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우는 시기가 필요한 이유
오디션프로그램 전성기가 있었다. 랩, 아이돌, 밴드 등 여러 장르로 펼쳐지는 경합이었다. 그 기간 동안 배출된 아티스트들이 현재 중견가수급으로 성장했다. 응원했던 가수가 스타가 되어가는 과정은 대리만족을 주었다. 경연 과정이 인생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오디션 프로그램에는 클리셰가 있다. 참가자가 무대에 선다. 우물쭈물 말하며 긴장된 모습을 보인다. 곧 반전이 일어난다. 첫 소절을 부르자마자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클로즈업된다. 원석임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폭풍칭찬을 받은 후 다음 회가 펼쳐진다. 칭찬받았던 참가자는 부담을 이기지 못한 듯 실수를 한다. 심사위원들의 혹평이 이어진다. 참가자가 눈물을 보인다. 이어지는 경연에서 단점이 보완되었다는 평가를 얻어낸다.
반년에 걸쳐 레이스를 펼쳐나가는 동안 수없이 좌절하고 고양되다가 우승을 차지한다.
그 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의 태도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누가 봐도 잘했는데 혹평을 하는 경우다. 일반인에 비해 눈이 높을 수도 있다. 단순히 취향 차이일수도. 음모론까지 나온다. 경쟁 참가자를 영입하기 위해 일부러 까내리는 거다. 심장을 쫄깃하게 해서 시청률을 노리는 거다. 우승을 위해 특훈 하는 거다. 선의의 충격장치다 등등.
상상해 보았다. 우승자가 결과를 알고 과거로 돌아가는 거다. 다시 참가하게 된다면 우승할 수 있을까.
누구나 칭찬에 약하다. 으쓱하면 덜 불안하니 다음 곡에서 모험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신 투혼은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혹평을 들으면 어떨까.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영혼을 갈아 넣을 것이다. 매 경연이 밸런스를 어떻게 맞추느냐에 달렸다.
살아온 시간들을 돌이켜본다. 20대 시절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그 과정에서 심사위원이 불쑥불쑥 등장하곤 했다. "너 이번엔 좀 하더라. 기대할게.", "이번엔 완전 꽝이야. 대체 네가 준비한 게 뭔데?", 좀 심할 땐 "이건 진짜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렴."
충고, 비평, 조언등이 유효 적절하게 고민의 낭비 없이, 그렇다. 조금도 고민할 필요 없이 쓰였다면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금처럼 아주 아주 겸허(?)하게 살진 못했을 것이다. 또한 나에게 혼자 울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영혼을 갈아 넣을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겉으론 정체되어 보이는 시기가 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 시기에 가장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심사위원들이 악역을 맡는 순간이다.
지금 잘 되고 있다면 저축해 놓은 연료를 꺼내 쓰는 것뿐이다. 마치 계단 같다. 수평으로 보이는 시기는 가장 많은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있는 구간이었다.
만약 지금 과거 힘든 시기의 내 옆에 서있을 수 있다면.. 마치 남극 다큐멘터리에서 위험에 처한 펭귄을 보는 느낌일 것이다. 자연에 손을 대면 생태계가 깨진다. 도움이 해가 될 수도 있다. 어차피 해결될 것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아니다. 결말을 말해 주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 스포 당한 영화는 재미와 감동이 없다. 최고의 장점이 있다. 결말을 모르니, 최소한 볼썽사나운 인간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