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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Jun 18. 2019

우리 아이들을 수포자로 만들지 말자

내가 수학을 못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몇 년 전 가르쳤던 남학생이 생각난다. 전반적으로 공부를 못했는데, 특히 수학에 약했다. 수학시험을 볼 때마다 항상 빵점을 받는 아이. 그 아이는 스스로를 ‘수포자’라 불렀다. 초3에 벌써 수포자라니.


나는 수포자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 대학 수학은 항상 F였는데 4학년 마지막 학기 수학은 다행히 교수님이 D학점을 주셔서 졸업을 하였다. 하지만 그 아이 때문에라도 난 수학 교재 연구에 몰두했다. ‘재미없는 수학은 가라.’하는 심정으로.


우선 다양한 수학적 체험을 하게 하고(주로 먹는 것으로 하다 보니 월급이 많이 축나기도) 시험은 되도록 보지 않았다. 지적 갈증을 유발한 것이다.


그 결과 그 엄마가 학교에 와서 하신 말씀이 아이가 처음으로 수학을 재미있어한다는 것이다. 매일 엄마에게 그날 배운 수학 문제를 내 보도록 한다고. 수학 문제집을 보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키던 아이인데 말이다. 게다가 문제를 제법 푼다는 것이다.


그 어머님이 물어보셨다. 어떻게 가르치셨냐고. 나는 대답했다. “저는 시험을 보거나 문제 풀이를 하지 않아요. 수학익힘책에 나온 것만 샘플로 해보라는 식이죠. 수학 시간 대부분을 수학적 체험 활동에 씁니다. 예를 들어 분수의 의미를 가르칠 땐 호떡을 사다가 나눠주고 미션을 줍니다.


그러면서 그 미션에 맞게 호떡을 자른 사람에게는 그 호떡을 먹으라고 해요. 그러면서 어려운 단위 분수의 개념과 더 나아가 나중에 배울 약수 개념까지도 어렴풋이 알게 되거든요.”


아이들을 가르칠 때 늘 생각하는 키워드는 ‘즐거운 놀이’다. 즉, ‘놀이처럼 공부하고, 공부처럼 노는 것’ 그 경계가 모호해질 때 수업이 성공했다고 느낀다. 예를 들어 원에 대한 개념을 가르치면서 칠판에 써 가면서 설명하면 너무 추상적이다. 특히 ‘어째서 원 안에서 중심을 지나는 선은 모두 같은 거지?’ 하게 된다.


그래서 아이들을 운동장으로 데리고 나갔다. 한 사람씩 막대기를 주워 오라고 하고서 운동장에 큰 원 그리기를 했다. 또 모둠별로 미션을 여러 가지로 주었는데, 가장 큰 원 그리기나 중심점을 지나는 길이를 여러 가지로 재어보는 활동 등을 했다.


그랬더니 원에 대한 개념을 쉽게 이해했다. 아이들은 그 시간에 분명 놀았지만, 몸 전체로 수학적 원리를 익힌 것이다. 이렇게 원리를 깨우치는 활동을 스스로 하면, 공부를 하는 게 적어도 미래를 위해 마시멜로를 참는 ‘지겨운 시간 참아내기'가 아니다.


수포자의 연령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수학을 어렵게 느끼는 아이들이 많다. 수학 교과서 내용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도 원인 중 하나다. 6학년 내용이 3학년으로 내려올 정도다. 그러다 보니 수학을 어려워하는 아이들이 수학을 아예 포기하는 것이다. 중˙고등학생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딸이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시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수학 객관식 시험에서는 3번이 정답으로 많이 나오는 바람에 수포자 학생들은 통상 3번으로 통일해서 찍는단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한 시험에서 2번이 많이 나왔고, 3번이 정답인 객관식 문제가 딱 두 개밖에 안 나온 것이다. 그래서 한 문제당 4.5점인 수학시험에서 두 문제만 맞은 학생들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대부분 학생의 수학 점수가 9점으로 통일되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나는 전형적인 문과 스타일이다. 이과 쪽 과목, 특히 수학을 지독히도 못했다. 그런 내가 고3 때는 무슨 수학귀신이 붙었는지 1년 내내 수학 공부에만 매달렸다.


그런데 무참히도 시험장에서는 다 찍었다. 단 한 문제도 못 풀고 말이다. 나는 수학을 사랑했는데 수학이 나를 싫어한 것이다.


그런데다 대학에서 수학은 모조리 F를 받아 재수강하는 바람에, 그 꼴 보기 싫은 수학을 늘 두 번씩 들었다.


당연히 내가 수학에 소질이 없는 줄 알았다. 적어도 구조역학이라는 매력적인 학문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초등학교 교사로 첫 발령을 받자마자 ‘사표를 언제 내나?’만 생각했다.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학교행정이나 교육 흐름 때문에 숨이 막혔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사회는 초고속으로 달리고 있는데 교육만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내가 그 ‘교육이라는 차’에 올라탔다가는 같이 제자리걸음을 할 거라고 보았다.


