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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Apr 20. 2020

여자를 싫어하는 젊은 남자들

남아선호 사상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또 다른 차별

고등학생인 우리 아들은 여자를 싫어한다. 처음엔 단순하게 생각했다. 단지  있는 남자로 보이고 싶어 하는 줄. 그런데 대화를 하고 나서 심각함을 느꼈다. 자기 친구들 대부분이 그런다는 것이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모르지만, 자기들은 여자들을 싫어하기 때문에 결혼도 하지 않을 거란다. 꼭 덧붙여서 말하길, 여자도 군대 가야 한다거나, 아님 차라리 자기가 여자로 성전환 수술을 하고 싶단다.


요즘 남자아이들 눈엔 여자들에게 사회가 훨씬 너그러워 보이는 모양이다. 내 눈엔 아직도 여자에게 부당해 보이는데. 이 지겹도록 낯익은 논쟁은 대체 언제 적 얘기인지...


언제나 끝이 날지.

 

원인을 추적하다 보니 나반성이 된다. 과장법이 섞인 아들 말은 이렇다. 자기는 여자들이 늘 피해자 코스프레하는 걸 보는 게 역겹단다. 특히 사회 이슈가 터질 때마다 남자들이 자 취급을 받는 것이.


아들은 지금까지 있어왔던 일을 구체적으로 말해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선생님들은 여학생들 편만 들었다고. 여학생들이 울음만 터뜨리면 무조건 남자인 자기들이 벌을 섰단다. 자기들이 때린 것도 아니고 여자들이 먼저 약을 올려서 자기들도 화를 낸 것뿐인데. 그 와중에 욱하니, 주먹을 휘두르진 못하고 욕을 한 것. 욕을 한 것 자체로 선생님께 혼을 났다고. 남자들은 말을 따박따박 잘하는 여학생들에 비해 말수가 적고, 과정을 생략한 채 결과부터 말하거나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경향이 강하다. 결국 혼 날 일을 만든다. 그 결과 반성문을 쓰는 건 항상 자기들이었단다.






비슷한 일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3학년 때다. 담임선생님이 예쁜 여자 선생님이셨다. 나는 그 당시 글씨를 잘 써서 선생님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지금 생각하면 공부도 아니고 글씨 잘 쓰는 게 뭐 그리 칭찬받을 일인지... )그래서 아침자습이나 수업시간에 칠판 글씨 쓰는 일을 1년 내내 도맡아 했다. 이로 인해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교사가 존경받던 그 시절엔 선생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거룩해 보였다. 특히 분필을 다는 건 굉장한 특권인데, 반장도 못하는 일을 나에게 맡겼니.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나에게 간식이나 지우개 등 뇌물을 주면서 아부했다. 칠판 글씨를 한 번만 쓰게 해 달라고. 그러면 나는 선생님이 안 계신 동안 자습 내용을  판에 쓸 때 거만을 떨었다. 아이들 중 나에게 잘 보인 아이들에게 몇 글자 쓰게 해 주는 것이다.


글씨를  쓰는 남자아이들에겐 치사하게 굴었다. 한 글자를 통으로 쓰게 하는 게 아니라 받침 한 개만 쓰게 하거나 쉼표 한 개만 쓰게 해 주었다. 전체적으로 글씨가 너무 달라서 티가 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영광으로 알았다. 자기들이 쓴 글씨를 아이들이 열심히 보고 베껴 쓰니.


그런데 그 반에서 가장 개구쟁이에다 악필인 남학생이 한 번만 쓰게 해달라고 졸랐다. 난감했다. 일명 괴발개발 체인 아이의 글씨를 어떻게 사용한단 말인가? 그래서 대놓고 당당히 말했다. 네 글씨는 도저히 못 쓰겠다고. 그랬더니 나에게 상스런 욕을 하는 것이다. 그 욕을 듣자 불현듯 머릴 스치는 장면이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막장 드라마에서 본 내용이다. 남자와 여자가 연애하다 헤어지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상스런 욕을 하니 여자가 남자에게 따귀를 휘갈기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도 그 남학생에게 따귀를 힘차게 올려 부쳤다. 그러자 그 남자아이가 곧바로 응수를 했다. 몸이 날래고 힘이 센 운동반 아이였으니 결과는 불을 보듯 했다.


그 아이가 똑같이 따귀를 날렸는데, 힘의 차이가 확실했다. 곧바로 내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던 것.


그러자 나는 대성통곡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담임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셨다. 그때 교실은 난장판 분위기였을 것이다. 칠판에 써 놓으라는 자습을 쓰다 말고 내가 엉엉 울고 있었으니. 그때 선생님이 물으셨고 아이들이 말해주었다. 그 상황을 다 듣고 나서 선생님이 그 남학생을 불러 세워서는 크게 혼을 내셨다.


평소 심한 개구쟁이였기 때문에 그 남학생의 변명 따윈 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신 것일까?

그 남학생은 그 이후로 더 삐딱해져 갔다. 내가 따귀를 먼저 때려서 자기도 때린 것뿐인데 자기 나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참 미안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나에게서도 종종 그 선생님의 모습이 발견된다. 여학생과 남학생이 싸우게 되면 주로 여학생이 울음을 터트린다. 그러면 남학생들은 억울하다. 똑같이 싸웠는데,

자기들의 영혼은 대체 누가 달래주나? 하고.


여자와 남자는 대응방식이나 성격, 신체적인 특성 등 여러 가지가 다르다. 특히 교직계에서 여초 현상이 심한 학교 특징상 여학생들이 더 이해받기 쉽다. 그런 일을 여러 번 겪다 보면 남학생들이 여자들을 미워하게 되는 듯. 


남아선호 사상이 사라지는 요즘 시대에 이는 또 다른 형태의 남녀차별이 아닐까? 선입견이나 차별의식은 무서운 것이어서 아무리 노력하고 해명해도 귀를 닫고 있으면 소용이 없다.


영화 '기생충'은 여러 면에서 수작이지만, 특히 개인적으로 높이 사고 싶은 부분이 있다. 선입견을 덜어내는 데에 있어서 그 영화가 가진 영향력이다. 즉 가난한 자는 착하고 부자는 악하다는 생각에 대해서다. 이 영화는 이런 의식이 또 다른 편견임을 알려준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볼 때 종종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각종 프레임을 씌워서 보기 일쑤다.

'강하니까, 힘이 세니까, 당연히 가해자일 것이다.' 

'힘이 없고 가난하니까 피해자일 것이다.'

라는 식으로.


의외의 반전은 늘 있다. 그 허점을 역이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할머니 납치범이나 뚱뚱한 꽃뱀, 곱상한 외모의 연쇄살인범, 이웃집에 사는 친절한 아동 성폭력범 등.


편견을 갖지 않는 건 건강한 사회의 특징이다. 특히 가뜩이나 출산율이 줄어들고 있는 인구절벽 시대에 여혐이니 남혐이니 하는 프레임은 가장 먼저 걷어내야 한다. 여성 인권이 과거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향상된 요즘, 여성을 약자로만 바라보면 종종 역차별로 이어지기 쉽다. 가치중립적이어야 하는 교사인 나도 가끔 실수가  있는 걸 보면.


사실 사회 현상이니 남녀 차별 프레임이니 하는 거대담론은 내게 사치다. 당장 우리 아들 문제가 더 크다. 아들이 이성에 대해 건전한 호기심을 갖길 바라는 엄마 마음이 가장 절실하기에.



이미지 출처: 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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