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거장의 손을 훔친 커플

벨트라치 부부의 완벽한 위작극

by 김형범

예술 시장에서 진짜와 가짜는 삶과 죽음만큼이나 큰 차이를 만듭니다. 유명 화가의 서명이 하나 더해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림의 값이 수십억 원까지 치솟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명 화가의 작품은 눈길조차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불균형한 세계의 허점을 기가 막히게 파고든 커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거장의 붓질을 베끼는 데 성공했고,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았던 ‘신작’을 창조해내며 수십 년간 세계 미술계를 완벽히 속였습니다. 주인공은 독일 출신의 화가 볼프강 벨트라치와 그의 아내 헬렌 벨트라치입니다.

Beltracchi-3.jpg

벨트라치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였다고 합니다. 그는 특히 다른 화가의 그림을 똑같이 따라 그리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재능이 오히려 본인의 창작 의욕을 꺾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예술가로서 자신만의 길을 찾기보다는, 이미 인정받은 화가들의 스타일을 분석하고 완벽하게 흉내 내는 데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이 능력을 ‘사기’에 활용하기로 결심합니다. 단순한 복제품이 아니라, 마치 해당 화가가 한때 그렸을 법한, 하지만 세상에 아직 공개되지 않은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기로 한 겁니다.


이 치밀한 위장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그의 아내 헬렌입니다. 헬렌은 벨트라치가 그린 위작에 진짜처럼 보일 수 있는 스토리를 입혔습니다. 그녀는 그림의 출처가 ‘외할아버지의 유산’이라며, 오래전부터 집안에 소장되어 있었던 것처럼 꾸몄습니다. 심지어 오래된 액자와 감정서, 사진 자료까지 준비해 위작의 신빙성을 더했죠. 그녀의 연기는 전문가들도 속일 만큼 능숙했고, 그렇게 그림은 유럽의 유명 화랑과 경매장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벨트라치 부부는 단순히 그림만 따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위작을 완성하기 위해 화가가 사용했을 법한 물감을 직접 만들고, 그림이 그려졌을 당시의 기후나 조명, 분위기까지 재현해 냈습니다. 해당 화가가 자주 머물렀던 지역에 가서 실제 장소에서 그림을 그리고, 작품이 완성되던 시간까지 맞췄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화가는 비 오는 날에만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 착안해, 그들도 비 오는 날에 맞춰 위작을 완성했다고 하죠. 그 정도로 철저했습니다.


그들의 작품은 감정가들에게 진품으로 인증받았고, 몇 점은 수십억 원에 거래되었습니다. 이들 위작은 독일을 넘어 프랑스, 미국, 영국 등지의 미술 시장에서 유통되었고, 유명 컬렉터들과 박물관까지 속아넘어갔습니다. 그런데 결국 모든 위장은 아주 작은 실수 하나로 무너졌습니다. 한 그림에서 사용된 흰색 안료가, 해당 화가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과학 분석 결과가 나오면서 사건은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그 순간부터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고, 수면 아래 있던 벨트라치 부부의 거대한 사기극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결국 법정에 서게 되었고, 볼프강은 징역 6년, 헬렌은 4년의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미술계에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감정 시스템의 허점이 여실히 드러났고, ‘진품’이라 믿고 소장하고 있던 많은 작품이 다시 진위 여부를 의심받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사건은 ‘진짜처럼 보이는 것’이 ‘진짜’보다 더 위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미술 시장의 권위와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벨트라치 부부는 위작범으로 단죄되었지만, 그들이 보여준 치밀한 분석력과 기술력, 그리고 예술적 감각은 분명 보통 사람의 범주를 넘었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범죄는 예술을 조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의 본질을 가장 날카롭게 드러낸 아이러니였는지도 모릅니다.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기준이 과연 단순히 서명 하나, 출처 하나에 달려 있는가? 벨트라치의 그림은 가짜였지만, 그 안에 담긴 노력과 감각만큼은 진짜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예술을 둘러싼 권위와 가치의 의미를 다시 묻게 만듭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악몽에서 태어난 소설