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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Apr 23. 2020

텔레비전

그때 난 여섯 해 살이 인생 최초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여섯 살 여자아이가 고민으로 해쓱해져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여섯 살 무렵, 내 영혼은 쇠락하고 있었다. 어떤 문제를 끌어안은 덕분에.


 내가 네 살 무렵만 해도 동네에 텔레비전이 있는 집은 드물었다. 다들 먹고 살기 빠듯한데, 텔레비전을 산다고 해서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그때 우리 집은 서울 삼양동에 있었는데 주변엔 주로 가난한 서민들이 살았다. 어느 정도로 가난했냐면 대부분의 구매행위가 고작 10원 단위로 이루어졌다. 5원어치 콩나물을 사 오라는 말은 당시 엄마들이 많이 시키던 심부름이었다. 내 기억에 50원짜리부터는 큰돈이었다. 그래서 종이돈이었다.


 하루는 방앗간에 사람들이 모여서 시끌벅적했다. 다가가서 보니 어떤 사람이 지폐(아마 500원 짜이였나 보다.)를 주고 거스름돈을 거슬러 간 것이다. 그러자 주인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구경시켜주었다. 그 종이돈을 양손으로 반듯하게 펴서 보여주던 주인의 모습이 생생하다.


 가난한 마을에서 유일하게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 있었다. 주인이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집에는 텔레비전이 있었다. 그 당시엔 대충 tv라고 하거나 텔레비전이라고 하지 않았다. 유식한 사람은 정식 이름(텔레비전 수상기)으로 부르거나 서민들은 '태레비'라고 불렀다.

 

 요즘은 tv크기가 점점 커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화면을 크게 보기 때문이다. 크기만 커지고 있지 무게나 두께는 날로 적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 tv는 반대였다. 기본적으로 크기와 무게가 상당했다. 크기는 작은 옷 장만하고 무게는 어른 두 명이 들어야 했다. 전면 양쪽에는 스피커가 들어가 있어서 귀를 갖다 대면 웅웅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신기한 물건에서는 사람들이 자주 보였다. 하루 종일 나오는 건 아니었다. 저녁 6시인가 시작되어 12시에 영업을 종료했다. 웅장한 반주에 맞춘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황금시간대도 있었다. 저녁 7시쯤 되었는데 주로 드라마가 나오는 시간이었을 거다. 아니면 구봉서나, 배삼룡 아저씨가 나오는 '웃으면 복이 와요'나 최불암 아저씨가 반장으로 나오는 '수사반장'이 나왔다.


 그 시간대에는 동네 사람들이 텔레비전 있는 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런데 너무 몰려와서 그랬나. 아니면 일찍부터 상영권이나 지적재산권 개념이 자리 잡은 건가. 주인은 관람료를 받았다. 당시로선 꽤 비쌌다. 1원이나 2원 정도로. 돈이 없으면 마당에 서서 화면은 못 보고 그저 듣기만 했다. 라디오가 일상이던 때라 그것도 감지덕지였다.


 하루는 수사반장을 보다가 엄마가 데려와서 금방 가게 된 아이가 있었다. 그러자 아이가 돈을 돌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주인은 치사하게도 한번 받은 돈은 돌려주지 않았다. 대신 다음번에 올 때 1시간 공짜로 보여주겠다고 했다.


 여섯 살 무렵에는 우리 집에도 텔레비전을 들이게 되었다.(의인화된 이 화법이란. 당시엔 텔레비전을 모시는 분위기였으니) 그 기기가 들어온 날부터 저녁시간에 가족끼리 서로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 드물었다. 모든 사람들 시선이 안방에 있는 텔레비전을 향했으니. 다들 그 기계에 홀딱 빠졌다. 나는 빠지다 못해 연구 대상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모든 게 신기했다. 어떻게 네모 상자 안에 그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지.


 작은 머릴 굴리고 또 굴렸다. 동화 '걸리버 여행기'를 참고한 듯하다. 소인국 사람들이 그 상자 안에 살고 있을 거라고. 그런데 어느 날 보니 그 소인국인들이 음식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그럼 요리를 했다는 건데, 하면서 또다시 고민에 싸였다. 그래서 그들도 장을 본다는 새로운 결론에 다 달았다.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텔레비전 뒤에 가서 살펴보았다. 그들이 드나들 만한 쥐구멍 같은 게 있나 하고. 그러자 주먹만 한 구멍 하나가 발견되었다.(지금 생각하니, 기계가 열 받았을 때 열기가 빠져나가도록 뚫어놓은 구멍 같다.)


