는 콘크리트 상자, 또다시 학원이라는 콘크리트 상자로 왔다 갔다 하는 일이 전부다.


그러니 잠깐이라도 햇빛을 맘껏 쏘일 수 있는 운동장 체육시간을 좋아한다. 교사로서 아이들을 보기가 참 딱하다. 부모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학원 좀 줄여주고 햇빛 속에서 아이들을 맘껏 뛰어놀게 해 주었으면...


"영야 노~자.", "철야 노~자" 소리는 이제 사라졌다.


대신 이 아파트, 저 아파트 문 앞에서, 아니면 핸드폰에서 다시 들려오길 바라본다.

"지아 노~자.", "준야 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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