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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May 22. 2019

청개구리 엄마

어쨌든 아이가 행복하다면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알림장의 부모님 난에 쓴 글씨가 아무래도 어른 글씨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알림장에는 받아쓰기를 다섯 번 써오라고 한 숙제에 대해서, “우리 아이는 잘하니 안 써도 됩니다.”라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바로 우리 아들이 쓴 것이다. 왜 그렇게 썼냐고 하니까 일장 연설을 한다. 자기는 받아쓰기를 매번 100점 맞는데 왜 다른 애랑 똑같이 다섯 번씩 쓰게 하느냐고 말이다. 이런저런 일들로 나는 학교에서 오는 전화를 받거나 학교에 찾아갈 일이 많았다.    

 

우리 아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기 결정권을 사수했다. 무엇이든 시키면 안 하고, 오히려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즉 12 지간 상으로는 분명 말띠인데, 생물학적으로는 청개구리띠였다.    

어릴 때 할머니 무릎에서 듣던 옛날이야기 중 슬프고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청개구리 엄마’ 이야기였다. 평소 아들이 말을 안 들어서 속상하던 엄마가 결국 병이 나서 죽게 되었다. 그때 아들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자기 무덤을 시냇가에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래야 거꾸로 땅에 묻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정신을 차린 청개구리가 엄마 말대로 진짜로 시냇가에다 무덤을 만들었다. 그래서 비가 오면 엄마 무덤이 떠내려갈까 걱정되어 ‘개골개골’ 운다는 이야기다.     


사실 청개구리는 억울하다. 이야기 구도 상 어쩔 수 없이 악역을 맡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다르다고 말이다. 예를 들어 청개구리는 원래 아이돌이 꿈이었다. 그런데 엄마는 그 꿈을 무시하고 공부만 하라고 한다. 공부 학원을 여러 개 다니게 하고 매일 문제집을 산더미처럼 풀게 한다. 거기에다 더해 핸드폰을 빼앗아 춤이나 음악을 못하게 한다면? 아마 정신이 반쯤 나갈 것이다. 그러다가 우울증과 원형탈모증에 걸리고 공부가 싫어진다. ‘청개구리 짓’이 자기가 하고 싶은 꿈을 외면하고, 공부만 하게 하는 엄마에 대한 반항이었다면...    


학교에서 실사 판 청개구리들을 종종 본다. 우화에 나오는 청개구리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아이들 말이다. 수학 시간에는 만화를 그리고 미술시간에는 만화책을 읽는다. 친구들에게는 이유 없이 시비를 붙고 선생님께 인사할 때는 책상에 엎드린다. 상담실로 데려가서 말을 시켜보면 대부분 비슷한 패턴의 문제가 있다.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해서 다 아는 문제를 푸니 수학 시간이 따분하고, 미술학원에서 따로 배우니 학교 미술시간은 시시하고, 등등의 이유로 수업시간에 산만하다. 학원에서는 친구들과 놀아서 그나마 낫다. 집에 가면 산더미처럼 밀려있는 학습지를 해치워야 한다.   

  

우리 아들이 어릴 땐 나도 그런 엄마였다. 하지만 시행착오 끝에, ‘청개구리 엄마’가 되어 아들보다 내가 한 술 더 뜨기로 했다. 예를 들어 게임을 좋아하는 아들에게는 게임 CD를 질리도록 사다 주어 일삼아하게 하고, 아들이 진행하는 게임방송을 응원하면서 더 인기가 많은 친구들과 비교하며 자존심을 건드리기도 했다. 직업으로 프로게이머가 되면 어떻겠냐고 하면서, 그러려면 밤을 새워서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시험기간이 되면 외식을 하거나 영화를 보러 가자고 말해서 시험을 방해하기도 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게임이 공부나 일처럼 느껴졌나 보다. 또 엄마만 믿고 살다가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일까? 얼마 전 아들이 독서실을 신청하게 돈을 달라고 한다. 내가 놀라서 왜 그러냐고 하니, “게임도 이제 재미없고 친구랑 노는 것도 시시해요. 심심해서 공부나 좀 해볼까 봐요.”     


나는 아들이 원한다면 프로게이머든 게임 개발자든 응원할 생각이었다. 본인이 행복해진다면 말이다. 대신 무엇을 하든 대충 하지 말고 죽도록 매달리라고 했다. 원한다면 자퇴도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러나 아들은 나보다 소심했다. 아니면 내가 너무 나가니까 겁이 난 것일까?    


선대인 소장과 최진기 강사가 진행하는 ‘4차 산업혁명시대의 미래 교육’이라는 세미나에 간 적이 있다. 거기서 급변하는 시대에는 어떤 교육이 바람직한가?라는 화두를 두고 최진기 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PISA 성적은 높은데 반해 창의력 시험에서는 하위를 차지한다. 창의력 시험에서 3T 즉 Technology(기술), Talent(재능), Tolerance(관용성)를 보는데, 우리나라 학생들은 특히 관용성이 조금 부족하다. 관용성이란 새롭고 이질적인 생각과 발상에 대해 수용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러려면 먼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없어야 한다. 창의력을 높이면 성적은 약간 떨어질 수 있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이 행복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창의성이 떨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천편일률적인 문제풀이 위주의 선행학습이다. 본질적으로는 소질이나 적성에 상관없이 주지교과 중심의 공부만 강요하는 풍토가 문제다. 일단 부모들이 아이들에 대해 공부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이 거기에 아무 생각 없이 순응하다 보면 창의력은 저절로 없어진다. 아이들과 대화를 자주 나누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어보자. 그리고 학원이나 학습지를 조금만 줄여주자. 대신 아이들의 행복이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혹시 자기 아이가 청개구리 기질이 있다면 억지로 공부를 강요하지 말고, ‘여러 가지 대안’을 통해 아이들이 보다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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