 그동안 그 구멍 안으로 사람들이 드나들었을 모습을 생각하니 왠지 모를 배신감이 몰려왔다. 그럼 그렇지. 내가 안 보는 사이에 일을 벌여왔구나 하고. 그래서 잠복근무를 결심했다. 하루 중 내가 그 구멍을 쳐다볼 수 없는 시간은 딱 두 경우밖에 없었다. 밤에 잠을 잘 때와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갈 때. 그런데 시장을 따라가면 호떡 같은 걸 얻어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밤샘근무를 택했다.


 하루는 부모님이 이불을 여며주고 불을 끄실 때까지 자는 척을 했다. 그리고 임무수행을 위해서 곧 눈을 떴다. 현장을 덮치기 위해. 한 시간이나 버텼을까. 하지만 다음날 눈을 떠 보면 매번 작전을 실패했음을 알고 통탄했다.


 이를 스스로 합리화했다. '어차피 밤엔 장을 못 보잖아. 그러니 낮에 들락거릴 게 뻔해.' 그래서 시장에 따라가는 걸 과감히 포기했다. 엄마는 의아해했다. 아무리 아파도 따라가던 애가 웬일이지? 하고. 달콤한 간식을 포기했건만 하루 종일 안방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상상했던 장면은 현실과 달랐다. 내 계획은 제법 디테일했다.


 내가 눈을 부릅뜨고 있으면 그들이 드나들 엄두를 못 낼 것이다. 그래서 옆방에 갔다가 금방 돌아오는 거다. 그때 작은 사람들이 몰래몰래 기어 들어오다가 나랑 눈이 마주칠 것이다. 그러면 무척 무안해하면서 나를 보고는 어색하게 씩 웃는다. 그들은 곧 검지 손가락을 들어 입에 대고, '쉿' 하는 몸짓을 한다. 다른 식구들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일종의 영업비밀인 셈인데 누설하면 안 되니.


 나의 장대한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자, 결국 부모님께 그동안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물어보았다. 그때 아주 심각한 표정이었을 것이다.(지금 생각하면 아빠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힘드셨을 듯) 아빠가 나에게 말씀해주셨다. 그들은 소인국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서 우리에게 전기로 보내주는 거라고.


 '전기로 보내준다고? 어떻게 사람을 전기로 보내지?' 또 꼬치꼬치 물어보았다. 그러자 아빠는 전선줄을 가리키셨다. 전선 속에 전기가 통하면 텔레비전에 나오는 거라고. 아빠도 그 이상 설명해주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머리는 더 아파왔다. 또 상상의 나래를 폈다. 우리랑 똑같은 몸집의 사람들이 국수처럼 몸을 얇게 만 다음 차례차례로 그 전선줄에 들어가는 장면이었다. 그 일은 소인국 때보다 더 힘들어 보였다. 이젠 연민까지 생겨났다. '어떻게 저 얇은 줄 속으로 사람들이 들어갈까? 참 힘들겠다. 우릴 위해 참 애쓰는구나.'


 이런 고민들로 어린 내 영혼은 너덜너덜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 당시만 해도 심각했다. 꽤 오랫동안, 밥을 먹을 때나 잠자리에 누워서나 그 고민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 동시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힘들게 일을 해서 우리가 행복한 거니까.



요즘은 텔레비전을 실시간으로 보는 일도 드물다. 핸드폰으로 '다시 보기'한다. 50년 넘게 살다 보니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그리고 여섯 살짜리가 인생 최초로 영혼이 메마를 정도로 하던 고민은 그 내용이 대폭 바뀌었다.


그 뒤로는, 

인심 좋게 풍성한 양에다가 

언뜻 보기에도 비논리적이나

때론 그럴싸하게 인과론적이고

소름 끼치게 잔인하기까지 고민들로 

무한 리필되고 있다.










이미지 출처: 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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