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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Apr 22. 2020

청강생

뭘로 시작했든 간에.

 운동화 속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본다. 덜 시린 것 같다. 벙어리장갑 속에 꾹꾹 눌려 있는 손도 조물조물해 본다. 그래도 시리다. 이미 볼은 터서 거칠고 빨갛게 변했다. 감기와 상관없이 코를 계속 훌쩍거린다. 이때 콧물이 빼꼼히 모습을 드러낸다. 콧물이란 녀석들은 일관성이 있다. 일단 내려간 이상 다시 오를 줄을 모른다. 어린 마음에도 민망하다. 이내 힘껏 들이마셔보지만 역부족이다. 왼쪽 가슴팍을 흘깃 본다. 하얀 가제 손수건이 길게 접혀 옷핀에 붙잡혀 있다. 진정성 있게 손수건의 용도가 생기는 순간이다.


 그 손수건을 힘껏 끌어다가 '코를 닦는다.'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힘껏 푼다. 그러자 거칠게 날뛰던 녀석들이 이내 잠잠해진다. 그리고 몸짓이 설익은 여자 아이는 속으로 말한다. '이런 게 겨우 학교라니.'


 '청강생' 이란 말은 이제 어디서도 듣기 힘들다. 마치 지금도 북한에서 쓰고 있는, 얼음 고물(아이스크림)처럼 낯설다. 청강생 이란 말은 당시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할 연령은 안되고, 학교엔 들어가고 싶은 아이들을 다니게 하던 제도다.


 이때 다니다가 함량 미달이면 중도에 자진 사퇴하거나 깜냥이 되면 계속 다니는 거다. 주로 언니 오빠가 학교 다니는 게 부러워서 매일 졸랐던 동생들이 다녔다. 또는 부모가 맞벌이하느라 아이를 돌보기 힘든 경우 돌봄 서비스 개념으로 보내기도 했다. 일종의 조기입학인 셈인데 정식으로 입학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이 제도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문이 많다.


 나는 일곱 살에 청강생이었는데 학교에 다니고 싶어서 매일 부모님께 졸라댄 결과다. 일찍 한글을 떼었으니 충분히 학교에 적응할 거라 생각한 부모님은 망설임 없이 1년 일찍 학교에 보냈다. 당시 청강생이 유행이었나 보다.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부설 유치원 같았다. 미리 한 두 달 정도 학교에 다니다가 적응이 안 되면 다음 해에 같은 학교에 재입학하곤 했다.


 그런데 한글을 안다고 해서 학교에 적응할 거라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학습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장애물이 되었다. 무엇보다 엄마가 보고 싶은 거다. 학교에 가자마자 엄마 얼굴이 하루 종일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엄마 보고 싶다고 훌쩍거렸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 당시 겨울은 매서웠다. 특히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3월이니 등교 때마다 추위가 끔찍했다. 처음엔 1주일 정도 엄마가 학교에 데려다주다가 이웃집 친구와 같이 가게 했다. 그런데 친구는 멀쩡하게 잘 가는데 나만 다시 집으로 되돌아갔다. 엄마가 왜 다시 왔냐고 물으셨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추워서."


 그러자 옆집 엄마가 혀를 쯧쯧 하고 찼다. 게다가 더 큰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엔 과밀학급을 해소하기 위해 1, 2학년을 대상으로 오전, 오후반을 운영했다. 그런데 천성적으로 어리바리한 내가 자주 헷갈리는 거다. 분명 선생님이 "다음 주는 오후반이에요." 하셨을 거다. 그런데 헷갈려서 떡하니 오전반에 등교하곤 했다. 가만 보니 선생님은 그대로인데 아이들이 좀 낯설어 보였다.


그때 선생님의 어이없어하시는 말투가 지금도 생생하다. "윤숙아. 너 또 헷갈렸구나? 아휴~"

그때마다 무안한 얼굴을 하고 주섬주섬 책가방을 챙겨 나오곤 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학교는 나쁜 곳이다.'


그런데 오전, 오후반을 잘못 가는 것보다 더 큰 헷갈림이 있었다. 하루는 오전반을 잘 챙겨서 등교하고 하교까지 무사히 마쳤다. 그런데 마침 엄마가 동생들과 외출했나 보다. 아무도 없길래 마루에 누웠는데 금세 잠이 들었다. 푹 자고 다음날 깨어나 보니 또 집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하다가 갑자기,

'어린이용 노이로제'가 발동했다.

본능적으로,

'지각이다. 큰일 났다. 또 선생님께 혼나겠다.'

하고는 세수도 안 하고 냅다 학교로 뛰었다. 헐레벌떡 교실문을 열었는데 담임선생님이 어이없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하시는 말씀,

"윤숙아. 왜 또 왔니?"


그런데 내 당황하는 표정을 보곤 웃음을 터뜨리셨다. '쟤가 또 헷갈렸구나. 내가 못살아.' 그렇다. 나는 그날 오전반에 갔다 와서는 오후반에 또 간 것이다. 잠시 낮잠 잔 것을 다음날까지 잔 것으로 착각해서. 그 일이 있은 며칠 후 결국 청강생 생활을 청산했다. 도저히 부모님도 감당이 안 되셨던 모양이다. 너무 어린 티가 나서다.


