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해져서 강해지는 것들
나이가 들면서 완성되는 것들
나이가 들면서 약해지는 부분이 많아지고 있다. 120살까지 살 수도 있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고맙다. 약해지는 부분이 다른 부분을 강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
자기 합리화라고 해도 좋다. 어쨌든 좋아지고 있으니.
단기 기억력이 약해진다.
: 기억력이 선별적으로 약해졌다. 무엇보다, 사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장기 기억이나 복합적이고 융합적인 사고는 잘 이루어진다. 직관력이라고 할까? 한눈에 알아채는 능력, 사람이나 사물을 보고 앞 뒤로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능력이 좋아지고 있다.
'스토리 부자'이기도 하다. 내 안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저장되어 있어 수시로 응용과 출력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딸이 즐겨 보는 드라마를 같이 보았다. 내가 다가가서는, "저 남자가 지금 여자한테 왜 화가 났어?" 그러면 여자가 바람이 났다고 의심하는 것 같단다. 그럼 내가 여자 표정이나 몸짓을 보고 말한다.
"저 여자는 저 남자에게 사랑이 식은 거야."
우리 딸이 말한다.
"어떻게 한 번만 보고 알아?"
"그거야 여자 눈빛을 보면 알지. 계속 딴 데를 보고 있잖아. 남자는 괜히 헛물켜는 거야."
나도 딸 만할 땐 몰랐다. 사람과 사람 간의 미묘한 눈빛이나 몸짓의 세계를. 무수히 깨지면서 눈치가 생긴 것. 지금도 고수들에 비하면 한 참 아래지만.
단기 암기력이 좋은 학생이 있고 이해력이 좋은 학생이 있다. 이는 성적 차로 나타난다. 즉 단기 기억력이 좋은 학생이 단순 암기과목에선 성적이 우수하지만 이해력 과목에서는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단순 암기 과목에서는 낙제를 받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종합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는 과목에서는 다르다.
감각이 둔해진다.
: 신혼초에 시어머님과 함께 눈썹 문신을 하러 갔다. 그때 피부에 마취약을 발랐는데도 통증이 극심했다. 심지어 애 낳는 것만큼 아프다고 소릴 질렀는데 시어머님은 괜찮다고 하신다. 내가 엄살을 떨었을까?
얼마 전 딸과 함께 한의원에 침을 맞으러 갔다. 나는 부황을 뜨는 거나 침 맞는 게 전혀 아프지 않았는데 딸은 아프다고 난리다. 나이가 들면서 감각이 둔해진 것. 치료할 일이 많아지는데 잘 된 일이다.
또 혀가 둔해진다. 이제 달고 맛있는 음식을 찾지 않는다. 쓴 맛도 쉽게 삼킬 수 있게 되어 몸에 좋은 음식을 잘 챙겨 먹을 수 있다.
가까이 있는 게 안 보인다.
: 젊은 시절엔 멀리 있는 게 안 보였다. 가까이 있는 게 잘 보이니, 내 얼굴에 치장을 하고 예쁜 걸 좋아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걸 멀리 두고 보아야 잘 보인다. 그러니 웬만하면 다 예뻐 보인다.
근시안적인 안목으로 살아왔던 시야가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는 조금 더 넓은 각도로 보라는 자연의 이치가 아닐까? 뭐든 멀리 보면 넓게 보게 되니까.
이는 사랑에 대한 각도도 해당된다. 전에는 우리 아이들만 예뻤다면 이제 젊은이들이 다 예뻐 보인다. 사랑의 분사각도가 한없이 넓어지는 느낌이다. 공원에 앉아 계신 할머니들이 왜 아이들을 보고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시는지 이제 알겠다.
나는 아직 노년이라고 하기엔 젊다고 할 수 있는 나이다. 하지만 이런 증세는 앞으로 가속화될 것이다. 그런데 그 증세에 나쁜 면만 있는 게 아니란 점이 다행이다. 오히려 나의 단점을 보완하는 부분이 많아서 새로운 능력치를 개발 중이다.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이 내 눈앞에 있다. 처음엔 갑자기 약해진 신체에 당황했다. 하지만 이제 내 몸이 내게 말하고자 하는 것에 바짝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 있다. 이 현상들은 결코,
쇠락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