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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Jun 19. 2019

책을 빼앗겨서 생긴 공부 욕심

청개구리 조련법

원래부터 책 읽기는 좋아했지만 학교 공부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이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는 하라고 하면 더 하기 싫어하는 심한 청개구리 과였다.


하지만 이 부분이 해결된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 후  평생 닥치는 대로 읽고 보고 듣고 찾아다녔다.


그 사건은 초등학생 때 우리 반에서 나를 시기하던 친구 때문에 일어났다. 우리 집 근처에 살았던 그 친구는 샘이 많았다.


그 친구랑 같이 있을 때 누가 나에게 예쁘다고 하면 하루 종일 삐져서 말을 안 했다. 그런데 문제는 공부를 내가 더 잘한 것이다.


그 친구는 열심히 노력을 하는데도 시험성적이 나빴다. 그러자 어느 순간 내 공부를 방해하는데 진력을 다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 시험기간에 내 책들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 당시엔 참고서 같은 것도 없어서 교과서가 유일한 교재였는데 말이다.


그런데 시험이 끝나면 그 책이 내 책상 위에 놓였다. 그 친구의 짓인지 뻔히 알면서도 말을 못 해서 답답할 뿐이었다.


그런 일이 몇 번 있고 나서 수업시간에 집중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야 시험기간에 책이 사라져도 시험을 잘 치를 수 있으니 말이다.


그 일 이후로 책에 대한 집착, 공부에 대한 집착이 생겼다. 아이들은 하지 말라는 일은 더 하고 싶어 하는 법이다.


공부하길 싫어하는 아이들이 있다. 요즘 아이들 중 훨씬 많은 것 같다. 일단 보고 듣고 할 재밋거리가 주위에 넘쳐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부모들 때문이다.


늘 무턱대고 공부만 하라고 하니 말이다. 딴 건 다 해줄게 하면서. 그런데 아이들은 공부만 빼고 딴 건 다 하려 든다.


특히 제일 하지 말라는 컴퓨터 게임은 밤을 꼬박 새워도 지치지 않고 한다. 그리고 부모님이 다 해준 딴 것 때문에 무기력해지고 무책임한 아이들이 양산된다.


왜냐하면 아이들에게선 부모님의 유전자 외에 2%가량의 외래종 유전자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파충류에서 온 유전자로서 바로 '청개구리 유전자'다.


이건 조금 자라면 소멸되는데 그걸 못 참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부모들 때문에 아이들이 참 힘들어한다. 한 술 더 떠서 현명한 부모는 아이들이 무언가 하고 싶어 하는 시점에도 슬쩍 밀당을 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학원을 하나 더 다니게 해 달라고 지나가듯 말할 때, 생활비가 요즘 많이 들어서 힘들다고 말한다든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할 때 아이에게 과거를 떠올려 보게 하는 것 등 말이다.


예를 들어, ‘피아노 학원은 그렇게 지겨워서 그만두었는데, 기타는 끈질기게 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자문하게 하는 거다.


‘새 연필 증후군’이라는 게 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도 새 연필, 새 공책을 사주면 ‘반짝’ 공부하는 현상이다.


모든 면에서 그런 게 적용되는데 예를 들어, 야심 차게 요가를 시작하는 경우다. 집에서 가까운 데도 있는데 굳이 시내 쪽에 있는 유명한 학원을 찾는다. 그리고 초짜 티 안 내려고 요가복도 제일 고급스러운 걸로 쫙 빼입는다.


그러나 결국은 가뭄에 콩 나 듯 가다가 다시 복싱 쪽을 기웃댄다.


케이팝스타 4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던 샘 김이라는 가수가 있다. 그때 1년 반 정도 배운 기타를 수준급으로 연주해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는데, 타고난 음악성도 있겠지만 나는 다른 데서 결정적인 비결을 엿보았다. 샘 김은 중학생 때 친구가 학교에 가져온 기타를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엄마에게 기타를 사달라고 했는데, 엄마가 계속 미루다가 결국 1년 뒤에나 사주셨다고. 기타에 대한 애달픈 시간들이 그를 키웠으리라. 아마 기타를 갖고 싶으면 성적을 올리라든가 집안일을 도우라든가 하면서 엄마가 조건을 내세웠을 수도 있다.


그러는 동안 사랑하는 기타를 한 순간도 잊지 않았을 것이고 그 열정이 고스란히 기타에 대한 공부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기타를 갖게 된 순간 그 누구보다 열심히 기타 연습을 하지 않았을까?


요즘은 소유에 대한 애타 함, 기다림 같은 것들이 이전 시대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물질이 풍요로워지면서 갖고 싶은 건 곧바로 가질 수 있는 시스템 때문에.


그렇지만 무엇이든 자기 스스로가 아쉬워서 해야 능률이 오르고 오래간다. 나는 이런 일명 ‘자기가 아쉬워서 하는’ 동기유발 비법을 우리 딸과 아들한테도 써먹고 남편한테도 써먹는다.


잔소리 안 하고 아들이 학원에 가기 싫다고 하면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학원에 문자를 보낸다. 오늘 가족끼리 행사가 있어서 학원에 못 간다고.


그런 일이 반복되면 아들이 그런다. 학원에 가면 자기만 진도가 쳐지니 괜히 친구들에게 샘이 난다고. 그래서 요즘은 웬만하면 학원에 빠지는 일이 없다.


잔소리 결핍 맘의 최절정은 뭐니 뭐니 해도 시험 부문이다.


