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윤숙 May 30. 2019

전쟁도 아닌데 이토록 많은 고아들

작지만 행복할 수는 없었을까?

아동학대가 심심찮게 거론된다. 어린이집 교사들이 아이들을 폭행한 영상이 뜨면 여기저기서 논의가 이루어진다.


또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있었다. 계부가 10대 의붓딸을 성폭행하고 친모와 같이 보복 살해한 것이다. 이런 일이 생기면 차라리 그 딸을 보육원에 맡기지 그랬냐는 말도 나온다.


얼마 전 보육원 봉사를 다녀왔다. 이번 봉사는 몇 년 전 동창들과 했던 지체장애인 목욕봉사에 이어 두 번째인데, 이 나이 먹도록 아직 이 정도밖에 못 한 것이 이내 부끄러워진다.

나 하나 먹고살자고 맨날 아등바등 대다니 …….’

 

보육원 아이들을 보면서 의아한 게 있었다. 그건 일전에 보았던 지체장애인들보다 아이들 표정이 어둡다는 것이다.


한창 엄마의 어리광을 받아야 할 나이에 아이들끼리 단체로 생활하면서 사랑을 제대로 못 받으니 그대로 까칠함이 드러난다.


이 아이들은 전쟁 때 고아와 다르다. 대다수 부모가 멀쩡히 살아있으며, 핸드폰으로 통화도 한다. 그래서 가끔 주말에 와서 외출을 데리고 나가는 경우도 있다.


연락을 주고받는 건 행복한 경우다. 이 보육원에 아이를 입소시킨 후 한 번도 오지 않는 엄마들이 태반이라는 것.


입소 사유는 대부분 이혼이다. 그리고 나중에 엄마 아빠가 각자 다른 사람과 재혼을 하는 경우에 오게 되는 경우도 있고, 경제적인 문제로도 온다고 한다.


그런데 어쩌면 이 부모들이 아이를 더 사랑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의붓딸 살해사건 같은 경우를 보면 그렇다. 딸을 보육원에 보냈으면 최소한 살해당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로 보내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보육원 지원이 이전 시대에 비해 풍족한 요즘, 보육원 아이들은 빈곤가정 아이들보다 훨씬 잘 입고 잘 누린다.


이번 봉사 중 눈에 띄는 아이들이 있었다. 유난히 까무잡잡한 얼굴과 마른 체격에 원숭이 이마를 가졌다.


게다가 한눈에 봐도 날랜 몸동작까지 판박이인, 네 명의 남자 형제들이었다. 그들은 늘 함께 움직였는데, 가장 큰 형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동생들을 살뜰히 보살피는 게 느껴졌다.


원장님 설명에 의하면, 맏형이  4년 전 처음 들어오고, 연년생인 동생들이 그 뒤로 1년에 한 명씩 입소를 하다가 급기야 올해 7살짜리 막내 아이가 들어왔다고.


그 아이들은 떨어질세라 손을 꼭 붙잡고 다녔다. 6.25 전쟁 때라면 그 정도로 애절했을까?

 

아이를 넷이나 낳았으니, 또 막내가  7살이니, 최소한  6년 전까진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대체 왜?


갑작스러운 경제 파탄이나 사고가 났나? 질병 등으로 인해 경제활동이 불가능했을 수도. 하지만 도저히 마음속으론 용서가 안된다. 그 부모들은 아이들이 보고 싶진 않을까?


아이들과 앉아 밥 먹는 시간에 나는 막내에게 조심스레, “이 음식을 초밥이라고 한단다. 이건 웬만한 아이들이 잘 못 먹어.”하고 슬슬 자극을 주었다.


그 아이는 가만히 듣다가 처음엔 안 먹던 초밥 접시를 자기 앞으로 다 끌어다가 오물거리며 먹었다. 그 아이의 긴 속눈썹, 사랑스러운 빨간 입술. 말할 때  ‘어. 어.’하는 아기스러운 습관이 떠올라서, 그 엄마는 때론 밥 먹다가 숟가락 놓고 통곡하진 않을까?


한번 보고 온 나도 이렇게 눈에 선한데. 하물며 자기가 낳고 기른 자식이라면 말이다.


지체장애인 공동체에서 때밀이 목욕 봉사하던 때가 생각난다. 그곳엔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도 있었지만, 가족들이 최선을 다 하다가 어쩔 수 없이 보낸 경우가 더 많다. 가족 모두가 그 아이에게 매달릴 수 없어서 말이다.


그런 아이들은 결코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정신지체가 있거나 교통사고로 뇌를 다친 경우 등 뇌 활동이 정상적이지 않다.


슬픈 감정을 못 느끼는 점도 있지만, 적어도 부모님이 자길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란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느낌이다.

 

아이를 보육원에 보내야 하는 사정이 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멀쩡히 부모가 살아 있으면서 아이들을 보육원에 보내다니.


그 부모 마인드는 혹시 '모 아니면 도' 식이 아닐까? 아이를 낳는 순간엔 누구보다 훌륭한 아이로 키우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낳고 보니 현실이 녹록지 않다.


어차피 제대로 교육시켜서 잘난 아이를 만들지 못할 바에야 경제력 탓, 배우자 탓을 하고는 보육원으로 보낸다.


적어도 돈이 없어서 교육 못 시키는 죄책감에서는 해방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아이한테 물어보았으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엄마랑 헤어지는 대신 공부 잘하고, 명문대 가서 돈 많이 벌고 호강할래? 아님 엄마랑 살면서 맨날 학원도 못 가고 라면만 먹으며 살래?”

하고 물어보면, 아마 열이면 열, 다 후자를 택할 것이다.


그리고 선택의 조건 자체가 틀렸다. 적어도 요즘은 명문대가 취직을 보장해 주지도 않을뿐더러 그 월급으로 호강하기 힘들다.


또 설사 입사한들 정년을 보장해 주지도 않는다. 운 좋게 정년을 채웠다 쳐도, 노후가 안락하리란 생각을 접어야 한다.


노후가 안락하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생에는 얼마나 많은 변수가 있으며, 개인이 느끼는 행복 또한 얼마나 다른가? 아이들은 오직 사랑으로 크는 존재다.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가르치지 못해도 괜찮다. 가족끼리 사랑의 끈만 놓지 않는다면 작지만 행복하게 살 수는 있다. 이런 소박한 행복을 누리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어떻게 살다 가야 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