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없는 교사는 오늘도 해맑음
가끔은 눈치가 없는 게 나을 지도
18년 만에 학교로 돌아와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 지 10년이나 지났다. 처음 교단에 돌아왔을 때 비단 이불 같은 선생님 집단에서 나는 야생마 같은 존재였다.
처음 근무하게 된 학교 교사들 앞에서 인사를 하는 자리였다. 나는 그때 아주 씩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해 버렸다.
“학교 일이 너무 막일 같아서 건축 일을 해 봤는데 더 막일였어요. 다시 돌아와서 기쁩니다.”
그때 순간 정적이 흐르면서 여기저기 피식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친해진 선생님한테 들었는데 내 말투가 진짜로 웃겼다고. 보통 처음 인사에서 “부족한 저를 잘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또는 “선생님들 얼굴을 뵈니 다들 인상이 좋네요.” 등 격조 있는 인사말을 하는데 말이다.
나는 그 뒤로도 학교 사회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다. 예를 들어 학부모들에게 진심을 노출했다가 동료 교사한테 꾸중 비슷한 소릴 듣곤 했다.
교장선생님 앞에서 할 소리 안 할 소리를 다 하기도 했다. 다른 선생님들이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던 것.
그럴 때마다 선생님들은 나한테 눈치를 주었다. “선생님. 그렇게 마음속 이야기를 다 하시면 어떻게 해요? 선생님은 참 눈치가 없네요.”
생각해보면 나는 늘 눈치가 없이 살았다. 지나친 열정으로 인해서도 그랬다. 중국에서 4년 여 살다가 곧바로 한국에 왔으니 적응하지 못한 부분도 있다. 게다가 오랜 시간 동안 사장을 하면서 눈치 보는 법을 잃어버렸다.
다행히 나의 눈치 없음이 아이들에게는 색다르고 신선한 선생님으로 비치는 것이었다. 학교 분위기 생각 안 하고 그냥 질러버리는 수업을 하니 말이다.
과학전담일 때 주로 그렇다. 한 번은 6학년 과학 실험 중 이산화탄소 발생에 관한 실험이 있었다. 동기 유발 자료로 공기보다 무거운 드라이아이스를 보여줌으로써 이산화탄소의 성질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재료를 준비해 주시는 과학 조교 선생님이 난색을 표했다. 드라이아이스를 구매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알아보니 최소 구매 단위가 큰 아이스박스로 하나이고, 하루 안에 다 소비해야 하는 게 문제란다. 드라이아이스는 개봉하고 나면 금방 증발되기 때문. 그래도 끈질기게 설득해서 구매한 나는 의기양양하게 수업을 진행했다.
먼저 아이들이 들어오기 전에 과학실 불을 다 끄고 암막커튼을 내렸다. 완전히 깜깜하게 만든 다음 아이들이 웅성거리면서 “뭐지?” 하고 교실에 들어와 다 앉으면 실험복을 입은 내가 짠 하고 나타난다.
그리고는 드라이아이스를 집어서 물이 담긴 수조 안에 멋지게 던진다. 에지 있게 말이다.
그러면 부글부글 거품이 나면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때 음악을 틀어준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노래로.
그러면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엄청 좋아한다. 그 뒤에 불을 켜고는,
“얘들아. 이렇게 연기가 바닥으로 좌악 깔리지? 왜 그럴까?” 그러면 아이들이 그런다.
“공기보다 무겁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내가 크게 칭찬해 주면서 밤무대 쇼를 성공적으로 마친다. 가끔 지나치게 솔직한 아이가 그런다
“아유. 선생님 요즘 드라이아이스 안 써요. 그건 밤무대에서 트로트 가수들 나올 때나 쓰지. 요즘은 불꽃같은 거 터뜨린다고요.”
하긴 그동안 내가 한국을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나 보다. 그러다가 드라이아이스가 금방 다 녹아버렸다. 마지막 반 수업이 문제였다.
어쩔 수 없이 유명 아이스크림가게로 뛰어가 아이스크림을 사고 포장용 드라이아이스를 얻어 오기도 했다.
이처럼 수업을 할 때마다 마술쇼 내지는 퍼포먼스가 연상되는 장면을 연출하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의 아이들은 내 수업을 기다리게 되었다.
지구과학을 가르칠 때는 지구 내부의 각도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멜론을 사다가 설명해주곤 했다. (요즘은 조금 싸졌지만 10년 전엔 무척 비쌌다.)
그러면 멜론 향이 과학실에 퍼진다. 나는 그때 열심히 설명을 한다. 그 향과 함께 지구 내부 수직과 수평 개념을 떠올리길 바라면서.
그런데 가끔 학교보다 학원을 더 신뢰하는 학생들이 있어서 내 빈정을 상하게 하곤 한다. 심지어 그런 ‘행위예술'을 싫어하는 학생들이 있다.
