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윤숙 Apr 24. 2020

항아리 뚜껑

눈 비올 때 장을 지켜주던 항아리 뚜껑

요즘엔 장을 담가먹는 사람이 별로 없다. 어릴 적 대부분 사람들은 고추장, 된장을 집에서 직접 담가먹었다. 장은 보관에 세심하게 신경 써야 했다. 낮에는 뚜껑을 열어 햇볕을 쪼이고, 저녁엔 서리를 맞지 않도록 뚜껑을 덮어주었다. 특히 눈 비가 오는 날에는 미리 덮어야 했다. 설령 뚜껑을 닫는 일이 늦어져서 눈비를 맞아도 괜찮았다. 햇볕이 나면 뚜껑을 열어 한껏 볕을 쪼이게 해 주면 되니까. 볕에 소독이 되면 다시 깨끗한 장이 되었다.


장들은 항아리에 담겨 장독대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그 항아리들을 관리하는 건 예로부터 여자들의 부담 내지는 권한이었다. 우리 집 항아리들은 엄마가 신줏단지 모시듯 했는데 관리 비법은 단순했다. '장 관리=항아리 관리=항아리 뚜껑 관리'였다. 항아리 뚜껑은 무척 무거웠다. 어릴 땐 손에 대지도 못하게 했다. 깨뜨릴 수 있으니. 조금 커서는 내가 그 '항아리 뚜껑 관리 보조'역할을 도맡았다. 엄마들이 항아리 뚜껑을 관리하는 일은 무척 번거롭고 힘든 일이었다. 기상 변화를 일일이 신경 써야 했기 때문이다.


비가 올 것 같으면 몸이 쑤신다는 어르신들은 장독대를 가라고 하셨다. 가서 항아리 뚜껑을 닫으라고. 그러면 거짓말처럼 곧바로 비가 왔다. 오랫동안 집을 비우면 어떻게 될까? 그땐 '옆집 찬스'가 있었다. 옆집에서는 우리 집 대문을 통하지 않고도 우리 집 장독대로 건너올 수 있었다. 장독대끼리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장독대가 있는 우리 집 담벼락은 옆집 담벼락을 지탱하고 있어서 손쉽게 건너올 수가 있었다. 그땐 이웃끼리 이렇게 장독대 관리를 도와주었다.





코로나로 사람들과 거리를 두자니 많은 것들이 드러난다. '우리가 이렇게나 가까웠구나. 우리는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구나.' 하는. 하지만 많은 것을 막아내야 했다. 바이러스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서로 그 항아리 뚜껑 역할을 해주고 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걸으며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가리고.


해외 유명가수들은 콘서트 취소로 실망한 팬들을 위해 '방구석 콘서트'를 열어준다. 외로움이라는 비를 음악이라는 뚜껑으로 덮는다. 유럽에선 저녁마다 베란다 콘서트를 한다. 저녁을 먹고 베란다에 나와서 못 부르는 노래라도 돌아가면서 부르는 거다. 삑사리가 나도 괜찮다. 그냥 우리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 보여주면 되니까.


인도에서는 소리 나는 타악기 등을 이용해서 '소리 내기'축제를 벌인다. 신나는 소음을 냄으로서 정적 속에 버려진 느낌을 소음이라는 항아리 뚜껑으로 덮어준다. 이 재난 앞에서 외로움이라는 비는 사치일지도 모른다. 더 큰 비가 있다. '경제라는 비'다. 이는 가히 허리케인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 허리케인을 잠잠하게 덮어주는 뚜껑은 무얼까? 그건 바로 '재난 기본소득'이다. 이번 코로나 위기는 기본소득을 실험해보기 딱 좋은 기회다.


우리 딸은 스테이크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최근 손님이 급격히 늘었다고 한다. 재난 기본소득이 지급되자마자 일어난 일이다. 매출이 늘자 고용주의 사라졌던 웃음기는 다시 돌아왔지만 우리 딸은 과로로 쓰러질 지경이다.


