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한 잔 이상 소위 '다방 커피'를 마신다. 설탕, 프림을 잔뜩 넣은 커피믹스를 타 먹는데 아무리 건강에 안 좋다고 해도 끊을 수가 없다. 어찌 됐든 하루가 시작되려면.
원두커피는 서른 살쯤 넘어서 맛을 들이기 시작했다. 원두커피에는 개운한 매력이 있지만 다방커피가 주는 걸쭉한 목 넘김은 따라올 수없다.
서구 음식이 우리나라에서 제자릴 잡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나보다. 처음엔 보급형 음식의 형태로 온 경우가 많다. 그런 음식은 오리지널이 오고 나서도 좀처럼 자릴 내주지 않는다.
소시지 같은 경우가 그렇다. 요즘엔 고기함량이 높은 스팸이나 진짜 소시지를 먹지만 내가 어린 시절에만 해도 달랐다. 우리 땐 밀가루 맛이 잔뜩 씹히는 '분홍 소시지'가 있었다. 식감이 퍽퍽하고 전체적인 음식의 밀도가 낮았다. 고기도 순수한 돼지고기가 아니라 닭고기 등 온갖 잡고기 맛이 났다. 게다가 색깔은 어쩜 그리도 분홍인지.
음식의 컬러라고 보기 민망할 정도로 색소가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해낸 분홍 소시지. 그 소시지에 같은 급의 귀한 음식인 계란까지 옷을 입히면 그야말로 천상계 반찬으로 변신했다. 그걸 도시락 반찬으로 싸온 학생은 그 날의 도시락 파트너로 최고 인기였다. 영양학적으로 보면 고기가 섭섭할 정도로 들어있고, 식용색소가 과다하게 들어간 소시지. 그걸 영양학적으로 나무라고 위생학상으로 뭇매를 친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이미 혀에 인이 박인 이상. 나는 아직도 그 노리끼리한 계란옷을 입힌 분홍 소시지가 더 맛이 있다. 이는 화학적인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 혀와 뇌에는 일찌감치 해로운, 그러나 깜찍한 점령군이 자릴 차지해 버렸으니.
이 점령군에는 가루 주스도 있다. 가루 주스는 지금처럼 100% 무가당 오렌지 주스가 나오기 한참 전부터 있던 거다. 여름이면 손님에게 대접할 때 요긴했다. 얼음물에 이 가루 서너 숟가락이면 선명한 주황빛 오렌지주스 한 잔이 만들어졌다. 지금의 환타와 맛이 비슷했다.
이 가루는 어린아이들에게 마법을 부렸다. 아무리 나쁜 일이 있었어도 이 가루 한 줌이면 금세 행복해지곤 했으니까. 이 가루를 손바닥에 얹어서 할짝할짝 핥아먹었다. 그러면 다들 혓바닥이 빨개져서 서로 쳐다보며 한바탕 웃곤 했다. 이 가루 맛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상큼하고 달콤한데 자연에선 맛볼 수 없던 맛. 그래서 아주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인공의 맛이랄까? 아무튼 머릿속이 환해지는 맛이었다.
요즘 마시는 오렌지 주스는 정직하다 못해 밋밋하고 쌉싸름한 오렌지 특유의 맛이 세련되게 난다. 하지만 이 가루에는 지조 있는 순박한 맛이 있었다. 이는 마치 시골에서 처음 올라온 순박한 시골처녀가 보따리를 안고서 수줍게 서있는 모습 같다. 자존심이 강하고 심지가 굳어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그런 맛. 이는 '가짜 맛'이기 이전에 하나의 '장르'였다.
점령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보수적인 '입맛 지킴이'도 있다. 요즘은 돈가스 하면 일식 돈가스를 떠올린다. 하지만 내 기억저장소에 있는 돈가스는 두툼한 돈가스가 아니다. 기사식당에서나 나올법한 널찍하고 얇은 왕 돈가스다. 이 돈가스에 옅은 밤색 소스를 뿌리고 옆에는 실처럼 얇게 채 썬 양배추가 나와야 한다. 그래야 눈으로나 입으로나 외식한 기분이 난다.
대학생이 되고 처음 미팅 나간 날 먹어본 것이 돈가스다. 그 당시 일 인분에 천 원이었는데 그렇게 고소하고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고기 두께가 5밀리미터도 안 되고 그나마 살코기가 아닌 지방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때 맛본 돈가스가 내게는 진짜 돈가스인 것이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값비싼 재료를 조금만 넣어서 만든 '가짜 음식들.' 하지만 그 음식들을 가짜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영양상으로는 부족하고 위생상 불결했을지는 모르지만 우린 그 시절 그 음식으로 인해 행복했으니.
이는 마치 여행을 가기 위해 탔던 기차를 여행지에 도착한 후 나 몰라라 하는 것과 같다. 나는 그 음식들이 지금도 귀하게 느껴진다. 그 당시 우리에게는 사치였고 행복을 선물했으니까. 특히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쯤 되면 이 음식들은 기차가 아니라 크루즈쯤 되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