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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나비효과:정성일과 트뤼포의 '영화광 3법칙'

오역이 만들어낸 한국영화계의 아름다운 오해

by 김형범

영화계에는 때때로 오역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오해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의 말로 알려진 '영화를 사랑하는 세 가지 단계'입니다. 이 명언은 한국의 저명한 영화평론가 정성일에 의해 널리 알려졌지만, 그 진실은 예상 밖의 곳에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번역과 해석, 그리고 문화적 전파의 복잡한 과정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정성일 평론가는 오랫동안 이 '영화광 3법칙'을 트뤼포의 말이라고 소개해왔습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단계는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 두 번째는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것, 세 번째는 직접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는 이 말은 많은 영화 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트뤼포의 어떤 글이나 인터뷰에서도 이 정확한 문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정성일이 트뤼포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퍼뜨렸다는 논란으로 이어졌습니다. 심지어 정성일의 영향을 받은 영화감독 류승완이 방송에서 이 말을 인용하면서, 이 '명언'은 더욱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은 흥미롭습니다. 정성일은 후에 자신이 일본 영화잡지에서 트뤼포의 말이라고 소개된 글을 읽고 오해했다고 인정했습니다. 이는 번역의 오류가 만들어낸 결과였던 것입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정성일의 반응입니다. 그는 2022년 <트뤼포 -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개정판 추천사에서 이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트뤼포의 발언을 왜곡한 일본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했습니다.


이 일화는 번역과 해석의 복잡성, 그리고 문화적 전파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흥미로운 변형을 보여줍니다. 원래의 의도나 내용과는 다르게 해석되고 전달된 메시지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 때로는 원본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정성일의 '영화광 3법칙'은 비록 트뤼포의 직접적인 말은 아니었지만, 그 자체로 많은 영화 애호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는 오역이 항상 부정적인 결과만을 낳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때로는 오역이 새로운 창조의 씨앗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사례는 우리에게 번역의 중요성과 동시에 그 한계를 일깨워줍니다. 정확한 번역과 출처 확인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문화적 해석과 재창조의 가치도 인정하게 만듭니다. 결국 정성일의 '영화광 3법칙'은 오역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문화적 산물이 된 것입니다.


번역은 단순히 언어 간의 전환이 아닙니다. 그것은 문화와 문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입니다. 때로는 오역이 만들어낸 오해가 새로운 통찰과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정성일과 트뤼포의 이야기는 이러한 번역의 복잡성과 창조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시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번역의 세계가 얼마나 풍부하고 다채로운지, 그리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의 문화를 풍요롭게 만드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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