하도 성적 가지고 혼내지를 않으니(나는 가끔 일부러 우리 아들 시험 때 콘서트를 예매해놓고 가자고 그런다. 이쯤 되면 엄마가 아니라 공부 훼방꾼이다) 우리 아들이 하루는 나에게 그런다. “엄마가 잔소리를 안 하시는 건 저에게 관심이 아예 없으셔서 그런 거 아녜요?”


속으로 나는 그랬다. ‘내가 원하던 게 이거였어.’ 나는 짐짓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한다.

“아들아. 나도 요즘 먹고 살기 참 힘들다. 몸도 늘 피곤하고, 학교에서 하루 종일 애들 가르치고 특히 말을 많이 하다 보니, 너에게까지 신경 쓸 시간이 없었어. 미안하다. 그럼 앞으로 하루에 한 번 정도는 꼭 시간 내서 잔소리해 보도록 할게.”


우리 아들은 그 뒤로 엄마 믿고 살다 간 노숙자나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알아서 학원도 잘 다니고 숙제도 알아서 잘한다.


내가 유독 우리 아들에게 무심한 척하는 이유가 있다. 출생 시부터 범상치 않은 눈빛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 아들.


진즉에 나는 알아보았다. 일곱 살에 영어유치원에 잠깐 보냈는데 거기서 매일 영어단어 시험을 10개씩 보았다. 그때 우리 아들 하는 말. “엄마. 아직 일곱 살밖에 안됐는데 벌써부터 이런 단어시험을 봐야 해요?”


하면서는 답안에 온통 ‘?’로 도배했던 우리 아들. (그 당시 미국인이었던 선생님도 점수 란에 ‘?’를 써 놓으셨다.)


그 뒤로도 공교육에 대해 끊임없는 문제를 제기하던 우리 아들. 만약 내가 그런 반항적인 아들에게 끊임없이 잔소릴 했다면 아마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우리 아들은 나를 닮았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일찍이 교육은 어린 시절에 이루어져야 하지만 어떤 강요도 있어선 안 된다고 했다.


강요로 얻은 지식은 마음에 남지 않기 때문인데, 어릴 때의 학습은 오락처럼 이루어져야 하고 그래야 아이의 타고난 소질을 개발할 수 있다고 했다.


플라톤이 살던 당시엔 요즘처럼 다양한 교육기자재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교육을 오락으로 만들었을까 궁금하다. 주로 질문을 유도하지 않았을까?


학생들이 자꾸 궁금하게 만들고 호기심을 자극해서 견딜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도록 말이다.


아이들에게 자꾸 궁금증을 가지게 해야 한다. 일부러라도 결핍과 시간차를 통해 스스로 공부하고 싶어 못 견딜 상황을 만들어내자. 그러면 제발 자기 아이들이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공부 좀 그만했으면 하고 바랄 날이 오지 않을까?


그리고 성적에 대한 관점도 바꿔야 한다. 아이들이 성적표를 집으로 가져오는 날. 그 날 풍경은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성적이 잘 안 나온 아이의 주눅 든 모습과 화가 난 부모의 모습. 그리고 다음 시험은 잘 보겠다는 다짐을 받아두고서 끝이 나는 갑과 을의 관계 말이다.


우리 집 풍경은 사뭇 다르다. 나는 우리 아이들 성적표 가지고 오는 날 대사를 준비하느라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번엔 또 무슨 말로 위로를 한 단 말인가? 하고.


최근 시험에서 우리 아들은 예상보다 수학시험 성적이 안 나온 모양이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씩씩거리면서

“엄마. 너무 이상해요. 객관식 문제는 3개밖에 안 틀렸는데 점수가 이모양이에요.”

“그럼 선생님께 시험지를 갖고 가서 확인해봐.”

“시험지를 잃어버렸어요.”

“..........”


대부분 이런 식이다. 늘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여러 가지 이유로 성적이 잘 안 나온다. 그러면 나는 남편이랑 열심히 아들을 위로한다.


우리 아들은 이번 내 위로가 너무 성의 없다고 느꼈는지 “엄마, 엄마는 제 속상한 마음을 아시는 거예요? 왜 위로를 제대로 안 해주세요?”한다.


이쯤 되면 기가 막히다. 부모가 화내고 자식이 머리를 조아려도 시원찮을 판에 큰소리를 치면서 위로를 강요하다니.


우리 가족 풍경이 다른 집과 다른 공부에 대한 인식 차이 때문이다.


나는 공부는 자신의 인생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해준다. 부모도 결국은 남이라는 인식을 우리 아이들에게 일찍부터 심어주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최소한 공부를 해서 어떻게 먹고 살아가야 하며 남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성적이 안 나오면 걱정이 되어 한숨이 나오는 것이다. 학원도 자기들이 알아보아 자기한테 맞는 것으로 결정하고 필요하면 다른 학원을 또 등록하거나 한다.


그런 과정을 강요하거나 한 적이 없다. 다 어차피 자기 인생이니까.


친구가 한 말이 떠 오른다. 우리가 어릴 때 부모님들은 우리보다 교육을 적게 받으셨다. 그래서 부모님이 우리를 간섭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런데 요즘은 부모들의 교육 수준이 높다 보니 아이들을 관리하려 든다. 학교에는 교사, 집에는 더 깐깐한 매니저가 있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무기력하다는 것이다. 엄마가 다 짜논 판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시스템에서는 의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공부에 있어서는 부모가 한발 짝 물러서서 지켜보는 건 어떨까?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공부가 노는 것보다 재미있다고 말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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