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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Jan 28. 2020

등나무

명절, 할머니는 등나무를 닮았다.

아주 어릴 적 날마다 말을 걸어준 친구가 있다. 우리 집 앞마당에 서 있던 등나무다. 그 나무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있었다. 당시 우리 집은 오래된 한옥식 집이었다. 아마 지은 지 3, 40년은 족히 된 듯했다.


요즘 등나무는 보기 드물다. 미관상 아름답지도 않을뿐더러 여기저기 엉겨 붙기 때문일까?


등나무를 생각하면 할머니 얼굴이 떠 오른다. 어릴 적 할머니랑 같이 산적이 있다.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우릴 돌봐 준 할머니. 할머니에게 우린 늘 걱정의 대상이었다.


하루는 아침에 양말을 안 신고 갔다. 할머니는 그 사실을 내가 학교에 간 뒤에 알아채셨나 보다. 학교에 가서 수업을 하던 중 갑자기 교실 앞문이 열렸다. 선생님과 아이들 시선이 일제히 교실 앞문을 향했는데, 아뿔싸! 우리 할머니가 그 앞에 서 계신 것이 아닌가?


할머니는  특유의 하이톤으로"윤쉭아.(할머니는 평생 내 이름을 그렇게 부르셨다. 일찍부터 틀니를 하셔서) 너 양말 안 신고 갔다." 하면서 하얀 양말을 펄럭 펄럭 흔드셨다. 그러자 곧 아이들 웃음소리로 교실이 떠나다. 그때 할머니의 '교실문 퍼포먼스'는 내게 할머니를 창피하게 여기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할머니가 나를 또 아연실색케 하는 일이 생겼다. 당시엔 기생충 검사를 학교에서 단체로 실시했는데 학교마다 봄, 가을 두 번 채변봉투라는 걸 가져오게 했다. 지금의 일회용 봉투 물컵 같이 생겼다. 그 안에 자신의 대변을 넣어가는 것이었다.


문제는 변비였다. 하필 채변봉투를 제출하는 시기엔 꼭 변비에 걸리게 되었던 것.


채변봉투 제출기간 마지막 날이었다. 어찌어찌해서 채취에 성공했는데 깜빡하고 집에 놓고 간 것이다. 그 봉투를 뒤늦게 확인하신 할머니부리나케 학교로 들고 오신 것이다. 할머니는 또 한 번 교실문 앞을 열어젖히고는 힘차게 봉투를 흔드셨다. "윤쉭아. 너 똥 봉투 집에다가 놓고 갔다아."

교실이 또 한 번 초토화되었다.

 

할머니는 그 뒤로 95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무척 정정하셨다. 기침을 자주 하던 나를 걱정하시던 할머니는 고향에 놀러 가셔서는 나를 위해 산에 올라서 채취해 오시던 것이 있다. 은행나무 가지다. 지금 가로수로서 흔하지만 그땐 은행나무를 거리에서 보기 힘들었다. 주로 산에 가야 볼 수 있었는데 그걸 주우러 산에 오르신 거다. 그 당시 70세가 넘으셨는데도. 사실 꺾으셨는지 주우셨는지 모르겠다. (만약 꺾으셨다면 산 주인에게 죄송할 따름이다. 손녀를 걱정하는 할머니의 사랑으로 봐주시기를)


그 은행나무 진액으로 식혜를 해주시곤 했다. 그런데 정작 내가 먹기 싫어해서 애를 태우곤 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죄송하다. 칠순의 노인이 산에 가서 직접 채취한 나무로 담근 식혜를 어떻게 안 먹을 수가 있는지.


그런 할머니의 정성 덕분인지 기침이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할머니는 때론 나를 당혹스럽게도 하고 귀찮게도 하셨다. 아니 그런 순간이 훨씬 많았다. 손녀를 사랑하는 할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귀찮음이나 체면이 앞섰던 것이다. 지금도 죄송한 마음이 든다.




명절만 다가오면 가정마다 어쩔 수 없는 스트레스가 있다. 먼길을 다녀오는 동안 운전에 지치기도 하고 그동안 감춰져 있던 부부간의 불화가 터져 나오기도 한다. 젊은 세대들이 겪는 고충도 만만치 않다.


취직은 했는지 결혼은 왜 안 하는지 대학은 들어갔는지 졸업하고 뭐할 건지 등등. 그렇다고 대답이 곤란할까 봐 안 물어보기도 힘들다. 친척인데 관심이 없을 수도 없고. 사실 안 물어봐도 불편한 건 마찬가지다. 차라리 대놓고 속시원히 이야기하는 게 나을 수도.


이 광경이 마치 등나무와 같다. 얽히고설킨 모습이 명절 때마다 연출이 된다. 감정이 얽히고 대답이 엉키고. 하지만 꼭 나쁜 점만 엉키지는 않는다. 대화중에 좋은 정보를 얻기도 하고 위안을 받기도 한다.


다른 나무들은 보기 좋고 좋은 향났지만 등나무가 주지 못하는 게 있었다. 바로 어린 나에게 제공해주던 의자나 넓은 그늘 쉼터, 또 그네다.


누렇게 마른 줄기를 휘휘 감아올리던 등나무. 그 잎사귀가 나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비틀린 줄기가 엉켜 의자를 만들어주곤 했다. 눈 씻고 봐도 멋은 하나도 없었던 등나무. 어쩌면 우리 명절이 그런 것 같다. 마치 어릴 적 우리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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