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이 던진 질문

'그냥' 살다 가느냐, '고결'하게 살다 가느냐.

by 허윤숙

안중근 장군을 소재로 흥미진진한 영화를 만들 수도 있었다. 암살장면이나 전투씬이 스릴 서스펜스적인 요소를 갖추었으니. 하지만 싹 걷어냈다. 심지어 눈물도. 눈물이 흐르고 나면 나트륨도 수분도 공중으로 날아간다. 그래서 눈물을 내장에 저장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런지 사진처럼 기억되는 장면들이 많다.

#1 두만강 얼음판 위의 안중근 사진

#2 담배연기 속에서 회의를 여는 동지들 사진

#3 안중근의 교수대 사진

#4 안중근이 "코레아 우라" 외치던 하얼빈 역 사진

#5 김상현이 고깃덩어릴 뜯으면서 오열하는 사진


명화나 흑백 사진처럼 대부분 정면샷으로 담아냈다. 앵글도 고정되어 인물들의 대사에만 집중하도록 한다. 기억에 꼭꼭 담기 위해 사진처럼 연출한 것 같다. 결과적으로 '스토리'보다는 '장면'과 '대사'들이 남았다. 감독이 원한 것도 이거였지 싶다.


단순화해서 뇌에 남길 것. 남겨야 한다. 반드시. 독립운동가들이 동료가 죽을 때마다 몸부림쳤듯 말이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해주지 않으면 누가 그들을 기억해 주겠느냐."


영화는 청년 안중근의 고뇌로 시작된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두만강 얼음판 위를 비틀비틀 건너는 안중근

얼음판두께가 얼마나 될지 언제 깨질지 알 수 없다.


영화적 기법이 어떻고 꼭 비평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에겐 어떨지 모른다. 하지만 이 감독은 작정한 듯하다. 난 재미보다 기억되길 원해. 도파민은 잠시 넣어두길. 영화공식 그거 누가 모르나. 여기엔 아닐 뿐이지.


단 영화 초반부터 연속되게 흐르는 소품이 있다. '창문'이다. 낡고 답답한 창문들이 계속 나온다.


작은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온다. 알량한 양이지만, 칙칙한 어둠 속에서 인물의 실루엣을 드러내기엔 충분하다. 그 빛이 안중근의 교수형 장면에선 위치와 크기가 바뀐다. 어렴풋이 들어오던 빛이 위에서 부어지는 빛으로 변한 것이다. 창문이 위에 있어서 하늘에서 직접 쏟아지는 빛이다. 안중근 얼굴 위로 굴러 떨어진 빛은 36년 동안 무럭무럭 자란다. 그리고 마침내 온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해방)을 안겨준다.

이 영화는 한 나라 한 민족, 한 시대에 걸친 호흡만을 다루지 않는다. 안중근을 다룬 '영웅'이라는 영화도 있지만 이 영화는 안중근을 영웅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저 조금 앞줄에 선 민초이자,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따뜻한 피가 몸속에 흐르는 젊은이일 뿐이다. 대신 그를 끌고 가는 강력한 힘이 있다. '고결함'이다.


호모사피엔스가 모닥불 주위에 앉아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순간, 우린 각자 결정할 수 있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이 아니라 조금 더 크고 먼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것 말이다. 극 중 김상현이 모리가 주는 고깃덩어리를 뜯어먹으면서 눈물을 흘린 이유다. 우린 눈앞의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이는 또한 우릴 수많은 유인원 종 중에서도 살아남게 해 준 원동력이다.


우덕순이 김상현에게 왜 변절했느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이때 김상현은 대답한다. "그냥 살고 싶었을 뿐"이라고. 이때 조우진 배우의 대사는 "그냥, 살고 싶었어."였다. 하지만 내 귀엔 "그냥"이라는 말 뒤에 있는 쉼표를 뗀 대사가 들렸다. "그냥(단순히 생존본능에 충실하게) 살고 싶었어."라고. 안중근 장군의 '고결하게(보다 넓고 높은 가치를 갖고) 사는 것'과는 반대로 말이다.


극 중 이상섭은 죽어가면서 모리 중사를 약 올린다. 자신의 상사인 이토 히로부미를 지키는 것보다 안중근 죽이기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쪽 팔려서' 아니냐고. 자신에게 고결함이 없어서 질투심에 '고결함을 죽이는 것'이라고.


고결함이 좋다는 것은 누구나 직감적으로 안다. 그런데 그 고결함을 어떻게 가져야 하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 해법을 찾게 된다. 안중근장군이 두만강 얼음판 위에서 독백하는 장면에서다.


어둠과 바람은 더욱 거세게 불지만 '불'을 들고 그 어둠 속을 걸어가라고. 그 걸음이 지치고 힘들고 당장 이루어지진 않아도, 그게 10년이 걸릴지 100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또 급히 갈 수도 있고 더디 갈 수도 있지만 목적을 달성하는 그 순간까지 불을 들고 어둠 속을 걸어가야 한다고.

현재 우리는 여전히 어둠 속에 있을까, 제법 걸어 나왔을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걷기를 중단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 얼음판에서 벗어날 테니.

단 안중근 장군이 이상섭에게 부탁했던 말이 가슴에 얹혔다. 자기가 먼저 죽거든 무덤 위에 술이나 한 잔 따라달라고 한 말 말이다. 우린 그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아직 모른다. 그의 유해를 찾고 싶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볕이 많이 드는 곳에 묻어드리고 싶다. 그리고 그 위에 따라드릴, 되도록 많은 술을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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