주로 점수에 연연하는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은 고학년의 경우 교육과정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교사의 권위에까지 도전을 한다.
즉 왜 교과서에 없는 걸 자꾸 하냐고. 그러면서 시간표대로 하고 교과서대로 해야 한다고 꼬집는다.
그런 쓸데없는 활동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냐고 말이다. 하루는 너무 기가 막혀서 그런 일로 엄마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수학 시간에 삼각형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이러저러한 활동을 했어요. 그런데 7명의 아이들이 그 활동이 필요 없다고 하면서 시간낭비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학원에선 그렇게 안 가르친다고요.
그냥 문제 푸는 요령만 가르치면 되지 왜 굳이 그런 활동으로 자기들을 귀찮게 하냐고요. 그래서 물어보니 다 학원과 학습지를 두세 개 이상 하는 학생들이더라 구요.
그런데 앞으로 수학은 스토리텔링 식으로 바뀔 것이고 더 이상 단순 계산식 수학은 사라질 거예요. 그러니 앞으로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 메시지에는 단 두 명만 답변이 왔다. ‘네. 선생님의 열정이 와 닿네요. 앞으로 학교 수업도 집중하라고 할게요’
요즘 같은 시대 흐름상 나의 눈치 없음이 정점을 찍은 일이 아닌가 한다. 나는 사교육을 반대하진 않는다. 예체능 부분이나 부진아 혹은 심화 공부를 원하는 학생 같은 경우엔 꼭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공부 잘하는 아이들까지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심하게 해올 때 문제가 생긴다. 머리는 좋지 학원에서 배워 내용을 다 알고 있지 하니 선생님에게 그 내용을 듣는 순간부터 지겹다.
학습의 기승전결을 제대로 밟지 않는다. 그냥 결과만 알고 있거나 더 나아가 요점과 문제풀이 방법만 아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학원마다 편차가 있는데 단순 계산만 강조하는 학원들은 이제 반성해야 한다. 그런 아이들이 수학공식이 나오기까지의 귀찮은 과정들을 되짚어 나가고 싶을까?
그러니 “그냥 닥치고 문제만 풀어주세요.”가 되는 것이다. 이런 학교 분위기 속에서 과연 어떤 교육이 이루어질까?
늘 결과 위주의 공부, 시험 위주의 공부, 그리고 그에 걸맞은 수업만 하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갈파하지 못하고 맨날 쇼. 쇼. 쇼를 하는 나 같은 교사는 참 서럽다.
물론 알아주는 아이들이 훨씬 많긴 하다. 주로 “선생님 같은 분은 처음 본다”라고. 공부가 이렇게 재밌는 건지 처음 알았다는 아이들도 있다.
특히 고학년을 가르칠 때 나의 터프한 스타일은 좀 먹힌다. 주로 완벽한 모범생 스타일 선생님들만 보던 아이들에겐 나처럼 좀 엉뚱하고 어딘가 어설프고 부족해 보이는 교사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고학년 학생들이 특히 그렇다. 나의 약간은 껄렁(?)한 모습은 그들과 쉽게 공감대가 형성된다. 학부모회를 맡아서 운영한 적이 있는데 엄마들은 한 결 같이 교사들의 과다 규칙과 경직된 사고방식을 문제 삼았다.
사회의 발전 속도랑 안 맞는다고. 일단 아이들이 숨 막혀하는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 원인을 생각해 보면 교대 입학점수를 보면 답이 딱 나온다.
일단 고등학교에서 전교에서 1, 2등 해야 들어가는 교대 프리미엄이 한몫한다. 임용시험은 어떤가? 재수는 기본이고 6수까지라도 해서 합격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니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오래도록 공부만 했던 학생들, 심지어 대학 들어가서도 동아리 활동 같은 거 일절 안 하고 임용시험만 준비하는 학생도 있다.
다들 단 한 번의 일탈도 안 한다. 똑똑하고 모범생이다. 결과적으로 경험의 폭이 좁다. 아이들에게도 완벽한 규칙과 인내심을 강요한다. 물론 유연한 사고로 아이들을 포용하는 선생님들도 있다.
그런 경우 다른 직장 다니다 뒤늦게 교대 공부해서 들어온 경우나, 방학 때마다 해외에 배낭여행을 간다던가 하는 다양한 경험의 소유자들이다. 그런 경험이 수업시간에 오롯이 녹아들어 재밌는 수업을 개발해 낸다. 이럴 땐 교사란 직업이 창의적인 직업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란 생각이 든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너무 규칙을 잘 알고 사회생활을 눈치 있게 잘하는 게 과연 좋을까? 혹시 매너리즘에 빠지는 지름길이 아닐까? 무슨 일을 하던, 어디에 있던, 신선한 발상을 할 줄 안다면 훨씬 재밌게 살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래서 눈치 없는 교사인 나는 오늘도 엉뚱 발랄하게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