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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탑과 AI의 경계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을 통해 본 번역과 소통의 본질

by 김형범

고대 신화에 따르면, 인류는 한때 하나의 언어로 소통하며 하늘에 닿는 거대한 탑을 쌓으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오만함을 경계한 신은 언어를 뿔뿔이 흩어 놓았고, 인간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결국 탑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바벨탑' 신화라 부르며, 언어의 분열과 의사소통의 단절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예로 여깁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바벨탑 신화가 암시하는 언어의 다양성은 단순한 혼란이 아니라 인류의 문화적 풍요로움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서로 다른 언어는 서로 다른 사고 방식을 만들어내고, 각기 다른 사회적 규칙과 맥락 속에서 다양한 예술과 철학을 낳았습니다. 언어가 분화되면서 인류는 그만큼 다채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표현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인간 문화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은 이 점을 예리하게 파헤칩니다.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세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도구, 즉 '그림'이라고 보았습니다. 그의 "그림 이론"에 따르면, 언어는 세계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 있는 체계적 기호에 불과했습니다. 예를 들어, '고양이가 의자 위에 있다'라는 문장은 단순히 상황을 언어라는 기호로 변환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죠. 이 관점에서는, 한국어든 영어든 해당 사실을 동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순한 변환의 문제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초기 관점을 완전히 부정합니다. 그는 언어가 세상의 사실을 단순히 복제하는 도구가 아니라,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복잡한 놀이, 즉 "언어 게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언어는 그 자체로 고정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사용되는 맥락과 사회적 규칙 속에서 의미를 생성합니다. 예를 들어, 게임에서 "R"이라는 키를 누르라는 말은 롤에서는 궁극기를 의미하지만, 배틀그라운드에서는 재장전을 의미합니다. 같은 기호라 하더라도 맥락이 달라지면 의미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AI 번역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언어의 장벽이 사라지는 시대가 오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AI는 단순한 단어 변환을 넘어서 문맥을 파악하고 적절한 번역을 제시하는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예를 들어, 공연 전의 "Break a leg!"를 "다리를 부러뜨려!"가 아닌 "행운을 빌어!"라고 정확히 번역할 수 있는 것은 AI가 문맥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AI가 이해하는 맥락은 어디까지나 데이터의 통계적 연산에 기반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AI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흉내 내고, 문장을 조합하여 의미 있는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것이 인간의 경험을 온전히 재현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마치 AI가 롤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게임의 규칙을 전부 알려줄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실제로 롤을 잘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도 같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 이론은 이 문제를 정확히 짚어냅니다. 언어는 단순히 기호를 변환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사회적 맥락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살아있는 체계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AI는 통역을 대신 해줄 수 있지만,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를 학습한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와 문법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가 쓰이는 문화를 이해하고, 그 문화를 통해 생각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번역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번역가는 단어를 변환하는 기계가 아닌, 하나의 문화적 맥락을 다른 문화로 재창조하는 예술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을 통해 다른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굉장히 위대한 일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 이론이 강조하듯, 우리는 각자의 언어라는 놀이 속에서 끊임없이 의미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교류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됩니다.


AI는 번역 기술을 통해 많은 문턱을 낮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이 실제로 소통한다는 것은 그 이상의 것입니다. 언어의 풍성함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AI 시대에도 여전히 인간이 언어를 배우고, 번역된 예술을 감상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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