그깟 10만 원이 무슨 소용이 될까라고 하겠지만, 이는 우리나라 소비의 주체가 누군지 모르고 하는 말이다. 아무리 가정 경제가 나빠져도, 심지어 IMF 때도 청소년들은 돈을 썼다. 다른 소비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청소년 용돈은 잠들지 않는다. 온전히 소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소상공인들이 운영하는 음식점이나 옷, 소품 가게 등에서 소비가 활발히 일어난다. 경기가 나빠지면 가장 치명상을 입는 이기도 하다.


이 '항아리 뚜껑'은 경기의 막힌 기를 뚫어준다. 가장 말단에 위치한 세포가 살아나야 전신 건강이 회복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기본소득은 꼭 재난 시에만 필요할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사는 우리다. 만약 로봇에게 일자릴 빼앗긴 후 설자리가 없어지면. 그땐 뭘로 먹고살까?




반려견을 기른 적이 있다. 반려견을 보면서 부러울 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월요일 아침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침대를 박차고 일어날 때다. 그때 반려견은 한가롭게 누워서 놀고 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안 한다. 그냥 먹고 자고 싼다. 그런데도 우린 열심히 일해서 간식을 사다 주고 아프면 병원에 데려간다. 단지 강아지의 안락을 위해. 강아지의 안락을 위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강아지와 사랑을 주고받기 위해서.


기본소득이 코로나라는 재난 앞에서 실험되는 모습에 개똥철학이 떠오른다. '우린 사람이니까 소중하다. 그래서 살 가치가 있다.'라는 것이다. 일자리를 로봇에게 빼앗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우리는 그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다. 기계가 할 수 있는 단순 노동인 것들에 한해서.


어쩌면, 처음부터 우리는 일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혹시 놀기 위해 태어난 존재는 아닐까? 그저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만약 코로나로 국민 대부분이 사망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그 존재 자체로도 충분히 사랑스러울 것이다. 살아나 주었다는 사실 자체로.


삼풍 백화점 사건이 있을 때 이야기다. 그때 남편과 나는 일로 만나는 사이였다. 나를 좋아한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나에게 대놓고 말은 안 했다. 삼풍 백화점 사고가 나던 날은 마침 내가 그 백화점에 설계도면을 제출하러 가던 날이다. 그것도 딱 붕괴되던 시간에. 그때 남편은 내 걱정이 되었나 보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남편은 삐삐를 쳤다. 나중에 확인해 보고 깜짝 놀랐다. 호출 문자가 10통이나 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늦게서야 전화를 했는데 곧바로 전화를 받은 남편이 다급히 물었다. 왜 이렇게 늦게 전화를 했냐고.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걱정이 되었다고. 나는 마침 그날 미팅이 연기되어 삼풍백화점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고마워요." 그래서 내가 잘못 들은 줄 알고 물었다.

"뭐라고요?", "왜요? 뭐가 고마워요?"

그러자 남편이 짧게, 그러나 굵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살아나 줘서요."


그 말이 지금까지 귀에 쟁쟁하다. 세상에나! '살아나 줘서라니.' 

나는 죽지 않고 요행히 살아났고, 그걸로 그는 감사해한다. 나는 존재 자체로 빛나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빛은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았다. 그리고 그 빚을 결혼이라는 보답으로 돌려주었다. 말 한마디 치고는 꽤 경제적인 셈이다.


어쩌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린 굉장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는 말이다. 우린 그저 존재 자체로도 빛나는 존재다. '재난 기본 소득'에 이어 '국민 기본소득' 개념이 자리 잡길 바라본다. 그래서 로봇에게 일을 시키고 우린 그 시간에 음악을 듣는 거다. 거리를 걸어 다니기만 해도 고마운 존재로서.


이 모든 게 그저 공상 과학 소설에만 나올법한 이야기일까? 그렇더라도 당장은 재난 기본소득이 그 기능을 충실히 해주었으면 좋겠다. 마치 눈이나 비, 때론 천둥번개에서 항아리 뚜껑을 조용히 덮어주던 엄마의 손길처럼.




작가의 이전글 텔레비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