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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May 22. 2019

고려청자 같은 사람, 양은 주전자 같은 사람

사람이 명품이다

어릴 때 보았던 드라마가 생각난다. 고려 시대의 도공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였다. 난 어린 시절 그 고려청자가 왜 귀하게 대접받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내 눈에는 그 당시 집집마다 머리맡에 두고 자던 요강과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어린 마음에도 좋지 않게 느낀 것이 있었다. ‘왜 잘 만들다가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망치로 깨부수나?’ 하는 것이었다. 깨뜨리지 말고 가난한 이웃에게 가져다주면 잘 쓸 텐데 하면서 말이다. 알고 보면 그냥 물이나 술을 담는 그릇일 뿐인데 너무 까다롭게 군다고도 생각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보니 그릇이라고 다 같은 그릇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그릇을 쓰는 사람의 신분이나 장소에 따라 품위가 있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잘 깨지므로 조심조심 다루어야 하는 모양새에서도 귀한 느낌이 난다. 

고려청자에는 술도 담지 않았을 것이다. 술의 성분 때문에 삭아서 금방 깨지면 안 되니 말이다. 그야말로 그냥 바라만 보는 장식용으로 쓰였을 것이다. 따라서 고려청자는 그 자체로도 제 역할을 충실히 한 셈이다. 

어린 시절 집집마다 고려청자는 없었지만 양은 주전자는 있었다. 특히 우리 동네 구멍가게에서는 한겨울에 연통 달린 난로를 피웠다. 그 난로 위에는 커다란 양은 주전자가 하루 종일 기차 소리를 내면서 끓었다. 뚜껑이 들썩들썩 춤을 추면서 말이다. 그 양은 주전자 안에는 항상 귤껍질 차나 보리차가 끓고 있었다.  

인심 좋은 주인아저씨는 가게에 들르는 사람에게 그 차를 한 사발씩 따라주시곤 했다. 간혹 물건을 살 생각도 없이 귤껍질 차를 마시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싫은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어린 내게는 그 주전자가 고려청자보다 더 멋있어 보였다. 집에 있는 요강(실제로 우리 집 요강 색깔과 무늬는 고려청자와 비슷했다. 게다가 우리 집 요강에는 고려청자에 없는 뚜껑도 달려 있었다.) 같이 생긴 고려청자보다 쓰임새가 좋아 보였다. 위로 들 수 있는 손잡이와 물을 따라주는 주둥이가 있었다. 

하루는 눈깔사탕을 사러 갔다가 주인아저씨가 손님들에게 차를 따라주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차를 따를 때마다 쉴 사이 없이 주전자 주둥이로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비록 여기저기 찌그러져서 모양새는 볼품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 주전자 하나만으로도 한겨울에 우리 동네 사람들을 잠시 동안이나마 따뜻하게 해 줄 수가 있었다. 

중년이 되고 나서 내 삶을 중간 점검해 본다. 이러다가는 고려청자도 아니고 양은 주전자도 아닌 그냥 만들다만 그릇이 되어가는 게 아닌가 싶다. 어차피 고려청자로 빚어지긴 글렀으니 지금부터라도 양은 주전자가 되어볼까? 외모는 양은 주전자랑 점점 닮아가고 있다. 점점 불어나는 배와 늘어지는 볼 살, 찌그러지는 얼굴형 때문에... 

특히 꾸역꾸역 먹기만 하고 운동하지 않은 날은 나 자신이 더더욱 양은 주전자 모양처럼 느껴진다. 그럼 이제 팔만 한쪽 내면 되겠구나 싶다. 마치 주전자처럼 따뜻한 물을 따라줄 주둥이 말이다. 그까짓 고려청자가 안 되면 어떤가? 너무 가득 차도 흘러넘치지 않고 자신의 팔을 내어 남들에게 나눠줄 수만 있다면. 

상해에 살 때 들은 이야기다. 중국인 직원이 중국에서는 통장 비밀번호를 본인만 안다고 말했다. (지금은 모르지만 몇 년 전 만 해도 중국은행은 전산화가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어떤 부모는 자식한테도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다 본인이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물어보니 실제로 중국에는 비밀번호를 몰라서 돈을 못 찾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중국인 직원의 지인 한 분이 돌아가신 후 통장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거액의 돈이 예금되어 있었다. 그런데 자식들은 비밀번호를 몰라서 돈을 인출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분은 평소 자식들한테도 인색하게 구셨다고 한다. 

그분은 혹시 고려청자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자신이 쓰고 나서 아무리 남는다 하더라도 결코 남에게 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을 위해서는 비싼 명품 옷을 쉽게 사면서도 말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아무리 명품으로 치장해도 고려청자로 보이지 않는다.  

이태석 신부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느낀 것이 있다. 신부님의 유품이 화면에 비추어질 때였다. 그분이 평소 입고 다니던 다 해진 바지는 이 세상 어떤 명품 바지보다 귀해 보였다. 잠시 생각해 본다. 그런 바지의 주인공은 주전자이자 고려청자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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