그래서 창의적인 일을 알아보던 중 건축설계에 관심이 생겼는데, 건축기사를 따기 위해서는 이과 쪽에 해당하는 과목을 다섯 과목이나 공부해야 했다.


건축학원에 등록해서 강의를 들었는데, 구조역학이란 과목이 제일 어려웠다. 이상한 기호도 많고 공식도 복잡해서 지레 겁을 먹었다. 그런데 강사가 너무 잘 생긴 것이다.


얼굴은 그 당시 인기가 있었던 한석규를 빼다 박은 데다, 목소리까지 동굴 보이스인데 무엇보다 강의력이 뛰어났다. 설명을 너무 잘하니 그냥 철학, 아님 미학으로 느껴졌다. 나중엔 강사 얼굴이나 목소리가 아닌 구조역학이라는 학문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 매력은 치명적이어서 길거리 가다가 큰 빌딩을 바라보면, 그 구조에 맞는 스팬을 떠 올리게 되었다. 나름대로 공식을 도출해내서 건물 하중을 계산해 보는 것이다.


나처럼 수학 싫어하고 못하는 사람이 공식을 만들어 본다고? 기현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해 건축기사 1급 시험에서 당당히 합격한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각 과목 40점 이상, 전 과목 평균 60점만 넘으면 합격인데, 한 과목을 쓸데없이 과잉으로 공부를 해서 100점 만점을 받은 것이다.


그 과목은 바로 그렇게 두렵던 ‘구조역학’이었다. 나는 수학에 소질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오히려 소질이 너무 많았다고나 할까?


단 내가 소질을 발휘하려면 그 전제조건이 있어야 했다. 논리성이 함축되어 있거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야 했다. 아니 적어도 지적 희열에 빠질 수 있는 매력을 소유해야 했다.

 

나 같은 사람이 수학을 포기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수학 교과서를 예술적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학생들의 지적 욕구를 해소할 수 있고, 논리력을 향상하는 문제들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학을 포기하는 학생이 지금처럼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학교에서 수학을 좀 더 재미있게 가르쳐야 한다. 실생활과 맞닿아있는 수학적인 활동을 통해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동의 성장단계에도 맞으며 흥미를 유발하고 지속시키기도 쉽다.


그런데 현장에서가 문제다. 이렇게 가르치면 현재 우리나라의 거지 같은 수학 문제를 풀 때 본전도 못 찾을 때가 많다. 개념을 근본적으로 잘 이해한 학생이 개념은 몰라도 죽어라 문제 푸는 방식만 훈련을 거듭한 학생에게 진다.


수학은 철학적이며 논리적이고 창의적인 학문이다.(예전엔 철학자가 수학자인 경우가 많았다.)


내가 어릴 땐 산수라고 했는데, 산수란 그야말로 ‘덧셈, 뺄셈 등을 가르쳐서 어디 나가서 손해 보지 않고 잘 살아라’라는 뜻이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는 이들이 많던 그 시절엔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름이 수학이라고 바뀐 지금도 그 내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일단 교과서를 펴보면 처음부터 빼곡히 문제만 나열되어 있다.


게다가 특목고 진학 등 상위 몇 퍼센트 학생들의 변별력을 키우기 위해서 수학 과목이 존재하는 듯하다. 중 , 고등학교에선 시험시간 안에 다 풀기 어려울 정도로 문제를 많이 낸다.


문제풀이를 많이  학생만 이기는 게임이다. 수학이란 말에 ‘학’ 자가 들어가는 게 아이러니하다. 이에 대해 여기저기 각성의 소리가 나오고 있어, 스토리텔링 수학을 강조하곤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변별력 때문에 다시 계산 기계를 만들어 내곤 한다. 뭐 하러 계산기가 할 일을 사람이 대신하나? 알파고 같은 고철덩어리가 아닌 우리는 자랑스러운 영장류다. 


우리는 좀 더 창의적이고 고차원적인 공부를 해야 한다. 무엇보다 공부하는 과정 중에도 행복해야 한다.


이에 대해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단원에 한해 프로젝트 형 수학을 도입한다는 말도 나왔다.


실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주제를 가지고 모둠별로 과제를 수행하는 방식인데 토론이 선행되어야 하므로 지식의 융합이 일어나는 등 바람직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제도의 도입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 교육의 아킬레스건인 평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한 말이다. 중학교 한 학년 한 학기, 한 단원이라는 적은 양은 교육이라는 물줄기에서 너무 아래에 있다.


그것으로는 산꼭대기에서부터 흐르는 물줄기를 시원한 폭포수로 바꿀 수가 없다. 우리나라 입시 제도가 대대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을까? 하지만 자성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만큼은 희망적이라고 본다.


영포자(영어 포기자), 수포자(수학포기자)라는 말은 참 서글프다. 안 그래도 N포 세대인데 공부만은 재미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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