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지만 어쩌랴.
어쨌든 계속되는 이 ‘먹고살기’를
어렸을 적 내 용돈은 10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4, 50년 전이니 10원으로 할 수 있는 건 많았다. 제일 먼저 달고나가 생각난다. 우리 집 골목 앞에는 한 국자에 10 원하는 달고나를 팔았다. 그 앞에는 항상 아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달고나를 평평하게 펴서 모양 틀로 찍은 걸 오려서 가져가면 하나를 덤으로 얹어주었다. 요즘 편의점에서 하는 1+1의 원조인 셈이다.
그 외에도 10원짜리로 할 수 있는 건 많았다. 학교 앞 야바위꾼들이었다. 고무줄 길이 중 어느 것이 더 긴지 말하거나, 컵에 공깃돌을 넣은 다음 이리저리 굴리다가 어느 컵에 있는지 알아맞혔다. 그 게임의 판돈이 10원이었다. 예를 들어 긴 고무줄이나 공깃돌이 들어있는 컵을 맞히면 그 판돈에 10원을 더 얹어서 가져가고, 틀리면 아저씨에게 10원을 빼앗기는 식이었다. 이때 약삭빠른 아이는 길어 보이는 고무줄이 아니라 더 짧아 보이는 고무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런데 또 틀렸다고 했다. 손기술로 결과를 조작해 낸 듯하다.
학교 앞에는 병아리 장수들도 왔는데 라면박스 안에 작고 노란 병아리를 10원에 팔았다. 그런데 그 병아리를 사서 집에 데려가면 며칠 만에 죽었다. 동심을 다친 아이들은 잘 죽는 병아리를 판 어른들이 미웠다. 하루는 가족끼리 어린이 대공원에 놀러 갔다가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처음에는 ‘어디서 봤지?’ 하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인가 생각하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니 학교 앞 병아리 장수 아저씨였다. 그 아저씨는 아내와 내 또래 아이들과 함께 풍선을 사고 있었다. 사실 그 아저씨도 집에서는 좋은 아빠였던 것이다. 나에게는 소중한 용돈을 빼앗는 존재였지만.
요즘은 학교 앞 병아리 장수들이나 야바위꾼들이 사라졌다. 그놈의 ‘식구들 먹여 살리기 숙제’는 여전히 남아 있건만. 이제 그 장수들은 무얼 하면서 먹고사는 것일까? 이래저래 먹고사는 것이 여의치 않은 가장들이 많다. 그들이 가족과 동반 자살한 뉴스가 나올 땐 ‘먹고살기’의 처절함에 소스라친다. 병아리 장수가 떠오른다. 자기 딸에게 풍선을 사 주면서 짓던 환한 미소와 함께. 병아리가 너무 빨리 죽었다고 따지면 아저씨는 우리가 잘 못한 거라고 했다. 먹이를 너무 많이 주었거나 춥게 했을 거라고. 아저씨가 야속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래 봤자 어차피 10원밖에 안 되었으니까.
옆집 아저씨는 대기업에 다니다 명퇴한 후, 집수리 등 육체노동으로 생활비를 벌어오고 있다. 평생 책상 앞에만 앉아 있다가 육체노동을 하려니 몸에 파스를 달고 산다. 부인은 그런 남편이 안쓰러우면서도 존경스럽다고 한다. 그 남편은 말할 것이다. “어쩌랴. 어쨌든 먹고살아야 하는 것을, 내가 가장인 것을.”
그 외에도 10원짜리로 할 수 있는 건 많았다. 학교 앞 야바위꾼들이었다. 고무줄 길이 중 어느 것이 더 긴지 말하거나, 컵에 공깃돌을 넣은 다음 이리저리 굴리다가 어느 컵에 있는지 알아맞혔다. 그 게임의 판돈이 10원이었다. 예를 들어 긴 고무줄이나 공깃돌이 들어있는 컵을 맞히면 그 판돈에 10원을 더 얹어서 가져가고, 틀리면 아저씨에게 10원을 빼앗기는 식이었다. 이때 약삭빠른 아이는 길어 보이는 고무줄이 아니라 더 짧아 보이는 고무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런데 또 틀렸다고 했다. 손기술로 결과를 조작해 낸 듯하다.
학교 앞에는 병아리 장수들도 왔는데 라면박스 안에 작고 노란 병아리를 10원에 팔았다. 그런데 그 병아리를 사서 집에 데려가면 며칠 만에 죽었다. 동심을 다친 아이들은 잘 죽는 병아리를 판 어른들이 미웠다. 하루는 가족끼리 어린이 대공원에 놀러 갔다가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처음에는 ‘어디서 봤지?’ 하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인가 생각하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니 학교 앞 병아리 장수 아저씨였다. 그 아저씨는 아내와 내 또래 아이들과 함께 풍선을 사고 있었다. 사실 그 아저씨도 집에서는 좋은 아빠였던 것이다. 나에게는 소중한 용돈을 빼앗는 존재였지만.
요즘은 학교 앞 병아리 장수들이나 야바위꾼들이 사라졌다. 그놈의 ‘식구들 먹여 살리기 숙제’는 여전히 남아 있건만. 이제 그 장수들은 무얼 하면서 먹고사는 것일까? 이래저래 먹고사는 것이 여의치 않은 가장들이 많다. 그들이 가족과 동반 자살한 뉴스가 나올 땐 ‘먹고살기’의 처절함에 소스라친다. 병아리 장수가 떠오른다. 자기 딸에게 풍선을 사 주면서 짓던 환한 미소와 함께. 병아리가 너무 빨리 죽었다고 따지면 아저씨는 우리가 잘 못한 거라고 했다. 먹이를 너무 많이 주었거나 춥게 했을 거라고. 아저씨가 야속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래 봤자 어차피 10원밖에 안 되었으니까.
옆집 아저씨는 대기업에 다니다 명퇴한 후, 집수리 등 육체노동으로 생활비를 벌어오고 있다. 평생 책상 앞에만 앉아 있다가 육체노동을 하려니 몸에 파스를 달고 산다. 부인은 그런 남편이 안쓰러우면서도 존경스럽다고 한다. 그 남편은 말할 것이다. “어쩌랴. 어쨌든 먹고살아야 하는 것을, 내가 가장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