 결국 다음 해에 정식으로 입학을 했다. 같이 청강생으로 다니던 친구는 계속 다녔으니 벌써 2학년이 되어 있는데. 그 친구를 학교에서 마주칠 때마다 친구들이 물어보았다. 왜 2학년이 친구냐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내겐 치욕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뭐든 앞서 나갔다. 학급 반장을 비롯해서 선생님들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다. 그 친구는 나와 달리 똑똑해서 조기입학이 가능했던 거다.


 내 기억으로 두 달 정도 다닌 것 같은데 그때 배웠던 것들이 생생히 기억난다. 처음 한 달은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추운 운동장에 서서 하루 종일 '둥근 해가 떴습니다.'와 같이 이상한 율동을 했다. 손이 빨갛게 시리도록 말이다. 그리고 교실수업에서는 줄 없는 종합장을 네 칸 접는 일, 거기에 줄을 긋고 빨강, 파랑, 노란색을 색칠하던 일. 또 종합장을 네 칸 접어서 이름 쓰던 일들이 생각난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다음 해에 정식 입학한 뒤로 발생했다. 매해 똑같이 이루어지는 학교 수업이 너무 뻔했던 것. 그 당시만 해도 동요 레퍼토리가 턱없이 적었다. '둥근 해가 떴습니다'는 그다음 해에도, 또 그다음 해에도 줄기차게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당시만 해도 동요작곡가가 별로 없었나 보다. 게다가 그 판에 박은듯한, 민망한 안무까지.  


 이는 나의 '뿌리 깊은 잘난 척'의 기원이다. 이때 아이들이 참 없어 보였다. 별것도 아닌 율동을 외우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긴장하는 모습들이. 그래서 지적질을 하곤 했다.

"팔을 더 높이 올려야지. 그래야 해처럼 보이지." 하면서 아이들에게 교사처럼 굴었다.

교실 수업 때는 더 가관이었다. 당시만 해도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자기 이름도 못쓰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럼 나는 마치 꼬마 교사처럼 굴었다. 아이들 공책에 이름을 안 쓴 게 보이면 내가 이름을 물어보고는 내 글씨로 써 주곤 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존경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다. 그런데 이 존경이 지속되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약발은 딱 두 달치분이었다. 그 지루할 정도로 편안했던 순간이 지나자, 나도 아이들과 똑같이 미 개척 분야를 탐험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미 학습 의욕이 뚝 떨어져 있었다는 것.


 이제 더 이상 잘난척할 거리도 없는데, 잘난 척은커녕 내 성적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뒤쳐지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은 처음부터 학습에 흥미를 느꼈다. 뭘 하든 겸손한 태도로 대하고 흥미 있게 참여하니 능률이 높았다. 나는 딱 두 달 치분 식량을 가지고 평생 먹을 수 있는 척한 것이다. 인생이 그토록 긴 줄 내가 어찌 알았단 말인가?


 어린 시절엔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보다 덩치나 언어적인 면에서 늦된 편이다. 그 반에서 가장 키가 작고 어리벙했던 남자아이가 있었다. 선생님은 그 아일 나하고 짝을 시켜주셨다. 내가 조숙해 보이니 그 아일 챙겨주라고. 그 아인 나에게 늘 구박을 당했다. 매일 내가 한 말은 그거였다. "아휴. 그것도 못 해? 아휴. 답답해라."


 그랬던 내가 덧셈을 자꾸 헷갈려했다. 화살표로 선분을 긋는 게 있는데 등분을 하는 게 헷갈렸다. 세 칸이면 0부터 출발인지 1부터 출발인지. 그때마다 아이들이 놀렸다. 꼬마 교사 위신이 말이 아니었다. 이때 내 짝꿍은 이 사태를 지켜보며 고소해했다.


늦되었을 뿐,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부진아는 영재였다. 2학기에 학급 반장이 되었고 나중엔 산수, 국어, 웅변 등 매사에 승승장구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뒤로  국어책에 나온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보며 속이 쓰라렸다. 깨닫고 보니 내가 바로 토끼였다. 고작 여덟 살짜리가 두 달 앞선 걸 가지고 잘난 척을 하다니.


 어른이 된 지금도 종종 나의 오만함이나 매너리즘을 깨닫는다. 또 어떨 땐 대부분 청강생 시절처럼 헷갈리고 또 헷갈린다. 내 수업이 아닐 때 불쑥 들어가 앉아 있거나 내 수업인데 모르고 결석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매사에 뭐가 뭔지 모르고 어어 하다가 남들은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데 나만 뒤처지는 거다. 그러다가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가서 격차를 좁혀놓을 때도 있다. 그래서 잠시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쉰 것뿐인데, 또 어느새 나만 남들의 발치 아래에 머물러 있다. 아님 이렇게 인생을 달리기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피곤한 것인가.


 어린 시절의 '청강생' 시절이 떠 오른다. 혹시 제때에 입학을 했었더라면 공부를 더 잘했을까. 하고. 아니 그 뒤로 좀 더 겸손한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하고. 다 떠나서 단순하게 선행학습 폐해를 말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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