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윤숙 Dec 03. 2019

자랑스러운 대한의 애국소녀

너무나도 긴박했던 공포의 순간

어릴 적 내 모습을 떠 올리면 웃는 장면이 많다. 무척 아둔하고 성실한 소녀, 게다가 애국심이 넘쳐나던  소녀가 떠오르기 때문. 그 애국심은 어린 소녀에게 그늘을 드리우곤 했는데...






내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다닐 땐 반공교육이 철저했다. 시기마다 이슈가 되는 사건(도끼만행 사건이나 땅굴 사건 등)이 있었고 그 사건을 주제로 한 포스터 그리기나 표어 대회가 열렸다.


땅굴 사건 직후엔 학교마다 땅굴에 대한 경각심을 공포스럽게 일깨우곤 했다. 교육이 철저했는지 내가 너무 순진했는지 그들이 우리 집 안방에 쳐들어올 것 만 같은 위기감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하루는(등 학 2학년) 학교에서 공산당 아저씨가 이복 어린이 입을 찢은 내용의 영화를 보여주었다. 집에 온 후 입을 찢 공비들의 표정과 이복 어린이 울부짖던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러자 갑자기 불안이 엄습해다.


마침 삼촌이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때 나는 늘 하던 고민을 계속해서 하고 있었다.

'갑자기 무장공비가 우리 집에 쳐들어오면 어쩌지? 북한하고 우리 동네하고 가깝다는데.. 아마 지금도 땅굴을 파고 있겠지? 그런데  삼촌 하고 나밖에 없잖아. 삼촌은 게다가 자고 있어.'


공포에 떨면서 공비들이 땅굴에서 뚫고 나올만한 위치를 찾아보았다. 한 곳이 눈에 띄었다. 예전엔 바닥이 주로 종이 장판으로 되어 있었다. 종이 장판이 온돌방의 온기를 전달하기 쉽기 때문. 하지만 아궁이에 가까울수록 열이 높기 때문에 부엌과 가까운 아랫목은 종이가 새까맣게 타기 일쑤였다. 그 탄 곳이 구멍까지 나는 경우도 있었는데 딱 그런 부위가 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찢어진 곳은 바닥도 허술할 거라 생각했다.


그 부분을 노려보면서 무장공비가 뚫고 나오는 장면을 수도 없이 시뮬레이션했다. 동시에 이복 어린이처럼 멋지게 죽어가는 장면을 떠 올렸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너무 따라 하는 것 같다. 더 멋진 대사는 없을까? 했지만 다 이상했다.

"나는 빨갱이가 싫어요."-빨갱이는 왠지 품위 없는 말 같아서 탈락!

"나는 공산당이  정말로 싫어요."-정말로라는 말이 너무 약해 보여서 탈락!

"나는 북한 군인이 싫어요."-북한 군인이라는 말은 군인이라는 말을 먹칠하는 것 같아 역시 탈락!

"나는 죽어도 북한이 싫어요."-그나마 나은데 죽는 순간에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며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법 비장하게, 절대로 무장공비에게 내 지조를 팔지 않으리라는 다짐과 함께.


그때 갑자기 수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그 소리는 점점 빨라졌다. 

쿵쿵. 쿵쿵.


심지어 소리가 내게 가까워지는 게 아닌가.

쿵쾅 쿵쾅(아마 내 심장소리가 섞여서 그렇게 들린 듯)


호흡을 가다듬었다.

"흡 쓰--후 우우읍"


이런 날이 오고야 말다니.

드디어 땅굴을 이리로 파고 있구나.


그래서 최대한 고고한 자세로 곧추 앉아 입을 풀고 있었다.

제2의 이복 어린이가 내가 되는 순간이니까.

(그 와중에도 이복은 남자아이니까 여자아이 하나쯤 있어도 괜찮겠다 생각함.)


여러 가지 생각이 솟구쳐 올랐다.

주로 친구랑 싸운 일인데, 친구 인형을 빌려와서 돌려주지 않은 점이 제일 걸렸다.


기자가 인터뷰 왔는데, 

"허윤숙 어린이는 어떤 친구였나요?"라는 질문에,

"애국심은 무척 뛰어난데요. 남의 물건을 빌려가고 돌려주지 않아요."라고 대답하면 내 죽음이 말짱 헛것이 되고 만다.

아찔했다. '어제 꼭 돌려줬어야 해.'


가장 아쉬운 건 그날 '세리 공주' 만화영화를 못 보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말할 순 없지 않은가?

"공비 아저씨. 제발 세리 공주 딱 한 번만 보여주고 죽이시면 안 될까요?"


그런 비극적인 장면들을 생각하면서 훌쩍거리고 있는데,

삼촌이 갑자기 일어났다.

우는 소리에 잠을 깨신 것이다.

"윤숙아. 왜 울어? 응?"


그런데 나는...

삼촌에게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그건 바로

내가 울 이유가 사라졌으므로.


딱 그 순간, 

땅굴 파는 소리가 끊겼기 때문이다.


땅굴 소리가 끊긴 건

땅굴 파는 소리가 바로.

 

삼촌의 코 고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내 귀가 막귀여서일까?

아니면 애국심이 너무 강해서까?


아직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등나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